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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훼방 70년 ⑧ :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 연민이 분노를 부둥켜안을 때


최형록 (필통 필진)


1. 나는 누구인가?

 

2014년 1월 2일 / 캄보디아 프놈펜 남서쪽 카나디아 공단 / 한국계 기업 약진통상 정문 앞 / 봉제노동자 백여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 최저임금을 올려달라고 127개 공장이 파업 중이었다 //... / 나도 이란 것을 가져보고 싶다/ 서른한살 여공 파비도 / ... 십년을 일했지만 남은 건 200달러 빚뿐 / 그것도 육개월에서 일년 단위 비정규직 / 지난 이년 동안 카나디아 공단에서 / 영양실조로 작업 중 쓰러진 봉제노동자 4000명 // ... 헌병들이 / 곤봉을 휘두르기 시작한 건 오후 3시 30분 / 약진공장 공장 부지를 나눠 쓰는 911 공수부대원들도 / 쪽문을 열고 나왔다 911부대 차프소포른 소장은 / 약진통상 지분을 가지고 있다 / ... // 다음 날 분노한 카나디아 공단 노동자 만명이 / ... 아침 8시 / 내무부를 향한 시위대가 이백 미터쯤 전진했을 때 /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다섯명이 죽고 / 삼십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 ... 생선을 사서 / 집으로 돌아가던 임산부도 총을 맞았다 ... // 캄보디아 주재 한국 대사관은 / 유혈사태 전 긴급서한을 통해 / 정체불명 아웃사이더들의 불법행동에 대한 단호한 대처가 없을 시 / 캄보디아 내 한국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효과가 우려된다고 / ... / 캄보디아에서 2012년 기준 한국은 중국을 제치고 / 캄보디아 투자국 1위 한국 대사관.../.../ 현지 수경사령부와도 접촉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캄보디아 국가대테러위원장과 접촉하고 내무부 법무부 경찰청 등 정부 주요 기관에 /... /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 훈센 총리의 / 경제 자문위원이었다 / ... 한국봉제협회는 / ... / 통합야당 대표 삼랭시와 8개 노조를 상대로 /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에 들어갔다 / ...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송경동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 2016, 92~102쪽)

 

11면에 달하는 긴 시는 이렇게 생존을 향한 전투로 시작한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노동자와 자본가-공권력-구사대의 충돌은 방글라데시 치타공의 영원(?)무역에서도 베트남 타이응우옌성 삼성전자 공장 신축현장에서도 일어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당신은 1주일에 한번이라도 하는가? 한국의 수출자유무역공단에서 20여년 노동운동 주변을 기웃거리며 살아온 시인 송경동은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자문한다.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우리는 하나가 아님을 뼈저리게 체험한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과 투쟁한 나, 중국과 인도네시아로 공장이전을 하며 위장 폐업한 콜트-콜텍 노동자들과 함께 한 나, 필리핀에서 2조 원짜리 조선소를 세우면서 김진숙 동지가 고공농성을 해도 모르쇠 한 한진 중공업 조남호 회장과 싸운 나, 미래의 경영상 위기로도 해고할 수 있다는(일제시대 치안유지법에 따른 예비검속 못지않다. 위헌적 판결이 아닌가?) 법관에 망연자실하는 나, 정규직 자녀 우선채용에 합의하고 비정규직 확산과 우선해고에 눈 감는 대공장 민주노조민주노총 정규직 조합원들을 위해 힘써 살아온 나, 해마다 518 광주학살에 분개하고 용산 철거민 학살을 오늘도 잊을 수 없는 나, 전 세계 부자 85명이 세계 인구 절반의 부에 맞먹는 부를 소유한 이 지구별에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라고 시인은 자문한다.

