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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시리자의 대결의 용기(!) 대 타협의 용기(?)

최형록 (경남노동자민중행동 필진)

 

출처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059509

출처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059509

구제금융안 반대를 선택한 그리스 민중

정치적 가뭄 속 정치적 ‘단비’가 내렸다. 무려 인구의 10%인 110만 명이나 빈곤선 이하에 있도록 만든 흡혈귀 유럽 금융자본과 대결하고 있는 시리자(Syriza)를 그리스 민중이 국민투표를 통해서 지지한 희소식.

‘1등 휴지’ <조선일보>는 톱뉴스로 “희랍의 착각”이라고 평가한다. “흡혈귀들의 착각”이 정확하다. 이것만 보아도 무자비한 자본 세력은 한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원수다. 시리자의 승리는 ‘정치적 기우제’, ‘자본 세력에 대한 타협의 용기’를 발휘한 성과일까?
 
자살, 노숙자들, 난방비가 없어서 가로수를 베는 사람들, 인구의 1/3이 의료 접근권이 없는 암담한 현실, 10개 이상의 대학교가(희랍의 대학교와 기술 대학교의 수는 22개) 예산부족으로 학업에 지장을 받고 있는 미래가 암담한 현실.

이런 무자비하게 파괴당하는 삶의 조건에 희랍 민중은 수 년 간 시위와 공장점거를 감행해왔다. 몇몇 기업에서는 노동자 통제를 감행하기도 했는데, 어떤 공장은 2013년 이래 사장 없이도 노동자들이 기업을 꾸려오고 있다고 한다.

* 다큐멘터리 <Greece on the Brink> 보기 : http://greeceonthebrink.com

이런 생존권 투쟁에 시리자 이전 정권은 ‘군사독재’를 연상시키는 대응을 해왔다. 세계경제공황 이후 2009년 선거에서 집권한 Pasok(범 희랍 사회주의 운동)은 자신의 기반인 민중을 ‘배신’하는 긴축정책을 추진했다. 반면 소수 세력(5% 득표)인 시리자는 민중의 삶을 짐승 보다 못한 비참함으로 몰아넣는 정책에 반대하는 노선을 견지해왔다. 그러했기에 ‘타협의 용기’, ‘굴복하는 승리’라는 궤변이 결코 아닌 ‘대결하는 용기’의 대장정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임을 직시해야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시리자의 성장에 젊은이들이 적극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출처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698451.html

출처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698451.html

금융자본만 배 불리는 구제금융

2010년 3월부터 2013년 6월 기간 희랍에 대한 ‘구제금융’은 과연 희랍민중을 얼마나 구제했던 것일까? ‘구제금융’의 총액 가운데 은행자본에 약 69조 6천억원(1유로=1200원으로 계산)이 지원되었으며(구제금융의 28.13%) 군비에 1조 2천억원이 지원되었다. 요컨대 희랍의 비참함의 원흉인 금융부문에 총액의 94.16%가 지원되었다는 것이다!

즉 ‘구제금융’의 부스러기 5.84%만이 희랍 민중의 교육과 보건의료를 비롯한 국민예산으로 지출된 것이다. 이런 압도적 다수 민중의 삶을 ‘배신’하는 ‘배제금융’ 탓에 국내 생산은 오히려 하락했다는 사실에 어떻게 눈 감을 수 있겠는가!

전망하건대 시리자의 ‘대결하는 용기’는 중기적으로 유럽에서 ‘깃발만 나부끼’지 않는 반자본주의 사회운동으로 확산될 것이다.

타협의 용기(?)를 말하는 정치적 연금술사들

지난 <한겨레> 토요판(6월 27일자)에는 조만간 있을 정의당 대표선거 후보로 나선 조승주의 대담기사가 2면에 걸쳐 실렸다. 그는 “타협적 용기를 발휘해서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만용을 부리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관점이 아닌가?

1997년 이른바 ‘IMF 신탁통치’에 이은 노동법 개악 저지운동의 실패로부터 이런 류의 ‘실용적 타협’노선을 걸어왔기에 ‘마르크스적 민주주의자들’(스탈린주의적으로 왜곡된 그런 만큼 어리석은 마르크스주의와 준별해야한다)이 전망한 바와 대체로 일치하는 참담한 상황에 이른 것이 아닌가?

김진숙 동지가 이창근과 김정우 동지 등등이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고공농성’을 해도 눈 하나 깜빡 하지 않는 자본가 놈들, ‘파괴 컨설팅’(인간의 탈만 쓴 놈들은 창조 컨설팅이라고 한다)을 통해서 불법을 자행하고도 계속 ‘영업의 자유’를 누리는 놈들, 유승민 대표라는 ‘배신자 원수’를 개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져 밀어내려는 ‘헌 세계당’의  자중‘지랄’이라는 미로 속에서 침몰당하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 정국, 만약 사법시험이라면 백번 불합격했을 엉터리 판결문을 써서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는 사법 현실, “한국전쟁 때보다 더 기가 차다”는 할머니의 절규에 아랑곳하지 않고 폭력으로 그리고 돈으로 민중의 정당한 ‘저항권’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야만성, 일본 제국주의의 야수적인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4(死&詐)대강 사업’, 국고지원을 받고 부동산으로 부를 늘리면서도 등록금을 올리는 사(私=邪)립 대학교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부정부패와 불의가 횡횡하는 이런 현실에서 전혀 대화하려 하지 않는 싸이코패스적 원수들과 ‘타협’하는 것을 ‘용기’로 변모시키는 ‘정치적 연금술’을 충분히 보아온 것이 아닌가?

이런 ‘정치적 연금술사들’이 각광 받는 이유들은 무엇일까?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당시처럼 ‘마르크스적 민주주의자들’ 내 사상적 준별을 해야 할 상황이 전혀 아님에도 “사소한 차이에 매달리면서 크나큰 동질성을 도외시하는 소인배 근성”이 분명히 결코 작지 않은 한 가지 이유가 아닐까?

 

시리자의 ‘대결하는 용기’는 유럽에서 반자본주의 사회운동으로 확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