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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세월’과 나

 

 

이김춘택 (금속노조 경남지부 부지부장)


일주일만 있으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500일이다. 지금도 매주 수요일 저녁 창원 정우상가 앞에서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밝혀지고 미수습자 9명이 하루빨리 가족 품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촛불문화제를 연다. 사람이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지만, 공연팀이 없어 그냥 촛불과 피켓만 들고 있을 때도 있지만, 비가 오는 날에도 휴가기간이나 명절 연휴에도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촛불은 켜진다.

“한 1년 정도는 해야지” 생각하고 시작한 촛불문화제였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1년이 지나도 밝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정부의 방해로 첫발도 제대로 떼지 못했건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노란 리본은 조금씩 색이 바래고 있었다. 촛불을 든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스레 “또 1년은 더 해봐야지” 하고 모아졌고, 그래서 수요일 촛불문화제는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500일이 지나 600일, 700일이 되면? 그리고 또 다시 봄이 오고 사월이 되면?

촛불문화제는 내년 사월이 지나면 지속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촛불문화제가 끝난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촛불이 꺼지는 건 아닐 것이다. 작년 12월 ‘세월호참사마산시민행동’이 마산 창동 ‘시와자작나무’에서 마련한 송년회 자리에서 세월호 유가족 한 분이 이런 말을 하셨다.

“지금까지 열 달 가까이 싸웠다. 자식을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품어서 낳았는데 열 달을 못 싸우겠냐 싶었다. 그런데 진상을 제대로 밝히려면 어쩌면 10년도 넘게 싸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낳아 17년을 길렀는데 10년 넘게라도 못 싸울 이유가 없다. 우리 부모들은 끝까지 싸울 것이다.”

이 같은 얘길 들으며 “나는?”이라고 속으로 되물었다. 내 삶에서 세월호 참사는 얼마나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인가. 나는 언제까지 노란 팔찌를 하고 살아갈 것인가.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계속 잊지 않고 함께 하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화두 하나, ‘세월’과 나

가끔 생각해 본다. 만약 미디어가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아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그날 아침부터, 커다란 배가 고래처럼 물을 뿜으며 뒤집어져 마침내 맹골수도 바닷속으로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출 때까지, 그 광경을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 서해페리호 사고처럼, 삼풍백화점 때처럼, 대구지하철 참사처럼 그냥 하나의 ‘대형사고’로 다가왔다 잊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팽목항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속이 타들어가며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처럼, TV를 통해 그 모든 걸 지켜보았다. 삼백 명 넘는 목숨 중에 단 하나의 목숨도 구조하지 않은 절망감과 무력감을 조금이나마 같이 느꼈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TV 생방송 뉴스를 통해 함께 본 것이지만, 마치 어느 영화 속에서 엄청난 사건을 홀로 우연히 목격하게 된 주인공처럼 그 사건이 해결되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사건과 운명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렇다. 2014년 4월 16일 나는 세월호와,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304명의 사람들과, 그들을 잃고 슬퍼하는 가족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관계’가 나를 지금까지 끌고 온 힘이다. 그 ‘관계’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나를 끌고 갈 힘이다. 그래서 내게는 ‘세월과 나’의 관계를 좀 더 곰곰이 생각하고 좀 더 또렷하게 규명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차피 십 년, 이십 년 오래 갈 관계라면 긴 호흡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관계는 보다 깊고 넓어져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그리고 진상규명에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약칭 ‘4.16연대’)를 만든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우리 좀 더 오래오래 깊게 사귀어 보자는 까닭.

정부도 그걸 모르지 않는지,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인 인권운동가 박래군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이번이 네 번째 구속인 박래군의 부탁도 역시 “4.16연대를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화두 둘, 구체적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그동안, 이런 저런 기회를 통해 단원고 희생자의 부모님들을 만나거나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작년 ‘마산시민행동’ 송년회 때도 그랬고, <금요일엔 돌아오렴> 창원 북콘서트 때도 그랬다. 얼마 전 천도교 수운회관 중앙대교당에서 열린 ‘4.16 인권선언 추진단 전체회의’에서는 원탁 테이블에 부모님 세 분과 둘러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누구는 한 번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도 잘 기억해서 ‘OO이 어머님’ ‘OO이 아버님’이라고 부르는데, 나에게는 그냥 ‘세월호 유가족’으로 남아있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단 하나의 이름을 가진, 표정을 가진, 웃음을 가진 그 아이들이 나에게는 ‘세월호 희생자’로 존재한다. ‘미수습자’로 불리는,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9명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세월호 참사’라는 단어 자체가 2014년 4월 16일부터 일어난 일들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하다.

결국 ‘구체성’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아직까지 나에게 세월호 참사는 충분한 구체성을 갖지 못한 채 ‘세월호 유가족’, ‘세월호 희생자’, ‘세월호 참사’라는 단어가 표현할 수 있는 만큼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박재동 화백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그린 <잊지 않겠습니다>(한겨레출판), 그리고 150일 동안의 세월호 참사 1심 형사재판을 치밀하게 모니터링한 <세월호를 기록하다>(오준호 지음, 미지북스) 같은 책을 사 둔 것도 ‘구체성’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물론 세월호 참사의 과정과 내용을 하나하나 알거나 단원고 학생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아야 더 오래 잊지 않거나 더 잘 추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나에게는 ‘구체성’이 힘이 될 것 같다. 추상적인 단어 몇 개만 가지고는 십 년, 이십 년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가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의 얼굴들이, 그들이 꾸었던 꿈들이,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가족들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다가올 때 ‘세월과 나’의 관계를 오래오래 이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급할 건 없으니까, 천천히 조금씩 보다 구체적인 관계를 맺어가려고 한다.

아 참. 그리고 난 아직 팽목항엘 다녀오지 못했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팽목항에 꼭 한 번 다녀와야겠다. 팽목항에서, 바닷바람에 나부끼며 바래가는 노란 리본 옆에서, 아무 죄도 없는 푸른 바다를 오래 바라보다 와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