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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훼방 70년 ④ : 새는 좌우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날개로 난다 - 2

 

 

최형록 (필통 필진)

 

1. 조선 역사상 엽기적 사건?

이 고통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삶 속에서 생명의 약동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어린이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깡충깡충 뛰는 듯 엇박자로 걸어가는 것이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바라보기만 하더라도 인간다움의 정수인 사랑과 자비심을 자아내는 어린이들의 그 걸음걸이. 이런 어린이, 자기 자신의 분신인 자식을 살해하는 것을 넘어 신체를 훼손해서 냉장고에 3년이나 넣어 둔 사건이 가상현실이 아니라 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더구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행동을 한 후 부부가 닭고기를 시켜먹기까지 했다니! 이 패륜의 임계점을 넘은 행위가 “분노조절장애”로부터 일어났다면 그것에 대한 넓고 깊은 설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왜 그런 분노가 일어났을까?

 

 

2. 포도⊂과일 그리고 산업화⊂민주화 

모든 범죄행위가 역사적으로 구성된 사회구성체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로부터 그 분노의 조건을 찾아야할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은 ‘자유화’다”라고 자유경제원장이라는 놈이 일등 휴지<조선일보>(2016. 01. 04일자)에서 주장하고 있다. 어린아이라도 포도와 과일의 관계는 포도가 과일의 부분집합임을 알 수 있는 관계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관계는 산업화가 포도에 상당하는 것이며 민주화가 과일에 상당하는 것이다. 나는 앞선 글[각주:1]에서 이런 왜곡이 본의 아니게 고 리영희 선생님께서 대중화시킨 재시 잭슨 목사의 경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의 정신을 아전인수 격으로 사용한 현실왜곡임을 지적했다. 이놈은 “자유 민주주의의 편향”을 지지하면서 “경제 민주화”를 반대하는 반면 “기업가의 이윤 추구 본능”을 보다 극대화할 수 있는 “경제 자유”의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치권에서 사회를 경제적 강자와 약자로 “분열”시켜서 “강자에게 투기, 과소비, 갑질, 단가 후려치기, 일감 몰아주기나 하는 비도덕적 낙인을 찍는다”고 비난하고 있다. 바로 이 일등 휴지에서 조차 사설에서 “효성 조석래 회장, 1358억 세금포탈에 징역 3년 적정한가”(2016-01-16일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이런 종류의 기업 범죄들을 “비도덕적 낙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 이다.

내가 주목하는, 월남한 후 문학을 통해서 한국사회의 모순에 고뇌해온 분 두 분이 최인훈 선생과 이호철 선생이다. 문필활동은 물론 정치적 행동도 한 이호철은 ≪남과 북 진짜진짜 역사읽기≫(자유문고 2015. 이 책의 형식은 고 정경모 선생을 상기시킨다)에서 고당 조만식을 통해서 장면내각이 “부패 무능한 정권”이라는 통설이 거짓임을 지적하고 있다. 장면 내각은 각계각층의 의견과 여론을 수렴해서 전문가들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서 정책을 입안하고 공청회를 통해 비판적 검토를 거치는 정책을 했다는 것이다.(189-192, 순천향대 김기승 교수의 논문 참고) 요컨대 민주화에는 산업화가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5-16 쿠데타 이후의 한국사를 민주화운동 세력과 산업화 세력 사이의 갈등의 역사로 보면서 그런 관점을 국정 국사 교과서에 담겠다는 것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능욕이다.


3. 사회-역사적 관점이 거세된 주류 경제학

“자유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사실은 파시스트적 언행을 하는 놈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사실은 후기 벤담은 많은 개혁을 주장했는데 그 수준이 영국의 온건 사회주의자들인 페이비언들 정도였다는 점이다. 그는 심지어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료 재판을 주장할 정도 였다[각주:2]. 2009년 이른바 선진국들이 모인 G-20 정상회의에서는 개발도상국에는 겨우 500억 달러를 지원해주는 반면 세계경제 위기의 주범들인 은행에는 “구제금융”으로 8조 4000억 달러를 지원해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경악스런 사실은 이 “구제금융”은 전세계 극빈문제를 50년에 걸쳐서 종식시킬 수 있는 엄청난 액수라는 점이다[각주:3]. 그리고 주목할 점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만이 미국의 중산층이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고 널리 유포된 통설을 반박한 점이다. 그 중산층은 1930년대 말부터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까지 형성되었다가 단 1세대 정도만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중산층이라는 포근한 삶을 끝장 낸 계기는 바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편 레이건 정권이었다. 크루그만은 소득 불평등의 원인이 대체로 “정치적인 것”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1960년대 이래 캐나다가 노조 조직율을 30%대를 유지하고 있음에 반해서 미국은 그렇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각주:4]. 미국이 이럴진대 한국은 어떨까? 중산층을 토대로 한 “중민주의”를 외치던 교수 한상진이 십자가에 매달아야했던 이승만 그리고 종군 위안부들의 원수인 바로 그 일제에 그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박정희를 참배하면서 궤변을 주절 대고 있지 않은가!