 

주민등록증 사진으로 있는 자가 당신인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미토콘드리아가 당신인가? 영화 국제시장에 눈물 흘리는 자가 혹은 자백에 분노하는 자가 당신인가?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에 감동하는 자가 혹은 레미제라블에 온몸의 세포가 일제히 분기탱천하는 영육을 가진 자가 당신인가? 매일 인터넷을 쓰면서 미국의 교육에 영향을 미치는 자선 자본가 빌 게이츠나 중국 폭스콘의 임금 노예주인 스티브 잡스만 부러워하는 자가 혹은 WWW 개발에 결정적 역할을 한 Tim Berners-Lee에 감사하는 자가 당신인가? 목사 조용기의 믿쉠니까의 신앙심으로 서울시를 주님에게 봉헌한 이명박을 존경하는 자가 혹은 시골 교회당에서 종치기로 살면서 ≪몽실언니≫ 등을 쓴 고 권정생 선생님(개인적으로 민중당 시절 댁에서 두 시간 정도 뵌 일이 떠오른다)을 존경하는 자가 당신인가? 일본 여행하며 수시로 이토 히로부미를 보면서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별세한 것으로(請禍臺에서 피의자가 된 세입자처럼) 생각이라도 하는 자가 혹은 편의점에서 수시로 세종대왕을 보면서 선출된 권력자들 중에서 그이만한 위정자가 없는 껍데기 공화국에 분노하는 자가 당신인가?

 

나는 한국인이다 / 아니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 나는 송경동이다 / 아니 나는 송경동이 아니다 / 나는.../.../ 수없이 많은 이름이며 / 수없이 많은 무지이며 아픔이며 고통이며 절망이며 / 치욕이며 구경이며 기다림이며 월담이며 / 다시 쓰러짐이며 다시 일어섬이며 / 국경을 넘어선 폭동이며 연대이며 / 투쟁이며 항쟁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102쪽)

 

나의 마음 속에는 상충하는 전통들이 선택적으로 뿌리 내린다. 4천 년을 훨씬 넘은 무당의 종합예술이, 2500년 전 효와 예치(禮治)를 외친 공자가 혹은 장자가 공자와 대결시킨 거구의 도척이(주1), 남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자비심을 발휘하라 역설한 부처님이 혹은 전두환의 호헌을 호국의 이름으로 지지한 땡중이, 원수를 사랑하라면서 동시에 성전을 뒤집어엎은 예수가 혹은 부흥회에 열광하는 년놈이, 사상의 자유를 역설한 존 스튜어트 밀이 혹은 한국적 민주주의로 한국인의 마음을 한강에 수장시킨 박정희가, 전 세계 노동자가 단결해야할 도덕을 이성적으로 탐구한 맑스가 혹은 레닌 사상을 차도르로 아용한 스탈린이 그런 전통들을 대표한다.

 

삶의 길에서 경험을 어떻게 느끼고 인식하느냐라는, 사고 틀과 가치관에 따라서 어떤 것들이 나의 정체성(Identity)을 형성한다. 그런 한편 각자는 그 동일성(Identity)의 특수성을, 역사를 주체적으로 형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창조적으로 부정하면서 각자 보다 보편적인 나의 정체성을 창출하게 된다. 송경동이 자신이 송경동이면서 송경동을 부인하는 뜻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 부단히 자신을 성찰하며 자기부정을 하는 사람이기에 그는 국가-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생존투쟁에 나서는 캄보디아의 파비이기도 하고 폭이기도 하며 방글라데시의 파르빈 악타르이기도 한 것이다. 전 세계 노동자-민중이 연대하는 국제주의.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이성적 함성은 인터넷과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로 연기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 속 삶에 필수인, 자본에 대한 존엄한 분노의 도덕 바로 그 자체다.

 

국제적 연대의 열정을 가둘 수 있는 감방이 어디에 있을까? 송 시인은 목과 다리를 다친 채 독방에 갇혀서도 노점상인 15세 희랍 소년 알렉산드로스가 경찰에 목숨을 잃어서 촉발된 희랍인들의 봉기를 지지하며 베트남에서 이주해온 A씨가 애국가 2절을 부르지 못해 떨어진 일에 분개한다.('1%에 맞선 99%들', 88~89쪽). 비만을 고민하는 바로 이 시각에 지금도 세계인 팔억 오천만 명이 기아 상태라는데 / 칠초마다 어린이 한명이 굶어 죽어간다는데 / 영양실조로 매년 칠백만 명이 시력을 잃는다는데...('스모키 마운틴', 124~126쪽)라고 감정이입(Empathy)하며 공감(Sympathy)하는 연대.

