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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북적거림 가득한 감옥 - 옥중만총(獄中滿悤)




이김춘택 (금속노조 마창지역금속지회)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이재유(李載裕)와 함께 '경성트로이카'를 조직해 혁명적 노동운동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했던 이관술(李觀述)은 해방된 뒤인 1946년 4월 17일 현대일보에 연재한 반일 지하투쟁 회상기의 제목을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라고 달았다. 두 번의 감옥살이와 십 년 가까운 수배생활 속에서도 활동을 계속했으니 그에게 조국의 땅은 언제나 감옥이었으리라.


일제 식민지시기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만 연인원 4만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옥살이를 했으며, 그 중 400명이 넘는 사람이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특히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뒤 1925년 11월 1차 검거사건 이후 당 재건과 검거사건을 되풀이하면서 감옥은 사회주의 운동가들로 가득찼다. 


북적거림 가득한 감옥


옥중만총(獄中滿悤)은 1930년 9월 발행된 월간지 <별건곤> 제32호에 실린 기사다. 옥중만총(獄中滿悤)이라는 제목은 "감옥 안에 북적거림이 가득하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기사는 조선공산당 사건 등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근황을 짤막한 소식으로 전하고 있다. 주로 건강상태는 어떤지, 어떤 책들을 읽고 있는지, 어떤 종류의 노역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언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게 되는지 등등의 소식이다. 


그런데 사회주의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수 년 동안 힘겨운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도 그렇게 심각하지가 않다. 심각하기보다는 오히려 곳곳에서 위트가 배어나온다. 유진희(兪鎭熙)는 감옥에서 그물뜨는 노역장 관리로 선출되어 "감옥 쏘빼트 그물부 위원장"으로 불린다고 하고, 김약(金若水)는 "박에 잇슬 때에도 약속 빠르고 매사에 약은이만큼 감옥생활도 또한 눈치빠르게 잘"한고 하며, 김재봉(金在鳳)은 "날마다 공장에 드러 가서 그 괴로운 일을 하면서도(網絲) 한학자인 구풍(舊風)이 그저 남어서 한시를 짓너라고 흥얼흥얼 한다고" 전한다. 책도 천문지리학 같은 자연과학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도교의 수운 심법강의와 서양철학사를 탐독"하는 사람도 있고, "<세계문화사대계>란 영문책 한 권을 미결때부터 이잡덧이 한자도 빼지 안코 정독"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주의혁명의 나라의 언어인 노어(露語)를 공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러나 이병의(李丙儀)처럼 "목에 종처(腫處)가 나서 이 더위 중에 고생이 적지 안코 폐가 또한 약하야 복약중"인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가장 오래 눈길이 머물게 되는 한 사람, 진주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했던 노련한 노동운동가이자 조선공산당 제2차 책임비서였던 강달영(姜達永)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정신 이상으로 고통받고 있다. 병감(病監)에서 치료를 받다가 병세가 더욱 심해져 형 집행정지가 될 뻔 했으나 차도가 있어 다시 재감(在監)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록 출옥을 한다 하야도 전일과 가튼 활동을 다시 하기는 어러울 듯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예상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1932년 겨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그는 운동 일선으로 복귀는 물론이고, 생업에도 종사할 수 없었다. 출옥한 이후에도 10년을 더 살았으나, 투옥 이전의 건강을 되찾지는 못했다. 그는 해방되기 3년 전 정신질환에서 끝내 회복되지 못한 채 사망."[각주:1]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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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만총(獄中滿悤)

 

유진희(兪鎭熙)

