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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훼방 70년” ② : 세월호의 비밀에 진실의 빛을 쪼일 수 있을까?

              
                        최형록 (필통 필진)

최초에 명령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가만있으라, 지시에 따르라, 이 명령은
배가 출항하기 오래전부터 내려져 있었다
선장은 함부로 명령을 내리지 말라,
재난대책본부도
명령에 따르라, 가만있으라, 지시에 따르라

시인 백무산은 시 “세월호 최후의 선장”(창비시선 391, ≪폐허를 인양하다≫, 2015, 138~141면)의 최초를 이렇게 열고 있다. 기간제 교사라는 임금 노예적 “신분”을 이유로 순직대우도 받지 못하고 있는 유가족을 포함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세월호 진상규명”은 이성적 감정(Rational Emotion)과 부합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한국전쟁이라는 참화를 다행히 겪지 않고 태어난 이른바 “베이비부머” 세대인 나에게 재생되는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할 수밖에 없는 집단의 역사적 사건이 종종 연어처럼 솟구친다. 1979년 10월 27일 이른 아침 라디오에서 들린 역도 박정희의 사살―1980년 5월 18일 그 찬란한 청춘의 날에 유언비어 같은 남도의 학살―1987년 6월 10일 27년 전 4.19의 함성이 이런 것이었겠구나라는 환희와 전경에 쫒기는 긴장으로 지랄탄의 안개 속에서 혈기가 출렁이던 쓰나미 같은 민중시위.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가 악의 축 미 제국주의를 강타한 사건이 마치 공상 과학소설을 보는 듯하던 심정을 다시 한 번 울렁인 “세월호 참변”.

 

 

오래 전부터 내려진 명령,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 Order. 명령과 질서. 그 Order는 누구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국가보안법에 가위 눌려 법전 안에서 “상상의 공동체”로서나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약(文弱)으로부터? “입신출세와 대박 챙길 일밖에 아무 관심이 없는 자들”로부터 그 Order는 나온다. 역사적 상황에 대한 “마르크스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가 계급)의 이윤동기가 바로 그 Order의 근원이다. 그런 까닭에 “이 명령은 출항하기 오래전부터 내려져 있”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구조적인 명령이면서 질서(Order)인 것이다.

“청년 일자리를 위한 노동개혁”이라는, 사실은 삶을 파괴하는 창조경제라는 허울로 자유를 능욕하는 신(辛)자유주의의 폭력을 휘두르는 행정부의 명령, 그 명령에 똥개보다 더 잘 알랑거리는 한국노총의 집행부의 복종 그리고 이런 거짓과 개수작을 극복하려는 대담함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응징하는 종 간나 새끼들의 질서. (종 간나: 함경도 사투리로 종년이라는 뜻. 여기서 종은 봉건시대의 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민주를 참칭하는 역도 놈들 그리고 그놈들에 복종하는 놈들을 규정하는 낱말이다).

 

다가올 시대에 대한 은유

“그 침몰은 사실이 아니라 다가올 시대에 대한 은유처럼 들렸다”.(시 “그날”, ≪폐허를 인양하다≫ 118~119면). 121년 전 황토현에서 왜놈들의 기관총 앞에서 “바람이 불면 먼저 쓰러졌다 풀처럼 다시 일어나”지 못한 민중봉기의 처절한 패배가 다가오는 20세기에 대한 은유처럼 들린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학생 김주연은 “세월호와 나”라는 글에서 “나는 이 부실한 사회를 튼튼하고 정직하게 변하게 하기 위해.......내 움직임이 바로 내일의 미래를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1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 고민해보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바뀌어야하는지”라는 결의를 하고 있다.(≪꾸물꾸물 꿈 - 전국 중고생들의 학급 문집 글 모음≫, 창비교육, 2015, 246~248면) 이런 고등학생의 성찰이 “다가올 시대에 대한 은유”의 현실을 명령대로 가만히 있는 Order가 아니라 “세월호 부당 증축 철퇴로 내리치고 / 평형수 빨아먹는 검은돈 불사르”는(학생 김민지의 시 “나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꾸물꾸물 꿈≫ 244면) Order로 만들어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초죽음 되어 법전에 자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심장 고동으로 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던 “분노는 안개처럼 흩어지고, 슬픔은 장마처럼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슬픔이 우울증으로 이런 분노가 소주와 맥주의 불콰함으로 탈진해서 사회적 불의와 부정에 대한 무기력에 오줌 거름을 주는 것으로나 귀결되는 것은 “버림받고 가라앉은 것이 정상사회를 들어올리는 부력”에(앞의 시집, “인양”, 107~111면) 주권자로서의 중력을 행사하지 못한데 연유한다. 왜 그런 부력(浮-腐力)을 넘어서는 중력이 그렇게 가벼운 것일까?