 

나 역시 한국인이 아니다! 이동휘, 조봉암, 김원봉 같은 독립투사들은 볼셰비키 혁명정권과 중국 공산세력 민중과 연대하는 인간다움의 존엄함을 아낌 실천했다. 과연 한국인은 이런 위대한 정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계승 발전시켜왔는가? 초등 저학년 시절 소위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자랑스레 떠드는 베트남 민중(베트콩 포함)을 잔인하게 살상한 무용담을 들을 때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악업들은 끔직한 사실들이 아닌가? 베트남 민중은 금년 파월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50주년을 맞아 한국민에게 사죄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주2) 그 학살이 80여건 9000여명에 이른다니?! 전 세계적으로 존경 받는 인텔리겐챠들과 학생-노동자들이 반대한 베트남 전쟁에 용병이라는 노예군으로 참전한 죄악을 국가-사회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니 일제 파시스트놈들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성노예라는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는 우리 할머니들의 깊고 깊은 고통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금년이 안보에 (가장) 중요한 해라는 역도 박정희의 거짓말을 매년 지겹도록 들어온 나라에서 전 합참의장이라는 놈(최윤희)이 1996년 전 국방부 장관 이양호에 이어 방위산업 비리로 실형 선고를 받고 법정 구속되는 일이 일어나는 나라.(주3) 수상 구조함 통영함의 핵심 장비인 음파 탐지기를 1970년대 것으로 설비한 방위청 직원들의 비리로 광양함과 함께 장비교체에 수 백 억 원을 추가로 국민 세금으로 부담하도록 만드는 나라.(주4) 이런 방산 비리범들을 처형하는 법을 제정 그 범죄행위의 책임을 무섭게 물어야하지 않을까? 한탄스런 일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진상을 잘 모르는 것이 청산리 전투의 대승이 김좌진-이범석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자 홍범도 장군의 지원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홍 장군은 홍경래의 후손으로 동학 농민전쟁에도 참여한 봉오동 대승의 지휘자인데 이 분의 묘소에 잡초가 무성하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 에서는 이 분을 기려 홍범도 거리까지 있다는데...(주5) 이런 사해동포(四海同胞)적 공감과 연대는 의존하면서도 넘어서야 하는 국가와 가족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베트남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과하기 위해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만든 ‘베트남 피에타’ (사진=한겨레 강재훈)


 

2. 국가, 자본주의 고통의 바다를 건너며 수선하고 결국 버려야할 뗏목

 

국회에서 맺은 합의서도 종잇조각 / 천억대 회사를 육천만원짜리로 빼돌린 배임도 무혐의 / 노동자를 버리고 떠난 야반도주는 합법 / 백주대낮 회장 집 방문은 주거침입 // ... 구십사일을 굶고 네 번이나 고공엘 기어올라봐도 / 머리를 깎고 수천 배를 해봐도 / 변하지 않는 비정규직 굴레 // 우리가 기륭전자에서 / 십년간 배운 교훈은 / 자본은 인격이 없다는 명백함 / 국가는 합법의 외투를 걸친 이들의 사병이라는 것 /...(기륭과 보낸 십년, 130쪽)

 

이게 국가인가?라는, 어이없는 허탈감을 사로잡는 질문. 세월호의 침몰에 이은 한반도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쉽지 않은 국가체계의 뇌졸중. 상황이 이렇게 극단에 이르게 된 책임은 우선 정치행위를 삭제시키는 경영 수준의 행정을 합리화하는 경향을 들 수 있다. 남한 전체를 생체 해부한 4대강 죽이기 사업을 강행한 이명박은 비지니스 대통령을 모범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악의 문이 활짝 열리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견제와 균형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헌 누리 당의 금배지만 단 놈들과 관료들의 부작위에 의한 범죄적 무책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정치행위의 소실과 짝을 이루는 것이 정치의 사법화 경향이다.(주6) 이런 경향은 혁명의 전망을 상실한 노동-민중운동의 체제 내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경향을 선도한 세력은 물론 자본가 계급과 행정 권력이다. 파업에 대해서 손배소송을 제기하는 반민주적 행위가 사실상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명명백백하다. 제주강정 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이 촉발한 주민들의 기지건설 반대 투쟁에 대해서 손배소송을 추진하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이 국가라는 것이 자본가 계급의 국가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주지 않는가?

