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경남 민중행동 필통 필진)
1. “한강의 기적(奇跡)”인가 “한강(恨江)의 기적(欺積)”인가?
“민족 대 이동”. 이런 군중의 설레는 귀향을 바라보는 굴뚝 위 이창근과 김정우 두 노동자의 심정은 어떨까? 그 차디 찬 아스팔트 길 위에서 오체투지 하는 노동자들의 온 몸과 온 정신의 절규가 울려야할 수신자들의 “이간의 고막”을 심장이 쾅쾅 뛰듯이 울릴까? 그 수신자들은 “맹자의 4단(端)이라는 자명고(自鳴鼓)”를 이미 찢은 지 오래가 아닌가? 자본의 야수적 탐욕과 “자유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파쇼의 증오심 그리고 “이 세상에는 자본주의 외에는 어떤 다른 대안도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자기 기만적 무지 앞에서! 팽목항의 그 장마 같은 눈물들 눈물들은?
2015-02-17일자 <한겨레 신문>의 기자들이 밝힌 강도 귀족(Robber Baron)의 자손들 이재용, 정의선 등등의 엄청난 살맛-殺맛 나는 부의 팽창, 곡학아세 하지 않는 환경학자들과 환경단체 활동가들 그리고 <경향신문>과 <한겨레 신문> 기자들 등이 우려한 자연이 주는 인과응보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사대강 사업(死大江 邪業) 과정의 거짓말과 은폐-조작 그리고 건설업자 놈들의 담합과 부정부패, 하나씩 그 추악한 과정이 드러나고 있는 청화대(請禍隊)의 전 세입자 놈 패거리들의 “자원 외교”, 후쿠시마의 원전 재앙을 목격하고서도 원전부품을 불량품으로 교체하는 놈들의 부정부패, 한국인의 자율신경을 지배하고 이성적 사고행위를 완전 정지시키는 “국가안보”에 직결되는 군 장비의 납품 비리와 미국의 “죽음의 상인들”의 한 탕에 빌붙어서 일어나는 무기수입 과정에서 시시때때로 드러나는 “율곡비리들”, 헌정 파괴적인 선거부정을 자행하는 국정원 그리고 광주 민중항쟁을 폄하하고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을 비하하는 부장판사라는 개-돼지만도 못한 놈의 광란과 절도하는 판사 놈, 제자를 성추행하는 대학교수들 이 대열에 은밀히 아니 공공연히 끼어 든 전 국회의장 박희태와 검사 등등.
<한겨레 신문>과 <경향신문>을 매일 아침 펼치면 이런 종류의 비참함 그리고 범죄적인 사건들이 “나무를 저민 공간”을 거의 점거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운명이 결코 아닌 “인위적인 재앙” 그리고 거짓과 은폐-날조가 “일상적 정상”인 삶의 조건 속에서 “별 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2. 자유의 파괴분자들의 전쟁에 대한 “존엄한 분노”를!
미국의 상업문화를 한국의 탐욕스런 문화자본이 가공 조립한, 비틀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K-Pop이나 스포츠 상업주의가 역사적 “민족주의”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에서 파쇼 놈들의 기만적인 “탈”로 전락한, “자유 민주주의”의 사상가이자 노동자들의 지지 덕에 영국 국회의원까지 경험한 John Stuart Mill은 “생각들”이라는 글 중 “어떤 조건들 아래에서 대의 정부를 적용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부분에서 ‘대의제도는 항구적으로 그 제도들이 위험에 처할 경우 사람들이 싸울 준비태세에 의존한다’고 말하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그리고 기타 논문들>>, Oxford World's Classics, 1998, 257~259). 조-중-동 같은 파쇼 신문들이 부활시키려는 독립운동의 파괴자 이승만의 야만적 독재를 무너뜨린 “4-19 미완의 혁명”이 바로 이런 민중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결사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미완의 “혁명”을 계승-확대시키려 민중은 얼마나 “결사적”인가? 이 지적에 앞서 밀은 대의정부가 항상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경우 세 가지 거론하고 있다. 첫째, 민중(People)이 그 제도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경우 . 둘째, 그것의 유지-보존에 필요한 것을 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경우. 셋째, 그 제도가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의무를 이행하고 기능을 수행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경우. 