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학습효과
김병훈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1. DAN 1%의 차이.
침팬지와 인간의 아이에게 두 가지의 동일한 실험을 진행했다. 첫 번째 실험은 속이 보이지 않는 상자에 사탕을 넣어 놓는다. 그리고 나서 실험을 진행하는 사람은 두 집단 앞에서 사탕을 꺼내는 방법에 대해 시범을 보여준다. 즉, 나무를 이용해서 상자를 열기 위한 여러 가지 행동을 취한 후에 비로소 사탕을 꺼내는 것이다. 침팬지와 인간의 아이 모두 똑같이 진행자를 따라 했으며 사탕을 꺼내 먹었다.
그리고 두 번째 실험은 앞의 실험과 동일하지만 속이 훤히 보이는 상자에 사탕을 넣어 놓았다. 속이 훤히 보이니 사탕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고 굳이 진행자를 따라 하지 않아도 바로 사탕을 꺼낼 수 있었다. 진행자는 이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여러 가지 행동을 취한 후 사탕을 꺼냈다.
두 집단은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 먼저 침팬지는 진행자를 따라 하지 않았다. 즉, 침팬지는 상자 문을 열고 사탕을 바로 꺼냈다. 사실 사탕을 꺼내는 데는 진행자의 동작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따라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아이는 진행자를 따라하면서 사탕을 꺼냈다.
인간과 침팬지 특히 보노보는 인간의 DNA와 1%의 밖에 치아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1% 차이가 지금 글을 쓰고 글을 읽고 생각을 하게 만든다. 또한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을 하게 할 수 있게 한다. 왜 이런 차이를 보일까?
2. 따라하면서 배우며 성장하는 인간
상식적으로 위의 실험에서 당연히 인간이 속이 훤히 비치는 상황에서는 굳이 진행자를 따라 하지 않아도 사탕을 꺼내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러지 않았고 사탕을 꺼내는데 전혀 필요 없는 동작을 한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서 인간은 어릴 때 따라하는 과정을 통해 학습 하는 능력을 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성장 과정 자체가 단순히 결과를 얻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통해서 결과를 얻는 방법으로 진화 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인류가 문명을 만들고, 문명을 발전 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앞 세대의 단순히 결과물만을 전달 받아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문명의 결과만을 받아 들였다면 인간은 이 정도의 문명을 창조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즉,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나 사회로부터 문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하나하나 배움으로써 문명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간다. 그래서 인간은 배우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배움의 과정은 가정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치관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현재 지점에서 과거를 배우면서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존재다.
3. 차별을 배울 것을 강요하는 경상남도
그런데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에서 만약 불평등을 가르친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게 될까? 당연히 아이들은 불평등의 가치관을 학습하게 될 것이다.
최근 경남도에서 시작한 무상급식 중단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경남도의 무상급식 포기는 그 대상이 한참 배우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있다는데 있어서 철저히 정치적이고 계산된 것이다. 단순히 현세대가 아닌 미래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가난한 자는 눈치를 보면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산 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민주와 평등의 가치를 가르치기 전에 불평등의 가치를 먼저 가르치려고 하는, 임기 4년의 경남도 수장의 철학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우리는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한다.
그 이유는 단순히 밥을 주고 안 주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이 이렇게 학습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했을 때 이는 가치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학교에서 아이들은 단순히 공부만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을 목적으로 설립되지는 않는다. 그곳에서 인간으로서 성장하기 위해 타 종에 비해서 인간만이 갖는 사회적 관계를 맺고 구성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밥은 단순히 밥이 아닌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된 이들의 경험을 재구성해 보자. 도시락을 싸올 때 아이들의 반찬을 통해서 가난과 부잣집 아이를 구분했다. 급식이 도입되면서는 돈을 내고 먹는 아이와 그렇지 않는 아이로 구분이 되었다. 그때 우리는 밥의 내용이 나의 처지를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밥을 아예 가져 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상급식의 시행은 밥으로서는 더는 부잣집 아이나 그렇지 않는 아이들을 구분하지 않게 된 것이다. 즉, 학교에서 배식하는 과정에서는 밥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이들은 이 과정에서 누구나 밥을 먹기 위해서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과 함께 밥을 먹는 친구와 밥 먹는 속도를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운다.
그런데 선별 급식은 다시 돈을 내고 먹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로 나누어지며, 돈을 내지 못하는 아이는 배식 때마다 자신의 처지를 일깨운다. ‘나는 가난한 집 아이다. 나의 부모는 가난하다.’라는 사실을 철처하게 마주하게 된다. 이제 밥은 더 이상 밥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를 자각케 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밥은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는 의료, 생활, 교육 등등 사회 전반의 복지 문제는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아이들이 인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습으로 인해 아이는 스스로 가난한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더 치열하게 친구와 경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사라지고 노동에 종속된 채 사회적 불평등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과 여유조차 없이 자신의 아이가 돈을 내고 급식을 먹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악순환이 되어서 다시 자신의 아이에게 돌아온다.
이는 인간은 신분과 재산 상태에 따라서 차별 받지 아니하고 누구나 평등해야 하며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 사상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학습 능력은 굉장히 뛰어 나다. 아이들은 이러한 것을 따라하게 되고 배우게 됨으로써 또래의 아이들에게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가난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을 학습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특히 가난이 되물림 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경남도의 생각이 정치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운영 원리에 사실상 부합한다. 즉, ‘지나친 급여는 근로의욕을 떨어뜨린다.‘는 원칙아래 복지에 대한 국가의 최소 개입이 바로 그것이다. 경남도는 아이들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선별 급식만큼 확실한 학습 효과가 없다고 보고 이를 지속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우리의 저항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번 무상급식 논쟁이 단순히 아이들의 밥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로 마무리 되지 않기를 바란다. 즉, 아이들 밥그릇 뺏는 짓이라는 단순히 감성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철학의 문제다. 특히 아이들이 이번 논쟁을 통해 그리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이 논쟁에 당사자로서 참여함으로써 국가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번에 확실히 보편적 복지(국가의 의무복지)문제로 쟁점을 확대 시켰으면 한다. 이를 통해 현행 헌법상 사회복지를 ‘국가의 노력 의무’로 규정되어 있는 것을, 헌법 개정 시 ‘국가 의무’로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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