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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당신의 이름은 존중받고 있습니까?

 

 

박미란(학술공동체 동행 회원)

주인공 다니엘의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당연해서 오히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줄곧 이렇게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를 향해 켄 로치 감독이 던지는 하나의 물음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이름만으로 살지 않습니다. 부모, 자식, 배우자, 선후배, 직함……. 이외에도 한 인간을 대변하는 이름은 수없이 많습니다. 다니엘도 깐깐한 이웃집 노인이자 아내를 병으로 떠나보낸 남편이었고, 직장에서는 목수였지만 심장질환으로 일을 그만두고 의사 앞에 섰을 땐 환자가 되었습니다. 영화의 서두에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이유로 질병급여를 받는데 실패한 다니엘은 실업급여마저 받지 못하고 종국에는 죽음으로 ‘그들’의 심사가 틀렸음을 입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관료제라는 체제 안의 이름 없는 부품들입니다. 

감독은 영화 내내 소외계층의 안전망이 돼야 하는 복지정책이, 운영자 위주의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전락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요구되는 서류들, 까다로운 심사 기준, 늘 대기중인 ARS 전화 등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광경입니다. 관료제 안에서 우리는 고객, 손님, 대기표의 번호, 혹은 아이디로 상품처럼 바코드화 되고 있진 않습니까? 원래는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졌을 규범들이 어느 날 권력이 되어 사람을 평가하고 나누는 기준이 되버린 것입니다.

다니엘이 보는 세계는 의도적으로 두 분류로 나뉘어 번갈아 대비됩니다. 원리원칙을 내세워 약자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기꺼이 남을 돕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자를 대표하는 ‘경찰’은 담벼락에 시위하듯 쓴 낙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부터 다니엘의 목소리와 존재를 지우려는 듯 그를 연행합니다. 후자를 대표하는 것은 연행되어가는 다니엘을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이웃, 바로 시민들입니다. 감독은 공권력으로 상징되는 경찰과 공무원들의 이름을 소거함으로써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된 구조와 사회제도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을 위한 제도가 사람을 죽이는 제도가 되고,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한 지원 제도가 일자리를 뺏는 제도로 전락하는 일이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부당한 일에 분노할 줄 알고 슬픈 일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그저 평범한 노인이었던 다니엘을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영화를 보는 그 누구도 그가 순전히 병으로 죽었다고는 생각지 않을 겁니다.

싱글맘인 케이티는 자신은 굶으면서도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만듭니다. 케이티의 딸도 다니엘에게서 받은 친절을 되갚기 위해 노력하고, 다니엘도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할애합니다. 아주 힘들고 열악한 상황에 놓인 인물을 다루면서도 감독은 따뜻한 인간애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습니다. 결국 사회적 약자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돈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낙인입니다. 잘못된 제도와 사회구조가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할 때, 가장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조차 받지 못한 사람들의 발길은 생존의 위기 앞에서 더 낮고 위험한 곳으로 향합니다. 이런 심각한 악순환 속에서 담벼락의 낙서는 가장 강력한 자기표현이었던 셈입니다.

다니엘은 침묵으로 외칩니다. 낙서로, 유언장으로, 자신의 죽음으로 선언합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그의 방에는 정신질환으로 “머릿속에 바다”를 품고 있었던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물고기를 닮은 모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몸파는 일도 마다않는 케이티 앞에서도 기꺼이 눈물을 흘려주었습니다. 반전을 기대했던 관객으로서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던 다니엘의 죽음은 그 어떤 눈물어린 호소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하나의 죽음은 다른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그의 죽음을,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 아래로부터 전북노동연대 기관지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