 

이재용이라는 대를 이은 강도귀족 놈(Robber Baron)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위해서 돈도 (부모의) 실력이라는 말을 한 정유라에게 무려 35억을 지원함으로써 국민연금이 그 합병에 찬성하도록 한 범죄행위 역시 그렇지 않은가? 한국의 국방부는 미 제국주의 국방성의 한국지청에 불과하며 향후 일제 방위청 지부까지 겸하는 부서가 될 것 같고 국정원은 청화대의 게쉬타포(나치의 비밀경찰), 노동 고용부는 자본 해고부, 교육 인적 자원부는 기업형 인간 제조부, 문화 체육부는 반문화 블랙리스트 작성 체육선수 협박부,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 재갈 통신 검열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런 것 못지않은 책임이 국민 그 자체에게도 있음에 맹성해야한다.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하다는 백성-신민(臣民)적인 전 근대적 사고방식은 50대 이상에게만 있는 것일까?

 

모든 게 조금씩은 낡아간다 / ... // 그런데도 낡지 않는 것은 약속이다 /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살겠다는 약속 / ... // 그래도 파국만은 막아야 한다고 / 가끔은 공원에 나가 시키지도 않은 / 삼각동맹의 가족 증명사진을 확고하게 박으며 / 신고만 받고 AS는 단 한번도 안 하는 / 저 국가에는 항의도 못해보면서 / 조금씩 조금씩 낡아간다(국가 결격 사유서, 60~61쪽)

 

시인 송경동이 국가에 항의 한번 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시인의 자기 성찰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일반 한국인들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 뿌리를 김동리와 문학 논쟁을 벌이며 문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한 고 김수영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 골육붙이나 가정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기 싫은 것은 없다".(주7) 한국인의 이런 성향이 일본 자본주의와 다른 정실(情實)-연고 자본주의를 낳았으며 급기야는 현대 자동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우선 취업시킬 수 있도록 자본과 단체협약을 맺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3. 존엄한 분노의 태반 모성의 감정이입과 공감(주8)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사회주의 조국 소련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지 무색하게 붕괴하면서 맑스주의(주9) 청산이 일어났다. 이런 유행을 넘어 송경동이 꿋꿋하게 노동운동을 이십년 넘도록 해올 수 있는 원천은 무엇일까?

 

팔딱이는 인간의 심장을 뇌관으로 썻기에 / 어떤 핵우산보다 거대하게 / 인간의 대지를 덮었다 어떤 것도 해치지 않으면서 / 엄마라는, 아빠라는, 아이라는 말 한마디로 / 세계인의 귀를 찢고 머리를 깨고 / 가슴을 파열시켰다... / 어떤 최첨단 레이더 정보위성도 / 인간의 존엄을 향해 스스로 증식해가는 / 이 가공할 생명들의 행방을 모두 /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가 / 포탄으로 이룬 세계화를 / 우린 사랑과 연민이라는 / 아주 오래된 재래식 무기로 이룰 것이다 (나비효과, 90~91쪽).

 

오래된 재래식 무기 사랑과 연민의 교묘한 방편(불교의 Upaya)은 내가 강조하는 존엄한 분노(주10) 동시에 이 인간성은 평화의 금강석 같은 쟁기이기도 하다. 이 위대한 정념(Affects)의 원천은 모성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정임에 틀림없다.

 

밥도 부뚜막에서 혼자 먹고 / 늘 맨 뒤에서 허둥지둥 / 무언가를 이고 지며 따라오던 사람 / 모두가 잠자리에 든 뒤 들어왔다 / 새벽녘이면 슬그머니 / 빠져나가던 사람 (어머니의 나라말, 12~13면)

 

칠순이 넘어서야 마침내 / 생활 주도권을 쥐게 된 어머니... (문딩이 가족사, 42~43면)

 

가부장제에 억압당한 어머니의 한을 가슴에 안고 정신적으로 아버지 살해(Patricide)를 함으로써 인간적인 사나이가 되는 것이며 법 앞의 평등을 말만 하는 국가(Patrie: 조국. 이 단어 자체가 가부장제와 조국의 밀접한 역사를 말해준다)를 개조하고 결국 소멸시키는 과정에서 남녀평등 역시 명실상부한 현실이 되어갈 것이다.


