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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디지털 영인본에는 왜 정이 가지 않을까?

 

이김춘택(필통 편집부)

일제시대-해방공간에 발행된 책을 나는 무지무지 사랑한다. 멋스런 장정(裝幀)과 활판 인쇄를 보것도 즐겁고, 지금과는 맞춤법이 다른 당시의 언어를 소리 내서 읽는 것도 즐겁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시집을 편애하는데, 학교 도서관에서 아직 귀중본으로 분류되지 않은 이용악 시집 <오랑캐꽃>이나 김수영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도서관이 폐가식이었을 때 도서관 책 정리 알바를 하며 책장을 가득채운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이나 레닌 전집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학과사무실에서 학과장 도장을 받고 도서관 귀중본 열람실에 신청을 한 뒤, 주방에서 쓰는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유진오 시집 <창>의 표지를 쓰다듬고 책장을 넘겼을 때, 거기에 "쪼들리는 부산 생활에 조금 받은 이달 월급도 거이 다― 나가버렸다. 어떠한 타격과 괴로움이 있드라도 한 달에 한 권씩은 살려는 결심을 이행하기 위하여 정열의 시인 유진오 씨의 시집을.... 1948. 11. 15" 이라고 쓰인 글과 만났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관내대출을 신청해, 백석 시집 <사슴>, 오장환 시집 <성벽>과 <나 사는 곳>, 권환 시집 <자화상> 등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며 열심히 표지 사진을 찍고 신나게 복사하던 기억도 있다.


 

또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실에서 마이크로필름을 돌려가며 1946년 4월 <현대일보>에 3회에 걸쳐 연재된 이관술의 항일투쟁기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잇엇다'를 찾아 복사하던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비록 영인본이긴 해도 1946년 <문학>에 연재된 김태준의 ‘연안행’을 도서관에서 찾아서 한 글자 한 글자 탐독하며 혼자 즐거워하기도 했다.


#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잇엇다

http://blog.daum.net/bomnalbam/8322330


# 김태준, 연안행 延安行

http://blog.naver.com/bomnalbam/60029868189

 

요즘 '소와다리', '더스토리' 같은 출판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기의 옛 책들을 초판본 디자인과 활자 그대로 다시 펴내고 있다. 예전으로 치면 영인본 같은 것일 텐데 디지털 시대의 좀 더 세련되고 깔끔한 영인본이라고 할까... 앞전에 통영 전혁림 미술관 옆 봄날의책방에 들렀을 때 서점 청년이 소와다리에서 펴낸 백석 시집 <사슴>을 보여주며 원본 그대로라고 신나서 소개하는 것에 대해 "나는 시집 <사슴>을 직접 쓰다듬어 보고 읽어봤다"고 조금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기도 했었다.

 

내가 그토록 애정하는 책들이지만, 요즘 복각 출간되는 디지털 영인본에는 왠지 정이 가지 않는다. 그 책들이 궁금하지 않다. 들춰보고 싶지 않다. 왜일까?


 

원본은 물론이고 예전의 영인본들에는 비록 복사한 것이지만 원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원본 그대로를 거의 완벽하게 복제한 디지털 영인본에서는 그런 흔적을 느낄 수 없는 것 같다. 그냥 복제품일 뿐이다. 또한 위에 언급한 여러 책들을 찾아서 보기까지는 어떤 사연과 추억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 책을 생각하면 그 사연과 추억 때문에 즐거워진다. 그런데 이제는 인터넷에서 몇 번의 마우스 클릭으로 배송 받을 수 있다니, 결코(?) 그러고 싶지는 않다.

 

꼭 비슷한 문제의식은 아니지만, 사회학자 서동진은 서점 가판대에 놓인 서로 다른 장정과 표지를 한 윤동주 시집을 보며 짜증이 난 경험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책이 아니게 된 책을 가리킬 적절한 말을 찾자면, 그건 아마도 시쳇말로 ‘굿즈’일 것이다. 책이 정신도, 지식도, 관념도, 감정도, 이념도, 뭐랄 것 없는, 그저 탐나는 물건으로 변신하였을 때, 오늘날 사람들이 굿즈란 말로 암시하려는 것과 맞아떨어질 것이다.... 굿즈가 된 책은, 어딘지 가지 않아야 할 세계에 발을 디딘 듯한 쓰린 기분을 자아낸다. 굿즈로서의 책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세계를 증언하는 얼룩일 것이다.” 내가 멋진 복제품으로 다시 탄생한 디지털 영인본을 보며 느끼는 쓰린 기분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다.


# 서동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굿즈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6003.html

 

하지만 서동진도 본인의 짜증이 "나이 먹은 탓"일지 모른다고 했듯이, 디지털 영인본에 대해 내가 괜한 시비를 거는 것도 어쩌면 '꼰대짓'일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젊은 세대에게는 그 같은 디지털 영인본이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시비는 여기까지, 디지털 영인본은 그냥 모른척하고 나는 내 방식대로 계속 즐겁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