 

 

이 시점에서 짚어봐야 할 점은 경제학이 과연 얼마나 “실물경제”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고, 세상의 질서를 가지런히 하고 민중을 구한다(經世濟民 - 경제라는 용어의 원래 뜻)는 그 명칭에 걸맞은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正名)살펴보아야한다. 오늘날 주류 경제학은 수학적 도구들을 동원해서 물리학적 “균형과 적정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그런 수학의 추상적 모델 수립에나 몰두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르크스적 민주주의자들이 아니라도 크루그만은 현대 주류 경제학이 “현실 관련성”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더욱이 주류 경제학의 대부랄 수 있는 밀턴 프리드만 조차 “경제학은 경제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수학의 불가사의한 분야로 되어버렸다”고 개탄할 정도다. 벤 파인은 현 세대의 경제학자들을 박식한 듯 보이는 백치들(Idiot Savant - Savant는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암기할 수 있는 등 특정분야에 비범한 반면에 바보인 특이한 사람들로서 지능 연구의 주목대상이다)이라고 규정한다. 그의 표현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지나친 표현일까? 1990년 저서에서 클래머와 콜랜더가 미국 대학들에서 가장 우수한 5개 경제학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는 그것이 단순한 분노의 표현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직 3.4%의 학생들만이 현실경제에 관한 지식이 박사과정 프로그램에서 성공하는 데 중요하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주류 경제학을 지배하고 있는 시카고학파의 대표 주자 유진 프랭크는 “우리는 무엇이 경기불황의 원인인지 모른다 ... 우리는 그걸 이제까지 안 적이 없다 ... 경제학은 경제활동의 동요를 설명하는 데 대단히 유능하지는 않다”고 실토하고 있다.

자식을 살해한 짓을 넘어 훼손까지 하는 짐승만도 못한 짓으로 까지 나타나는 삶, 그런 삶의 조건은 이런 돌팔이 과학인 경제학-뉴욕의 월가-금권의 괴뢰인 정치권력 이 3자가 주도하는 것이다. 지난 해 파시스트놈들과 일부 자유주의자 놈들이 노벨 경제학 수상자의 저서를 저자의 뜻을 완전 왜곡해서 번역한 사악한 추태와 함께 확인 할 사실은 스웨덴 은행들이 수여하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90%가 바로 이런 돌팔이들의 대표들이라는 것이다. 크루그만은 한때 악명 드높은 Enron에 상담을 해줬으며, 재무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는 수많은 강도적 투기꾼들인 헤지펀드와 투자회사에서 일했다. 그리고 약 10 년 전으로 기억되는 어떤 수상자는 사실 상 합법적 살인-강도 놈들의 투기장 그 자체인 금융 파생상품에 관한 방정식을 만들어 낸 놈 이었는데 이런 사이비 과학으로서 경제학에 대한 수학적 모델 수립이 번성한 분야가 바로 금융 부분이다. 경제학이 이러하기에 경세제민에 필수적인 역사-사회적 시야는 사라지며 그런 만큼 민중의 취업과 관련한 불안감-분노감에는 사이코패스적으로 무감각하고 민중의 생존권적 시위에 대해서는 “감시와 처벌”의 도끼눈을 하는 것이다[각주:5].

 

 

4. 지식으로 무장한 투쟁(Informed Struggle)

자본주의 체제는 결코 인간의 숙명이 아니다. 이 악의 체제 인간다움의 깨달음과 발현의 창조과정을 가로막는 이 헬 조선은 물론 “불타는 집으로서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극복하려면 이기는 싸움 따위의 얄팍한 실용적이지만 근시안적인 사고의 함정”을 넘어야한다. “너희는 조금씩 갈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는 결의로 당면투쟁에 투철하며 그 투쟁에서 항상 교훈을 얻으려면 학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 아인슈타인이 존경했던[각주:6] 레닌이 항상 민중의 각성과 교육에 각별한 주의를 했음을[각주:7], 체 게바라가 가는 곳곳에서 교육을 강조한 일 그리고 전태일 열사가 그토록 절실하게 삶에 질문을 던졌음을  상기하고 실천해야함이 절실한 시절이다.

비좁은 감옥에서 넓디넓은 감옥으로 편지를 부치고 민중과 “더불어 숲”을 조성하고자 노력해 오신 분 신영복 선생님께서 분단이 없는 고 리영희 선생님의 세계로, 전교조가 법외 노조로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없는 정토(淨土)로, 해고라는 살인이 일어나는 일상이 허구가 되는 유토피아로 떠나셨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 작업을 하도록 부추긴 자유 경제원 원장이라는 놈도 그리고 나 역시도 그런 세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고야말 것이다. 한 세상 살아간다는 것이 마치 아침 햇살 아래 이슬(人生處一世若朝露晞 - 조식의 시에서) 같은 삶에서 이 무상한 삶에서 매 순간 짐승 같은 인간성은 비우고 “인간다움의 동물성”을 채워나가는 삶 바로 이런 삶이야말로 가장 큰 대승(大勝이자 大乘)의 길이라 확신하며……

 

 

<각주 1> 훼방 70년 ③ : 새는 좌우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날개로 난다! 
   http://gnfeeltong.tistory.com/88

<각주 2> Immanuel Wallerstein, ≪현대 세계체제≫ 제 4권, 2011, 1-19면
   http://www.amazon.com/Modern-World-System-Liberalism-Triumphant-1789-1914/dp/0520267613

<각주 3>  Ben Fine과 Dimitris Milonakis, “쓸모없으나 진리라고 우기는: 경제위기와 경제학의 특이성들”, ≪역사적 유물론≫ 19. 2, 2011, 3-31
   http://booksandjournals.brillonline.com/content/journals/10.1163/156920611x573770

<각주 4> 폴 크루그만,  “소득 불평등과 중간계급들” 
   https://youtu.be/5kwA-CwFK5A

<각주 5> 진보넷 속보란 46831, “사이코패스들, 경제민주화의 적들”, 2013. 10. 19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cool&id=46831

<각주 6> 진보넷 속보란 46684, “카이스트, 아인슈타인의 心心山川을 본받으라!”, 2013. 09. 28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cool&id=46684

<각주 7> Tamas Krausz, ≪레닌의 삶을 재구성하기: 지성에 관한 전기≫, 먼슬리 리뷰 출판사, 2015
   http://monthlyreview.org/product/reconstructing_len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