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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내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내사를 받게 된 까닭은

 

 

 

이김춘택 (금속노조 경남지부)

작년 12월 17일, 서울에 있는 경찰청 보안3과에서 우편물을 하나 받았다. “송․수신이 완료된 전기통신에 대한 압수수색검증 집행 사실 통지”라는 긴 제목의 2장짜리 통지문이었다.

내용을 보니, 국가보안법 혐의 입증을 위해 2013년 4월 3일부터 2014년 9월 15일까지 무려 1년 5개월 넘게 내 이메일 계정에 대한 압수수색검증을 집행했다는 사실 통지였다. 압수수색 대상으로 통신가입사항, 주소록, 가입카페, 메일헤더, 클럽, 블로그 게시 문건 등 해당 아이디를 가지고 한 모든 인터넷 활동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장에는 "귀하께서 위법사실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귀하가 사용하는 전자우편 계정에 대하여 법원으로 부터 압수수색검증영장을 발부받아 확인한 사실이 있었으나 혐의사실을 발견하지 못하여 내사종결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라고 그 결과가 친철하게 안내되어 있었다.

하마터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어마무시한 죄명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이외로 덤덤했다. 1년 5개월 동안 내 사생활을 누군가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었구나 생각해도 기분이 약간 더러울 뿐이었다. (그만큼 개인정보 유출과 정보통신에 대한 감시(가능성)에 익숙해져 있다는 얘기다). 개인 사생활을 훔쳐 본 사실을 뒤늦게라도 친절히 고지해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물론 “혐의사실을 발견하지 못하여 내사종결하였”으니 가능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궁금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경찰의 내사를 받게 된 것일까. 서울 경찰청 보안3과는 나에 대한 어떤 첩보를 입수했던 것일까. 남에게 차마 말하지 못할 부끄러운 짓을 한 경우는 있어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니…… 어떻게 하면 그 까닭을 알 수 있을지 변호사와 상담을 했다. 정보공개청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마도 경찰청에서 내사 이유는 공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었다. 한 가지 변호사로부터 알게 된 사실은, 보통은 압수수색영장을 3개월 단위로 청구하는데 1년 5개월 동안 내사를 했으니 무려 다섯 번이나 압수수색검증영장을 갱신 청구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편물을 가방에 넣고 다니기는 했지만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시간 내서 정보공개청구를 하게 되지 않았다. 그냥 가끔 생각날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더 늦었다가는 알아 볼 기회마저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 싶어 우편물을 다시 꺼내봤다. 그리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기타 문의사항은 02-31OO-OOOO(경찰청 보안3과 경위 OOO)번으로 문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인 안내에 따라 전화를 걸어봤다.

우편물에 안내된 담당자는 그 동안 부서를 옮겼지만 어렵지 않게 통화 할 수 있었다. 내가 전화를 건 용건을 말하자 이름을 물어보더니 서류를 찾거나 컴퓨터 검색을 하지 않고도 금세 기억을 해냈다. 그리고는 뭐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친절히 까닭을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정보공개청구를 할 필요도 없이 전화 한 통화로 궁금증은 쉽게 풀렸다. 내가 왜 1년 5개월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감시를 받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실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기는 했다. 단서는 압수수색 시작 날짜였다. 압수수색을 왜 하필 2013년 4월 3일부터 했는지 궁금해 해당 아이디로 이메일을 주고받은 과거 내역을 찾아보니 2013년 4월 3일 날짜에 보낸 이메일이 하나 있었다. 그래도 “설마 이것 때문에?” 했는데…… 그 설마가 맞았다.

<지도자군상>이라는 책이 있다. 1946년 대성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인데,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에서 문학평론가 및 좌파언론인으로 활동했던 김오성이 해방공간의 좌파정치인 18명에 대한 인물평을 쓴 책이다. 18명의 인물에는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두봉, 김원봉, 무정, 이주하, 이강국, 이관술, 최용달 등 익히 이름을 알고 있던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과 함께 장건상, 성주식, 김성숙, 홍남표, 유영준, 이여성, 김세용 등 잘 알지 못했던 인물들도 있다.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의 사회주의 운동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위 인물들과 관련해서 <지도자군상>의 내용이 자주 인용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지도자군상>을 한 번 직접 찾아서 읽어보고 싶었다. 언젠가 국회도서관에 갈 일이 있었는데, 찾아보니 <지도자군상>보다 조금 먼저 출간된 같은 저자의 <지도자론>은 있었지만 <지도자군상>은 아쉽게도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경상대학교 도서관에서 <지도자군상>을 찾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궁금해 하던 책을 찾아낸 기쁨이란! 냉큼 복사해서 제본을 해 두었다.

그런데 혼자 읽기는 좀 아까웠다. 누군가 나처럼 쓸 데 없는(?)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복사한 것을 PDF로 스캔해 놓았다. 그리고는 사회과학책을 디지터털화 해서 다운로드를 제공하는 일종의 디지털도서관인 ‘노동자의 책’(http://www.laborsbook.org)에 <지도자론>과 <지도자군상>을 이메일로 보냈다. <지도자군상>을 소개한 페이스북 글에 댓글을 단 지인 몇 명에게도 이메일로 보냈다.

이렇게 1946년에 발행된 책 두 권, 해방공간의 사회주의 운동의 대표적 인물들을 다룬 책을 이메일로 보낸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5개월 동안 내사를 받은 이유였다. 경찰청 담당자는 ‘노동자의 책’과 관련된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첩보(?)를 입수해 나에 대한 내사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지도자론>과 <지도자군상>을 이메일로 보낸 지인들은? 그들에게서 별다른 이야기가 없는 걸 보면 다행히 그들까지 내사 대상이 된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내사를 받았는지 그 궁금증은 풀렸다. 그런데 조금 망설여진다. 일제시대-해방공간의 대해 관심이 있고, 당시에 발간된 관련 책을 보면 혹하고, 그 중 흥미를 끄는 책은 복사해서 제본해 놓고 혼자 뿌듯해 하는 나의 취미생활(?)은 계속될 수 있을까, 아니면 중단해야 할까. 사실, 내사의 이유를 알고 나서도 ‘안해’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 같은 나의 관심을 ‘사회주의운동사 덕후’라고 남에게 놀리듯 얘기하는 안해에게 사실을 알려줘봤자 ‘것 봐라’ 하는 잔소리 밖에 더 듣겠는가.

비록 해프닝 같이 끝났지만, 무심코 보낸 이메일 하나 때문에 1년 5개월 동안 이메일을 비롯한 모든 인터넷 활동을 감시당해야 했던 황당한 일은 결국 국가보안법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국가보안법은 나의 삶 가까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앞으로도 맘 편히 ‘덕후’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도, 국가보안법은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