제1차 공산당 사건으로 4개년 중형을 밧고 이래 철창생활을 하는 유진희. 박게 잇는 우리의 상상 이외로 신체가 매우 건강하야 초강어부(楚江漁父) 모양으로 날마다 그물(網)만 뜨더니, 요새에는 또 그 그물공장의 잡역이 되엿다 한다. 잡역은 밥도 잘 어더 먹거니와 일도 편하고 그 공장내의 여러 죄수를 감독하다 십히 하는 복역인 까닭에 감옥 죄수로서는 박게 사회에서 은행회사 중역보다 더 조케 녁이는 영역이다. 그런 중에 그는 감옥 관리의 선출 즉 관선(官選)이 안이요 그 공장내 일반 정치범 및 사상범인의 공선(公選)에 의하야 피선되엿슴으로 일반 간수와 죄수들은 그를 별명하야 왈 감옥 쏘빼트 그물부 위원장이라고 한단다. 독서는 미결 때에는 경제학서류(書類)를 만히 읽더니, 근래에는 자연과학을 만히 읽는 중, 특히 천문지리학 가튼 것에 치중한다고 하고 안경은 박게 잇슬 때보다도 더 잘 써서 간수들이 『메가네』(ぬがね-안경)선생이라고 칭호를 지엿다 한다. 만기는 명년 2월 중순경.

 

강달영(姜達永)

역시 기당(其黨) 사건에 총비서로 6개년 장기형을 바든 그는 미결기 6개월 통산을 하야도 래래명년(來來明年)(소화7년) 9월에야 겨우 이 세상의 광명한 일월을 보게 된다. 그는 미결시부터 신경병으로 신음하다가 기결에는 더욱 심하게 되야 일시(一時)에는 정신에 이상까지 생겨서 누구와 말을 하다가는 픽 웃고는「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란 소리를 잘 하며 또 자기 머리 속에는 귀신이 잇는데 그 귀신을 잡아내야만 되겟다는 등, 여러 가지의 황당한 소리를 함으로 병감(病監)에 드러가 한동안 치료를 박게 되엿섯다. 그러나 역시 효과가 업슴으로 감옥에서도 최후 집행정지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의 가족에게 통지하야 부인이 상경까지 하엿더니 행(幸)인지 불행인지 그의 병이 의외로 차도가 잇슴으로 다시 정지처분을 중지 식히고 그양 재감(在監)하게 되얏다 한다. 지금은 전비(前比)하야 좀 나흔 듯 하나 여간 치료가 안이고서는 비록 출옥을 한다 하야도 전일과 가튼 활동을 다시 하기는 어러울 듯하다고 한다. 그의 하는 일도 예의 그물뜨기요, 독서는 한문 이외 불교 및 기독교서류(書類)라 한다.

 

김약수(金若水)

그는 박에 잇슬 때에도 약속 빠르고 매사에 약은이만큼 감옥생활도 또한 눈치빠르게 잘 한단다. 언제이나 간수를 잘 놀이기도 유명하지만은 동지의 죄수를 만날 때에도 남처럼 눈짓이나 입짓만으로 하지 안코 반드시 거수경례를 한다. 그래도 엇지 눈치 잇게 잘 하는지 한번도 간수에게 들키지를 안는다고 한다. 그도 일은 역시 그물뜨기요, 독서는 경제학이나 정치학보다 자연과학을 만히 읽고 얼골은 재외시(在外時)나 별로 다를 것이 업스나 전치(前齒)가 모도 몰락이 되고 금치(金齒)를 새로 해 박은 것이 전과 딴판의 일입니다. 그의 출옥기(出獄期)를 알고 십흐면 누구나 6자 석자만 잘 기억하면 될 터이니 즉 1931년 6월 6일이다. 그가 입감의 후로 가진 정성을 다하야 의복, 기타 물품 차입을 잘 하던 우봉운(禹鳳雲)씨야 누구보다도 잘 기억하겟지.

