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규 (노동당 경남도당 정책위원장)
정책을 나름 다루어온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흔히 진보정당의 정책 생산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은 정책을 어떤 대단히 뛰어난 정책 활동가의 머리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개개인의 능력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더 더욱 그렇다. 마치 노벨상이 무슨 대단한 천재 한 명의 업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과학사에서 천재는 생각보다 많지 않고 기껏해야 백 년에 한두 명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과학적 업적들은 한두 명의 천재의 작품이 아니라 기초과학 인프라와 집단적 노력의 산물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천재의 출현을 기대한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정책은 한두 명의 뛰어난 정책 활동가의 생산물이 아니다. 좋은 정책 활동가는 뛰어난 머리나 온갖 정책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확고한 철학과 방향성에 기반하여 정책에 대한 네트워킹을 잘 하는 사람이다. 정책 활동가는 연구자나 이론가라기보다 네트워크 조직가이다. 가령 진보정당 사상 가장 뛰어난 정책 활동가라고 할 수 있는 이재영은 그 자신이 정책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그 정책을 누구에게 이야기하면 좋은 조언을 들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재정도 사람도 충분하지 않은 진보정당에서 모든 정책을 다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어차피 디테일로 들어가면 막대한 재정과 방대한 상시인력을 가지고 있는 관료나 보수적 전문가들을 몇몇 정책 활동가만으로 상대할 수 없다. 디테일은 해당 분야를 잘 알고 있으면서 문제의식을 느끼는 해당 분야 종사자나 활동가에게 맡기고, 정책 활동가는 이런 디테일들을 올바른 방향성 하에서 네트워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진보정당의 정책 역량이 많이 줄어든 지금은 이런 관점이 더 절실하다. 진보정당의 지방의원들이 가장 아쉽게 느끼는 것은 제대로 된 의정지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상근하는 의정지원 인력을 통해 해소하기는 쉽지 않다. 재정이나 인력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과는 달리 지방의원들이 이를 꼭 원하는 것 같지도 않다. 상근 의정지원 인력을 쓰려면 그 인건비의 상당 부분이 지방의원들의 특별당비로 충당되어야 하는데,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막대한 국고 지원을 받는 국회의원들도 특별당비에 매우 인색한 판에, 지방의원들이 흔쾌히 특별당비를 내놓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가난한 진보정당이 안 그래도 부족한 당원들의 당비로 의정지원 인력을 채용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니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상근 의정지원 인력이 아니라 상시적인 네트워킹이 가능한 플랫폼을 고민해야 한다. 가령 지방정부의 각종 조례나 예산을 검토하기 위해 혼자서 끙끙대거나 의정지원 인력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할 게 아니라, 이를 공개된 정책 게시판에 올리고 해당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알아서 검토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정보를 사전에 충분히 제공하고 공개적으로 검토 및 조언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뚜렷한 성과가 없을 수도 있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책은 자신과 무관한 한두 명의 활동가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고, 자신의 검토 의견이 반영된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만이 발언권을 독점하는 것이다. 전체의 문제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을 아까워하기 때문에).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정보와 자료를 공개하고 사소한 것이라도 피드백을 해주면 결국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대해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네트워킹이며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는 집단지성의 일종이다. 이재영 또한 민중당 때부터 십년이 넘도록 이런 과정들을 인내심을 갖고 지속했던 것이다. 무엇이든 한두 해만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건만, 한국사회는 진보정당들조차 인내심이 거의 없다.
돌이켜보면 지난 진보정당의 실패는 이런 정책 네트워킹의 붕괴 과정이기도 했다. 흔히들 노선싸움과 분파투쟁이 실패원인으로 지적되지만, 사실은 노선이나 분파는 어느 나라 어느 정당이건 모두 존재한다.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식의 논리는 그냥 무조건 합치라는 논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오히려 문제는 그런 노선 투쟁과는 관계없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활동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가령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이후 정책 활동가들은 당 정책연구소나 의원 보좌인력 등을 통해 비약적으로 늘어났건만 당으로 수렴되는 정책 네트워킹 역량은 그렇게 늘지 않았다. 그래도 이러한 당적인 수렴과정을 보다 고민하는 당 정책연구소나 당과 결합된 민생사업을 벌이던 경제민주화운동본부보다 의원 개개인의 이미지 내지 성과와 직결되는 보좌진 쪽에 오히려 무게중심이 실렸다. 이런 경향은 이른바 자주파보다 평등파의 ‘스타’ 정치인들이 더 심했다. 의원의 역할을 활용해서 당으로 수렴되는 정책 네트워킹이나 민생사업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학벌이나 인맥을 활용해서 자신이 내걸 슬로건이나 이미지를 만들기에 바빴다고 말하면 과연 지나친 평가일까?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당보다 개별 스타 정치인이 우선시되는 분위기가 확산된 것이 아닐까?
게다가 글머리에 말한 정책에 대한 오해도 한 몫을 했다. 정책이 집단적 노력의 산물이며,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조직들의 집단적 의지의 산물임에도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고민이 충분하지 않았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단적 의지를 대표하는 조직이라 할 노동운동 진영조차 자신들과 직결된 노동 관련 사안을 빼고는 우리 사회 전체의 방향성이나 지향에 대해 정책적으로 개입하는 데 게을렀다. 좀 심하게 말하면,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세 분파 중 하나는 정책에 기본적으로 무관심했으며 또 하나는 정책을 진보정당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마지막 하나는 정책을 본질적으로 개량적인 것쯤으로 치부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네트워킹해서 사람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만들고, 이를 다시 조직 및 사업을 강화시키는 데 활용한다는 관점에서의 정책 활동은 경제민주화운동본부나 청년유니온, 알바노조 등 진보정당과 관련된 일부 단위에서 간간히 이루어졌을 뿐 조직노동운동은 이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다고 하면 역시 너무 지나친 평가일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책은 네트워킹이며 조직이다. 그렇기에 당장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지속해야 할 일이지, 무슨 이슈 파이팅 식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조건이 어려울수록 오히려, 당장 뚜렷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지라도 이후의 네트워킹과 조직을 가능케 하는 플랫폼 내지 인프라의 구축을 고민해야 한다. 부디 길게 보자. 사람은 사라져도 정책과 조직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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