첫째와 관련해서 대한민국은 엄연히 “분열”되어 있다. 조-중-동 같은 곡필아세를 넘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인간 본연의 성품으로 단정하고 그런 세계관-가치관을 선전 선동하는 신문 그리고 tv 조선을 비롯한 종편만 읽고 시청하는 자들 그리고 <한겨레 신문>과 <경향신문>과 <참세상> 같은 인터넷 대안 매체를 읽고 시청하는 사람들 사이의 심연, 대승적으로 원융회통(圓融會通)할 수 없는 심연! 셋째와 관련해서 생각해보아야할 점들 중 한 가지인 공정한 조세제도 즉 직접세의 비중 높이기와 간접세 비중의 감량, 소득 구간을 세분화하여 철저히 누진 세제를 시행하는 것, 종합 부동산 세제를 실질화하고 증여세를 중과하며 법인세를 늘리는 것 등에 반대하는 놈들이 누구인가? 세계 최장시간 노동과 빈번한 산업재해룰 은폐하고 노동자들을 골병들게 하고 청춘을 죽음으로 몰아내고 해고 노동자들을 양산하여 가정을 파괴하고 자살에 이르게 하고도 눈 하나 깜빡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고객의 정보를 팔아 부수입을 올리는 재벌 기업들, 국토의 무려 75%가 산지인 나라에서 부동산 투기를 경기 부양책이랍시고 내놓는 백치 놈 아니 기만적 싸이코패스적 정책을 내 놓는 정권, 스포츠 산업의 총사령부들 중 하나인 동계 올림픽 위원회에서조차 평창의 경기장 분산개최를 촉구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백 년이 넘은 장수목(長樹木)들을 참수하는 무자비한 건설 자본이라는 파괴분자 놈들, 그런 놈들 편에 선 전 언론인 최문순 부류의 “인간들”이 바로 그런 놈들이 아닌가?
문제는 두 번째 경우다. 한국에서 “자유”란 노동자를 비롯한 대중이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 “계약”을 해야만 우선 생존할 수 있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 수 있으며 자손을 볼 수 있는 압도적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주고 빼앗을 수 있는”(生死與奪) 권력을 가진 자들(계급)의 “영업의 자유”로 축소지향하고 있으며 바로 그런 삶의 현실,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착취-지배 계급의 독재체제가 민주주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 내가 살고 있는 창원에서 하마터면 대형 버스사고로 될 뻔 한 사고가 발생했다. 버스 기사가 혈당량이 갑자기 떨어져서 졸도해 급기야 사고를 낸 경우였다. 그런데 그 사고가 대형으로 발전하지 않은 것은 승객들이 기사의 운전방식이 이상하고 불안해서 모두 하차한 덕이었다. 왜 승객들은 사고의 예감에 피신해야겠다고 판단하면서 그 기사에게도 말해서 함께 내리지 않았을까? 배가 아니고 피해자가 죽지 않고 1 명에 그쳤을 뿐이지만 그 사고는 바로 “2014-04-16 세월호 비극의 축소판” 그 자체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일상이자 정상인 소외적 삶-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의 삶”, 생존과 자손번식에만 사로잡힌 무한경쟁과 상호 무관심한 삶이 오염된 대기처럼 익숙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삶의 조건의 연원 그리고 그 성격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파악하여 “가난은 나라님도 구하지 못한다”는 봉건적 운명론이라는 거짓을 넘어 “자본주의는 인간 역사의 산물이기에 다른 변경 가능한 삶”을 형성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왜 발휘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 중대한 이유들 중 현재 절박한 것이 학습을 통한 비판적 사고력을 개발하여 삶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동시에 겉만 인간이 아니라 그 정신과 영혼에 있어서 “인간다움을 형성해 나가는 순간순간 인간으로서 거듭 쇄신한다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창조하려는 용기 있는 삶의 길”을 선택하는 과제의 실천이다.
이런 학습은 한국인들의 왜곡된 생존욕으로서의 “교육열”을 미친 것으로 단정하고 그 “열”(劣)을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이타적인 “열”(熱)로 바꿀 수 있는 “부단한 성찰 능력”을 정수로 삼는 것이다.(진보넷 속보란 “왜 부단한 학습을 해야 하는가?” 2013-02-16일자 참고).
이런 관점의 학습에 필수적인 것이 마르크스의 사상과 그의 변증법적 사유방식이다.