(이윤엽 판화 = 철탑의 봄)


4. 노동운동을 눈멀게 하는 것들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김진숙씨가 수 백일째 고공농성으로 기네스 기록을 갱신하고 있을 때, 아이디어 많은 박점규가 ‘고공클럽’을 제안했다. 그간 평지에서 살지 못하고 고공으로 올라간 사람 백 명만 엄선해 모아보자는 계획이었다. //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때 포클레인에 올라간 나도 당연히 회원일거라 했는데 그만 탈락하고 말았다 ... 항의하자, 거긴 5미터밖에 안돼 자칫 ‘고공클럽’을 희화화할 수 있단다. ... 정히 불만이면 ‘저공클럽’을 만들란다. // ... 부평 GM대우 비정규직으로 한강다리 난간에 매달려 ... 야, 나는 30미터도 넘는데 왜 빼?하자 ... 거기는 고공이 아닌 허공, 불만이면 허공클럽을 따로 만들라는 말에 모두 깔깔거렸다. (허공클럽, 18~19쪽)

 

나는 껄껄거렸다. 넘실대는 푸르른 깊은 바다와 열광적인 대화를 나누는 태양의 풍경화 같은 이 시집에서 천진난만한 어린이 같은 뭉게구름에 해당하는 시가 바로 이것이다. 절박한 투쟁에도 잃지 않는 해학의 여백. 1987년 현대 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하고 지금은 울산 이주 노동자 지원 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조돈희 동지 역시 50미터 정도에서 투쟁했으니 고공클럽 회원 자격이 있다. 자유-평등-형제애(La Fraternite)의 혁명을 주도한 자코뱅 클럽처럼 이 3자 고공-저공-허공 클럽들이 혁명의 바람을 휘몰아왔으면!

 

고공클럽 회원일, 도법 스님이불덩어리 같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되는,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을 조계사 피신 전 만났을 때, 전국 현장을 순회해보니 상황이 심각하더라는 것이다. 심각한 상황이란 무엇일까?

 

그는 ... / 이른 아침에 출근하고 / 늦은 밤까지 남아 고독하게 야근을 한다 / ... // 명민한 그는 터무니없이 / 꿈을 꾸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 선동적 발언을 경멸하고 / 매섭게 실사구시의 메스를 대는 현실주의자 / 예의 없는 동지를 참지 못하고 / 학습하지 않는 무지를 참지 못한다 / 그는 제 나름대로 동맥경화에 걸린 / 조직의 혈로를 뚫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 ... // 그런 우리 동지께서는 오래 / 운동 상층에 있었다... / ... 바른 그에 막혀 / 한없이 비뚫어진 현장의 소리들이 잘린다 / 역사적 관점으로 무장한 그의 정연한 논리 앞에서 /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 즉자적인 분노가 잠재워진다 / 정세도 모르는 사람들의 조급함들이 차분하게 다스려진다. /... // 모든 조악한 것을 / ... / 예의 있는 것으로 순차적인 것으로 / 조직적인 것으로 교도하고 관리하는 / 그가 진정한 우리 시대의 관료다 // ... / 거리와 광장으로 나아가려면 / 이제, 그를 먼저 설득해야한다 (관료, 76~78쪽)

 

어떤 책을 사고자 서점에 가면 타고난 육감으로 비목적의식적인 눈길이 뜻밖의 양서를 찾아내는 기쁨! 혁명 역시 그런 목적의식의 드넓은 여백에 있는 이성적 무의식이 거리와 광장에서 즉자적인 분노에 날개를 달아 대자적 계급의식으로 비상한다! 그런 한편 급격한 대자적 계급의식의 획득(頓悟)은 투쟁경험에 대한 성찰이라는 학습을 부단히(漸修) 하지 않으면 체제 내적 기득권의 수호의지를 합리화하는 거짓논리로 전락하고 만다.