 

김재봉(金在鳳)

그는 6년의 형을 바든 까닭에 래래명년(來來明年)(소화7년) 4월에나 다시 이 세상 봄 구경을 할 것이다. 날마다 공장에 드러 가서 그 괴로운 일을 하면서도(網絲) 한학자인 구풍(舊風)이 그저 남어서 한시를 짓너라고 흥얼흥얼 한다고 한다. 그의 시를 아즉 발표치 못 함이 유감이나 가작(佳作)도 만히 잇다고 한다. 신체는 별 고장이 업스나 감정이 너무 예민하게 되야 박게 잇는 친지간에 편지 한 장이나 서적 한 책 차입 식혀 졀지 안는 것을 퍽 이나 섭섭하게 생각하고 엇던 때에는 흥분이 되야 혼자 노질(怒叱)하다가 또 비애를 한다고 한다. 평소에 그와 친한 이들은 물론이고 다른 동지간이라도 일자위문의 편지라도 하는 것이 그에 대하야 퍽이나 위안이 될 듯하다.

 

이준태(李準泰)

평소에도 침묵과언(沈黙寡言)한 그는 재감 중에도 역시 일양(一樣)인 까닭에 누구와 무슨 이약이하는 일도 별로 업다고 한다. 독서도 별로 하는 것이 업고 일은 예의 그물뜨기라는데 형기 5년에 미결기 6개월 통산을 하고 사(賜)까지 먹고 보니 출감기(出監期)는 명년 5월 중순경인 듯.

 

진병기(陳秉基)

그는 입감초부터 목공장에 드러가서 소제부(掃除夫)가 된 까닭에 감옥 생활을 편이 잘 하기로는 그 사건 입감자 중에 제일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체도 건강하닛가 형기 4년간은 무사히 잘 지내리라고.

 

박형병(朴衡秉)

은 4개년의 역役을 밧고 평양감옥에 잇는데 미결 1년 반 통산을 제하면 1932년 11월경에 출감 된다. 원래에 성격이 원만하고 유한 까닭에 고역도 잘 견듸며 건강하다고 한다. 독서는 「세계문화사대계」란 영문책 한 권을 미결때부터 이잡덧이 한자도 빼지 안코 정독하며 하는 일은 직조=가스리 공장.

 

이병의(李丙儀)

는 동년 10월경에 출감된다고 한다. 신체가 불건(不健)한 중 목에 종처(腫處)가 나서 이 더위 중에 고생이 적지 안코 폐가 또한 약하야 복약중이란다. 글은 천도교의 수운 심법강의와 서양철학사를 탐독하고 하는 일은 박씨와 동(同).

 

서태석(徐邰錫)

건강은 양호하고 공부는 노어(露語), 출옥은 명년 10월.

 

이영(李英)

명년 7월에 나오는데, 신체는 재외시(在外時)보다도 건강하고 독서는 별로 업고 일은 역시 직조란다.


전일(全一)

그는 소화10년이라야 겨우 나오게 되는데 전날 감옥경험이 잇는 이만치 안심하고 잘 지내며 신체도 건강하고 공부는 노어(露語)라고,

 

허헌(許憲)

신체는 매우 건강하야 차입의 식사도 항상 잘 하며 옥중에서도 신간회 일을 걱정하는 동시 대회를 소집하야 자기 책임을 면하여 달나고 면회하는 사람에게나 또는 서면으로 부탁 운운.

 

김준연(金俊淵)

은 판결도 멀지 안엇슴으로 장편서적은 차입할 수가 업서 단편 책인 가정매일을 본다고 하며 신체는 작년보다 매우 건강하고 다른 사람들은 차입하는 사식을 신병이나 기타 구미 관계로 10일 20일 식중절(式中絶)을 하지마는 씨는 하로도 빼지 안코 한결가티 식사를 한다고 한다. 


차외(此外)에 홍명희(洪命熹), 조병옥(趙炳玉), 이원혁(李源赫), 이관용(李灌鎔)도 신체는 모도 건강한다고 한다.


윗줄 왼쪽부터 유진희, 강달영, 김약수, 김재봉

아랫줄 왼쪽부터 이준태, 이영, 허헌, 김준연

사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ia



※ 인물소개 (이름을 클릭)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유진희  강달영  김약수  김재봉  이준태  진병기 

박형병   이병의  서태석  이영  전일  허헌  김준연


  1. 임경석,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역사비평사, 2008, 116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