2005년 영국 국영방송BBC의 Radio 4는 (명색만 공익을 지향하는 KBS와는 품격이 전혀 다르다. 일제 부역자의 여식이 신임 사장에 임명한 <<러시아 지성사>>의 저자 이인호는 레이건 정권 하에서 하버드대 러시아사 교수인 Richard Pipes의 지도를 밟았는데 그는 러시아 혁명을 권력에 굶주린 볼셰비키의 쿠데타라고 지적 사기를 치고 있다. David North의 <<The Russian Revolution and the Unfinished Century>>, 2014, 1~14면) 34000 명을 대상으로 인간 역사를 통털어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응답자의 27.93%가 칼 마르크스라는 것이었다! 2위인 데이빗 흄은 12.67%였으며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의 스승인 칼 포퍼는 겨우 4.20%에 그쳤다.(www.google.com에서 Marx on BBC Radio 4를 검색하시오). 용수, 왕양명, 다산, 최한기, 최제우, 바수반두, 도겐 같은 동양의 철학자들이 배제된 방식이 심히 유감스러우나 주목할 만한 세계관-가치관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들은 무자비한 야수적인 반공-냉전논리에 빠져 마르크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5.65%를 획득한 플라톤 사상에 반 여성 해방 운동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양 철학사를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플라톤 사상에 대한 주석의 역사라는 정도로 중시되고 있지 않은가? 순복음 교회의 “믿셤니까? 목사”가 교회 재산을 횡령한 범법자라고 해서 <<구약>>과 <<신약>>에 기초한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을 폐기할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스탈린주의적 소련이 붕괴하고 쿠바가 미국과 국교 정상화 단계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런 인간의 해방을 향한 이성적이며 불굴의 용기를 발휘할 수 있도록 가르친 사상, 마르크스의 사상을 도외시하거나 중상-왜곡하는 일이 과연 이성적(Reasonable)인 자세인가?
유머가 풍부하며 명쾌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문예 비평가 Terry Eagleton은 ‘방화범들이 갈수록 더 기술적으로 교묘해지고 영리해진다고 해서 소방(消防)이 이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우스운 것과 같은 일이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비판하고 있다.(그의 <<Why Marx Was Right?>>, Yale대 출판부, 7~8면).오늘날 영국의 아동 1/3이 최저 생계비 이하 수준에 살고 있는 비참함은 무엇으로부터 연유한 것인가? 기회가 되는대로 소련의 인간적 성취에 대해서 논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이글턴이 사회주의 체제의 성과들 중 한 가지로 예를 들고 있는 사실, 구동독은 세계적으로 가장 세련된 아동 돌봄 체제를 갗추고 있었음을 지적한 것에 그치고자 한다.(앞의 책, 14면)
3. 사회-역사적 “정당한 복수”는 우리의 것!
왜 한국사회가 노인 자살률이 OECD 국가들 중 악명 높은 1위이며 청소년 자살률 역시 그런 악명을 호출 당하고 있을까? 그 중대한 이유는 무지에 따른 불안감 그리고 일상적인 몰상식한 삶의 조건과 삶의 의미상실에 대한 “존엄한 분노”를(진보넷의 속보란에서 나의 2014.04.01일자 글, “<<내 안의 보루>>: 노동운동의 윤리도덕성과 존엄한 분노” 참고) “인간답게 해소”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글에서는 우선 간략하게 그 “존엄한 분노”의 열매로서 “복수는 우리의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땅콩회향”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조현아의 여동생은 “반드시 복수해줄께”라고 제 언니와 문자를 주고 받았단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라는 덕은 인류가 지향할 바이다. 그런 한편 인간의 지적 능력(IQ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온전히 측정할 수 없음에 유의해야한다. 진보넷 속보란 “왜 지능인가(1)”, 2013-04-27일자 참고) 그리고 기질과 성격이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명백한 사실을 “존엄한 복수”와 관련해서 감안해야한다.
Michael E. McCullough는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성의 내재적 특징인 한편 복수의 욕망 역시 인간성의 내재적 특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그의 <<Beyond Revenge: The Evolution of the Forgiveness Instinct>>, 2008, 서론, xvii~xviii면). 본능이라고 해서 그것이 항상 선(善)이라고 용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욕이 자연스런 본능이라고 해서 강간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은 한 가지 예다. 그런 한편 “인간다움의 형성과정”에서 그 본능을 평가하고 이성적으로 조절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진화론적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은 어떤 인간적 특징이 “생존하고 자손을 번식하기 위해서 환경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었느냐 여부를 따지는 적응성(Adaptiveness) 이다. 그런 한편 이 “적응”을 진화의 만능열쇠로 보는 관점은 문제가 있다.(이 점과 관련해서는 역시 진보넷 속보란의 글, 2014.04.13 “봄바다가 깊다기로 恨 바다만 못 하리라-자연&사회&인간의 변증법 참고).