 

혁명이라는 대어를 낚을 수 있는 정치적 힘은 사이버 공간의 사회성으로는 부족하다. 비뚤어진 현장의 숨결과 맥박이 뛰는 거리와 광장의 정치적 행동이 구상(構想)을 현실화 한다. 관료의 정신세계, 교조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느낀 그 어떤 것도 /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 문득문득 나도 양지가 그리웠다는 이야기를 / 간혹 엉망으로 무너지고 싶을 때 많았다는 이야기를 / 당신에게 해주기 싫어요 / 당신이 얼마나 깨끗한 영혼인지 증명하기 위해 / 내가 얼마나 병든 영혼인지를 내보이고 싶지 않아요 / 모든 게 다 이해되고 / 모든 게 다 해석되는 당신에게 / ... / 그 모든 고백이 당신 기슴께로 가지 않고 / 차디찬 머리로 갈 거니까요 / 당신은 친구의 말을 / 진술로 받아들이죠 / 친구의 눈물을 / 혐의로 받아드리죠 / 당신은 하나의 틀만 가지고 있는데 / 내 열망과 상처는 수천만 갈래여서 / 이제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군요 (교조, 74~75쪽)

 

관료교조는 시인 송경동의 사람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과 깊은 통찰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마음의 눈은 연민이 분노를 부둥켜안을 때, 가부장제에서 평생을 식구들에게 봉사한 어머니의 삶을 눈물로 진맥하고 꼭 이렇게 살아야하는 것인가? 라는 깊고 깊은 안타까움으로부터 비롯한 분노감이 혁명적 전망을 가지는 존엄한 분노감으로 승화하는 체험에 탯줄을 가진 것이리라.

 

(일러스트 = 석정현)


5. 개인주의를 넘는 성찰과 연기적 무아를 지향하는 삶

 

한 선생이 말했다 / 당신은 공적인 삶에 과도하게 치우쳐 / 사적인 삶이 너무 없다고 / 그러면 죽는다고 // 자주 만나는 선배도 말했다 / 운동 이야기를 줄이고 사적 대화 비율을 / 최소한 칠십 퍼센트로 늘리라고 / 그러지 않으면 모든 관계가 말라 죽는다고 // ... / 어느 쓸쓸한 저녁 // 이기고 지는 것만이 / 무엇을 이루고 못 이루고만이 /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는 / 삶의 시간들 (사적 유물론, 62~63쪽)

 

여기서 사적이란 역사적이 아니라 사사로움 그 자체다. 왜 박근혜-최순실 지옥문이 열렸을까?

 

나는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든다 / ... / 진보단체 싸이트를 이리저리 뒤져봐도 / ... / 그것이 무엇일까 공단거리를 걸어봐도 / 촛불을 켜봐도, 전경들 방패 앞에 다시 서봐도 / 며칠째 설사인 아이의 뜨거운 머리를 만져봐도 / 밤새토론을 하고 논쟁을 해봐도 / 나는 왜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까 (‘혁명’,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2009, 132쪽)

 

한국인들이 잃어버린 시간, 혁명의 시간! 신자유주의적 자본가 계급의 비타협적 투쟁과 분열공작에 대해서 명색만 남은 계급의식, 이익 집단적 계산에 입각한 사회적 대타협의 시간이 그 장엄한 시간을 깔아 뭉개버린 것이다. 150만이 시위를 하더라도 자유주의적 보수 야당들의 합리적(?) 보수와 자유주의의 틀 내에 갇혀 있는 한 극단적인 부정부패와 국정농단에 대한 처벌 이상을 넘어서는 정치적 상상력의 광야는 펼쳐지지 않지 않을까? 국정농단이 가능한 인격 없는 자본, 양극화와 7포 세대를 초래한 주범인 재벌체제를 국유화하기 위해서 대공장 노조의 정치적 총파업을 하지 않는 한 평화시위에 영향 받아 헌재가 탄핵을 결정하더라도 일상적 전쟁은 여전하지 않을까?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온 / 아내의 저작권은 몇 퍼센트일까 // ... / 어느덧 나는 자꾸 비굴한 노년을 위해 / 넉넉한 생활을 위해 / 짭짤한 저작권을 꿈꾸지는 않는가 // ... / 누군가의 비참과 울분을 / 확실한 저작권의 계기로 상상하지는 않았는가 / 내가 왜 저 꽃의 저작권을 탐해야 하는지 / ... / 내 삶의 저작권도 / 실상은 내게 있지 않다 (‘저작권’, 108~109쪽)