독재를 찬양하는 기술

“눈에 보이지 않는 독재자는 이제 권좌에 있지 않고 독재를 찬양하는 기술에 있다 모든 독재자의 공은 7이고 과는 3이다 진보주의자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 기술”에 따르는 논리가 일제 부역자 박정희의 군국주의 정치를 정당화하는 역사관,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 사이의 갈등을 넘어서 중도적 화합을 지향하자”는 개수작이다. 민주화 세력은 근대적 산업화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이런 개수작은 비열한 “합리적” 보수주의자들 혹은 자유주의자 놈들의 부르주아 실증주의적 사고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민주주의는 사유재산제의 신성불가침을 전제로 부르주아적 법질서를 확립하면 충족된다. 노동자 계급이 등장하면서 “경제 민주화”까지 지향하는 것이 사회 민주주의인 한편 그 “경제 민주화”를 사유재산제를 넘어서 “생산과정 그 자체의 민주화”까지 발본적으로 확대하려는 입장이 바로 “마르크스적(Marxian) 민주주의”이다. 자유주의자들 중 영리한 놈들이 정치적 우위를 위해서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타협하려는 것을 파시스트 놈들 그리고 그 놈들과 공생할 용의가 있는 자유주의자 놈들이 온갖 거짓 논리로 파괴하려드는 것은 김종인 등의 축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경제 민주화”란 용어가 전제하는 경제와 정치의 분리 그 자체가 정확히 이기적이며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지적 열등함의 증거다.   

이런 지적 간교함을 간파하는 데는 지적 능력과 절실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엄연히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보통의 능력으로 현실적 삶의 조건을 파악하려는 “절실한 노력”이다. 삶에서 인간적으로 고귀한 가치들은 실현하는 데 보통 이상의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가? “하염없이 바다를 닮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여고생 정세윤의 시, “바다”, ≪꾸물꾸물 꿈≫, 243면) 생각하고 “기적은 가장 간절할 때 생긴다 간절하지 않을 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중학생 정수렬의 2014년 4월 17일 모둠일기, ≪꾸물꾸물 꿈≫, 237면)고 깨닫는 이런 청소년들에 비해서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실함은 삼겹살에 싸 먹어버린 것인가! 

지옥은 없다?

“전동문을 열고 들어서니 피를 뒤집어쓴 / 잘린 소 대가리가 거대한 탑을 이루고 있다 / 바닥은 피와 똥과 체액으로 질펀한 갯벌이다 / 더운 피의 증기가 뻑뻑한 한증막이다....... / 욕탕 같은 수조는 똥과 내장의 늪이다 / 뜯긴 살점이 사방에 튀고 벽은 온통 피 얼룩이다 / ....... / 이곳에서 누군가는 지옥을 읽었다 / 지옥이 아니다 / 지옥과 닮지도 않았다 / 이곳은 천국의 부속건물이다 /...... / 우리가 괜찮은 노동을 하고 / 그럴듯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장만하는 곳이다.......”(시 “지옥은 없다”, ≪폐허를 인양하다≫, 93~95면).

토할 것 같은 도살장이라는 지옥. “해고는 살인”인 시대에 같은 오랑캐 비정규직을 “그럴듯한 자부심”으로 같은 오랑캐로 다스리며 오랑캐 노동자 계급 전체를 제어하는 자본가 계급에 놀아나는 이 살(殺)풍경이야말로 생지옥이 아닌가!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포용적 성장과 발전 보고서 2015≫에 따르면 한국은 30개 선진국 중에서 복지정책 면에서 26위, 부패행위에 대한 정부의 대응 면에서 24위, 기업윤리 면에서 27위, 기업 독과점 수준은 2위인 반면 기업 규제 수준은 26위, 비정규직 등 불안정 노동자 비중 27위, 노사협력 면에서 29위, 성별 임금격차 면에서 30위, 그리고 계층 이동의 역동성 면에서 29위로 밝혀졌다(<한겨레>, 2015-09-11자 1면). “민주화 운동세력 대 산업화 세력”이라는 한국 부르주아의 세계관이라는 “부력”에 맹목적으로 놀아나는 거짓 자부심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우리들의 투쟁이 돈이 아니라 돈으로 왜곡된 시간이 아니라 / 인간의 시간을 인생의 세월을 되찾는다는 것을 / 틀림없이 확인해야한다 / 자신의 인생과도 싸워야한다” (백무산 시 “자본론”, ≪인간의 시간≫, 창비시선 152, 78~79면). 자신의 인생과 싸움이란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조지 오웰)라는 역사적 성찰을 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투철하다면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 한명이라도 더 구하려다 끝내 오르지 못한 스물두 살 / 4월을 품은 여자 박지영, 그가 최후의 선장이다 / 그 푸른 정신을 따르라, 뒤집어진 걸 바로 세우게 하는, / 죽음을 뒤집는 4월의 명령을!”(“세월호 최후의 선장”) 따라 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이 불의의 Order를 부정하여(Disorder) 주권이 종이호랑이가 아니라 진정한 한반도의 호랑이로 포효하는 Order를 창출해야하지 않겠는가!   

“그 아이들이 천국에서라도 못다 한 꿈을 이뤄내고 우리가 슬퍼하는 만큼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고등학생 채희의 “마음으로 전하는 글”들 중, ≪꾸물꾸물 꿈≫, 250면) 청소년의 간절함을 현실화하는 필요 불가결한 일이 “거짓 공화국”에서 잊지 않고 기억하며 세월호 참변의 진실을 규명하고 기억하는 것임을 이 추수의 계절에 결의해야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반 헌법 행위자 열전≫을 발간하려는 ‘(사)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위원회’에 성금을 보태는 일 역시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국민은행 006001-04-198120 (사)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