맥컬러프는 복수가 적응과 관련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는 기능으로서 세 가지를 거론하고 있다. 첫째 복수는 공격자들이 다시 공격하는 것의 억지력으로 기능한다. 뒤집어 말하면 공격자들에게 반격하지 않으면 그들은 공격 받은 자들을 다시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복수의 긍정적 기능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이 글에서 논하는 “집단적인 정치적 문화적 복수” 차원에서 명명백백하다. 둘째 복수는 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경고효과를 초래해서 그런 잠재적 공격자들을 물러서도록 만든다. 셋째 복수는 무임 승차자들(Free-riders)로 하여금 협력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력을 행사한다. (앞의 책 , 48~61). 맥컬러프가 문화 간 비교를 한 결과 모든 문화에서 지나치게 탐욕스런 자들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면 기꺼이 개인적 희생을 무릅쓰겠다는 것이 100% 였다(앞의 책, 78 면)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병리적 현실, 경악스런 노예근성과 비열함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일상적인 ”을에 대한 횡포“가 그런 사회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대중매체가 유통시킨 ”갑-을 관계“라는 대중적 공분을 즉각 불러일으키는 시대 분위기 규정은 마르크스적 관점에서는 비과학적인 것이다. 그런 표현은 앞서 지적한 모든 문제들-모순들의 원천인 ”노vs자 간 자본주의적 착취와 지배의 관계“를 회피-은폐하는 바람직 하지 못한 용어다.
여하튼 신흥 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에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을 다 바치고 일제에 고문사 당한 이회영 선생, 정치-경제-문화적인 범죄자들 놈들까지 인용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실천하다 일제의 “생체실험”으로 옥사했다는 설이 있는 시인 윤동주, 그리고 “이익을 보면 의(義)를 생각하는” 삶을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으로 마무리 한 안중근 의사(義士)를 살해한, 일제에 붙어서 독립 운동가들을 토벌한 역도 놈이 “민족중흥” 운운하고 그 여식이 삶의 비참함을 더욱 심화시키는 정책들을 “창조”하는 나라의 국민은 이런 인간성에 고유한 “존엄한 복수”심을 누구에게 팔아먹은 것인가? 이런 쓸개 빠진 놈들의 사회이기에 차기 대권을 꿈꾸고 있는 문재인이 박정희를 참배하고 이완구가 “광주의 살인마”로서 제한적이지만 엄연히 형법 상 범법자였던 전두환을 인사 차 방문하고 “별 일” 없이 대중매체에 방영되고 있지 않은가?
“임신부의 배를 갈라 내장이 쏟아지고 어린 아이들을 총검으로 찌르며 민가를 불사르고 적들의 두개골을 박살내는 공산주의자들”이 서북 청년단의 잡지 표지의 만화로 그려져 있다.(Bruce Cumings, The Korean War: A History), 124 면). 커밍스는 이 자료를 미국의 유명한 후버 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했는데 사실 이런 야만행위를 범한 개-돼지만도 못한 놈들은 바로 그 자신들 서북 청년단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 살인자 떼"인 단체를 복원하겠다는 놈들까지 나타나고 있는 분노스런 상황!
용서와 자비의 덕성은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 한편 석가모니 부처께서 자비를 설파했음에도 2500 년이 지나도록 “불국토”는 멀기만 하고 그 당시에는 상상조차하지 못한 온갖 종류의 전쟁과 범죄행위들이 불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자행되는 세계. 이런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인간다움의 덕성“이라는 점에서 결코 그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인 교육과 자기수양의 소산으로서 성격 수준에서 평등하지 않으며 ”불균등“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모순으로 가득 한 현실 상황에서는 용서와 자비에 ”감정이입과 공감을 고려하는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단호한 제한“이 필요하다. 그러한 ”단호하며 대담한 이성“이 가장 ”인간적 효율성“을 가지고 발휘되는 집단적 행동이 바로 ”혁명“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중은 그럴 의지와 능력이 결코 충분하지 못하다. ”혁명적 전망“을 지니고 개혁의 과정을 통해서 ”존엄한 분노에 입각한 존엄한 복수“를 단행해 나가는 행동과 학습의 체험들을 다시금 축적해 나가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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