 

인생의 승패와 성패에 얽매이지 않는 자세. 좋은 사진을 찍느라고 나무를 베는 놈들. 논문 표절을 하고도 은폐에 성공한다면 총장도 하고 국무총리도 할 수 있는 나라-사회. 자신이 생계를 위해서 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찬찬히 성찰해보면 인습적인 나 아닌 다른 이들의 노고가 없다면 단 한 가지도 할 수 없음을 인간 사회의 그 얽히고설킴(緣起: Co-arising)의 원리를 사람들은 얼마나 종종 의식할까?

 

몇번이나 세월에게 속아보니 /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 바늘귀만한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 두번 다시는 속지 말자 /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79쪽)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전통이 고동치는 구절이다. 현세 속 고뇌에 찬 투쟁의 삶은 유토피아의 꿈을 쟁기질 하는 모태. 사람들이 염원하며 걷다보면 혁명의 길이 보이며 닦여진다.


어느 때 ≪진보평론≫ 편집회의에서 나는 혁명의 지성에는 예술적 감수성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를 싣자고 제안했다. 편집위원들이 동의해서 현 정의당 공동대표이신 김세균 선생께서 알아 봐 합류한 시인이 송경동 이었다. 웃는 모습이 순박한 시골 소년 같은 시인. 내가 좋아하는 동요 동무생각을 역시 좋아한다는 시인.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 ... /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 백합 같은 내 동무야 /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그렇다. 백합 같은 소년-소녀의 진실한 마음으로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는 사랑을 하면서 혁명을 꿈꾸는 삶이 인간다운 삶이며 삶의 황혼기에도 찬란하면서 은은한 저녁노을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국인이면서 아닌 것은 동물계의 일원인 인류의 일원이면서 아닌 것은 43억년의 역사가 상감(象坎)되어 있는 생명의 한 존엄한 일원인 것이다!

 

<주>

1. 장자, "도척", ≪장자≫, 기세춘 옮김, 바이북스, 2008년, 592~617면.

2. <한겨레> 2016-09-23 일자, 16면.

3. <조선일보> 2016-11-19 일자, A10면.

4. <조선일보> 2016-09-05 일자, 1면 톱기사.

5. <한겨레> 2016-09-13 일자, 29면. 그리고 교포작가 김세일, ≪홍범도≫, 신학문사, 1989년, 3권 참고

6. Wendy Brown, "우리는 오늘날 모두 민주당원들입니다...", Daniel Bensaid 편,

≪민주주의 어떤 국가에서?≫, 콜럼비아대, 2011년, 44~57면.

7. 김수영, "무제", ≪김수영≫, 돌베게, 2004년, 17~20면.

8. 최형록, "새로운 변혁 주체의 형성: 헤게모니, 진화론, 거울 뉴런, 그리고 명상", 김세균 엮음, ≪다윈과 함께≫, 사이언스북스, 2015년, 355~361면.

9. 1980년대~1990년대 한국 맑스주의 변혁운동의 주류는 스탈린주의였다. 스탈린주의의 영향은 전세계 혁명운동에 지대한 해악을 끼쳤으며 이 경향과 구별한다는 뜻에서 소련 붕괴 후 맑스주의는 복수(marxisms)로 보는 경향이 일반화되었으며 나는 맑스주의보다는 “맑스적”(Marxian) 그리고 “레닌적”(Leninian)이라는 어휘를 선호한다.

10. 최형록, “존엄한 분노 그리고 존엄한 ”정치-문화적 복수“, 경남 노동자민중행동 필통, 2015-02-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