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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강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다 -- ‘남강오백리 물길여행’을 읽고

 

 

이장규 (노동당 경남도당 정책위원장)

 

80년대 초반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겉보기에는 모범생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회의와 불만이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성적은 잘 나왔지만 단순암기식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들이 있으리란 분위기가 지방의 중소도시에조차 떠돌았다. 대학에 진학한 문학 서클의 선배들을 통해서 80년 광주에 대한 이야기들이 간간히 들려왔고, 교과서 특히 ‘국민윤리’라는 과목에 있는 내용들 가령 공산주의자는 도덕적으로도 나쁜 놈들이라는 이야기들이(당시의 국민윤리 교과서의 내용이 그러하였다) 실제와 다르다는 건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외국 소설들만 꼼꼼히 읽어보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말로나 까뮈의 소설에 나오는 공산주의자들은 나쁜 놈은커녕 대의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가장 윤리적인 인간이었다.

 

언론에서 말하는 것이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진실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여전히 불투명했고, 주중에는 주변에서 기대하는 모습대로 학교생활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당시로서는 알지 못했다. 겉모습과 속마음의 불일치를 그나마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주말이었다. 일요일마다 학교에 자습하러 간다고 집을 나오고선, 진주 주변의 곳곳을 혼자서 싸돌아다녔다. 신안동의 벌판, 배건너의 대숲, 도동의 모래밭, 금산과 예하리의 연못 등등. 하염없이 걷다가 생각하다가 풀밭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자다가 했던 나날들. 이 자체가 사춘기의 치기였기도 하고 고민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주말이 없었다면 나는 그 시절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말의 싸돌아다님은 늘 남강과 함께하는 길이었다. 진양호가 생기고 나서 예전의 위용은 잃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싸돌아다니기는 더 좋았다. 봄의 남강변을 따라 온갖 풀과 나뭇잎들이 자라났고 매주마다 확연히 달라지는 그 생기로운 분위기는 그 자체로 한없는 위로였다. 여름의 거센 물줄기도, 가을의 고즈넉함도, 겨울의 쓸쓸하지만 굳센 풍경도 모두 나를 지탱하고 갈데없는 마음을 다잡게 했다. 남강을 떼어놓고는 그 당시의 나를 생각할 수가 없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진주로 나왔기에 나에게 남강의 기억은 거의 진주 주변이긴 하지만, 원래의 고향은 산청군 단성면의 한 시골마을이었고 그 마을은 경호강(산청 주변에서 남강을 이르는 이름) 주변으로서 원지에서 십리 정도 들어간 마을이었다. 할아버지와 친척들이 다 그곳에 살았기에, 명절이나 방학 때면 늘 경호강을 건너 시골에 가곤 했다.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린 날의 겨울이었나,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아버지와 형님 없이 어머니가 어린 동생을 업고 나와 함께 시골에 가게 되었다. 그 날은 무척 추웠고, 원지 지나 단성교를 건너면서 불어오는 강바람은 너무나 시렸다. 다리를 막 지나고 어머니는 길가에서 조금 쉬셨는데, 경호강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흐느끼셨다. 왜 그러느냐고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러면 더 우실 것 같아서였다. 내가 알 수 없는 슬픔들이 이 세상에는 참 많다는 생각을 문득 한 것 같다. 어쩌면 이런 기억들이, 이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진실이 있으리란 생각을 고교 시절이나 그 이후 내내 하게 된 바탕이었을 것이다.

 

오십이 넘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세상을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앞으로도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진실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 진실을 다 알아야 한다고도 이제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진실을 다 모르더라도, 나는 그리고 우리는 혼자서가 아니라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모든 슬픈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 진실은 사실은 이런 사람들이 느끼는 것들이다.

 

고향마을로 가는 방법이 하나 더 있었다. 원지에서 단성교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후천마을(원래의 이름은 ‘뒷내’였다) 건너편에서 줄배를 타고 경호강을 건너는 방법이었다. 지금은 수산교 다리가 있지만 70년대 말까지도 이 곳에는 다리가 없었고 줄배를 이용했다. 따로 뱃사공이 없었기에, 줄배가 강 건너편에 있으면 그 쪽에서 누군가 배를 타고 건너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추운 강기슭에서 꽤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누군가 저쪽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올 때의 그 감격이란. 이제 드디어 우리도 건너갈 수 있겠다 싶어, 저쪽에서 오는 사람이 너무나 반가웠다.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이렇게 낯모르는 숱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이 세상을 건너가고 있는 게 아닐까.

 

이 모든 기억과 짧은 생각들은 사실은, 진주의 인터넷언론인 단디뉴스의 대표인 권영란 기자가 쓴 ‘남강오백리 물길여행’(도서출판 피플파워)을 읽으면서 떠올린 기억과 생각들이다. 독후감이라기에는 너무나 사적인 내용일 수도 있겠으나, 이런 개인적인 기억을 가득 떠올리게 한 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에게는 올해 최고의 책이었다. 남강에 얽힌 기억을 갖고 있는 모든 분들께 일독을 강력히 권하는 바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남강과 그 주변 지역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분들께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http://peoplesbooks.tistory.com/52 물길 따라 만나는 자연과 사람 역사 [남강오백리 물길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