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필통 필진)
민주화 운동의 중대한 성과들 중 한 가지인 민주노총의 선출된 위원장 한상균 동지가 “소도”(蘇塗)인 조계사에서 신도들 몇 명의 강압으로 축출당할 뻔 한 일이 발생했다. 일단 그 반 보살적 파계는 일시 중단되었지만.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고 병문안 온 사리불 존자에게 유마거사가 이렇게 말했음을 ≪유마경≫은 전하고 있다. “이제까지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공산주의자 선언≫이 시작하는 바를 모른다면 나아가 더욱 중요한 점은 그 정신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가 강압하는 허망한 삶을 돌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적 민주주의자”라고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격언을 모르고 나아가 그 ‘자비심’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불교도라고 할 수 있을까!
정략적인 거짓 민생론
과연 이 나라에는 토론을 해서 이해관계를 조정-합의하는 기구로서의 의회가 있는 것인가? 3권 분립은 학생들의 시험 정답으로만 존재하며 현실은 표독스런 파시스트 행정부에 입법부와 사법부가 귀걸이로나 있는 1.2권 분립이 아닌가? 참다 참다 더 이상 “인간적으로 몸”이 견딜 수 없어 헌법적 권리인 “집회 시위의 자유”를 행사하는 민중을 범법자로 모는 파시스트적 작태를 넘어 총기발사를 내뱉는 놈까지 있지 않은가? 부마항쟁 때 발포하자고 했다는 역도 박정희의 충견 차지철이라는 놈 현재 유럽의 시리아 난민을 초래한 대통령 아사드 라는 놈과 다를 바 없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능지처참할 놈까지 나오고 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사진=연합뉴스)
정말 한국사회가 “민주화 세력 대 산업화 세력 사이의 갈등의 역사”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민주화 세력은 언제 산업화를 경제성장을 주장한 적이 없고 밥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유령이란 말인가? 천추의 한을 품고 이승을 강제로 떠난 죽산 조봉암이 토지개혁을 주장한 것은 경제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고 박현채 선생의 ≪민족 경제론≫ 마르크스의 ≪자본≫을 번역한 고 김수행 선생의 뜻이 “민생”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인가? 문제는 어떤 민생 어떤 경제성장 어떤 산업화 그리고 누가 주체인 민생-경제성장-산업화가 아닌가?
시대착오적인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는 바로 이런 “민주화 세력 대 산업화 세력 사이의 갈등의 역사”라는 거짓 논리, 파시스트-파시스트의 종범(從犯)인 일부 자유주의자 놈들의 궤변의 연장선 위에 있는 개수작이다.
놀부가 꺾어버린 왼쪽 날개
이런 기만적 논리 삶의 조건을 파괴하고 삶의 의미를 축소-왜곡하는 인식 때문에 본의와 전혀 달리 “인식의 파생상품”을 낳은 논리가 무엇일까? 생각하건대 그것은 나 역시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리영희 선생의 명언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논리다.
이 명언의 원작자는 미국의 유명한 진보적 목사인 제시 잭슨이다.(≪리영희 저작집 8: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한길사, 2010년, 23면~25면) 잭슨은 우파가 “좌”라고 비난하자 “...하늘을 나는 저 새...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소?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 크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이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리영희 선생이 이 멋진 재치가 번득이는 은유(Metaphor)를 회자시킨 맥락은 8-15 이후 오른쪽은 신성하고 왼쪽은 악하다는 “위대한 착각 속 삶”에 경종을 울리려는 동기였다.
(사진=JTBC)
만민공동회 이래 해방 직후 약 1년간 그리고 4-19 유산된 “혁명”기 1년을 제외하고는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지극히 불안하고 견고하지 못한 승리의 중대한 과실로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기 전까지 거의 90년 가까운 세월 벙어리 냉가슴 앓고 귀머거리 답답한 가슴 앓던, 일제와 “자유 민주주의의 탈을 쓴 파시스트”의 야만의 거친 숨결이 헉헉 거리던 사회에서 국보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깊은 용기로 참 언론을 실천해온 리영희 선생의 고통과 크나큰 공적을 잊지 않되, 이제 이 크나큰 메아리를 낳은 격언을 재고할 때가 아닐까? 절대빈곤에 생존권적 저항을 하며 민주노총의 모태가 된 전노협을 파괴하려는 시대, 전두환 정권이 “보도지침”을 통해서 언론자유를 질식시키려던 시대, 그런 시대의 정치-문화적 역학관계라는 역사적 맥락을 생각할 때 이 은유는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경구-슬로건 이었다.
≪우상과 이성≫으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직시하도록”한 리영희 선생이 취한 이 경구는 이제 다른 의미에서 “우상”으로 성장-전화(轉化)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통념과 달리 은유는, 이와 같은 개념적 은유(Conceptual Metaphor)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기제다.(George Lakoff와 E. Nunez, ≪수학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베이식북스, 2000) 라코프는 가장 기본적인 수학적 착상들(Ideas) 대다수가 내재적으로 “은유적”이며 이성은 전적으로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대체로 무의식적”이며 순전히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대체로 “은유적이며, 상상력 넘치는 것”이며 덤덤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George Lakoff, ≪육신 속에 있는 철학≫, 베이식북스, 1999년) 이 경구는 냉전 반공논리가 정의감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상상력이 충만한 이성이 정치-문화적 분출을 하던 창조적 해방정국을 깔아 뭉개버려 온 남한의 역사 속 세력관계를 깊이 성찰한 결론을 멋지게 포착하고 있는 경구로 회자시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고 리영희 선생님께서 대화하고자 다가오셨으나 결실 있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던 인연을 만들지 못한 중대한 이유는 1992년인가 1993년 소련이 붕괴한 후 서강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드러난 그의 사회주의관 그리고 인간관이었다. 선생은 “자기희생적인 이른바 ‘사회주의적 인간’이 왜 안됐느냐? 라는 의문과 생물학적인 인간의 속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리영희 저작집 11: 대화≫, 한길사 2006, 651~657) 그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가 앓는 사회적 암 치유제 라고 규정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절한 배합이 상대적으로 바람직하며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바로 그런 것이며 법률이나 종교가 아무리 해도 인간의 소유욕을 다스릴 수 없음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리영희 선생 그리고 그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새”를 상상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대한항공” 그 자체가 아닌가? 과연 이 “칼”이 좌우의 날개로 나는 새로 변태할 수 있을까? <한겨레 신문>이나 <경향신문>을 1주일만 읽어보면 아니 12월 5일로 예정된 민노총 등 제 민주단체들의 평화집회를 원천봉쇄하며 참가자 전원을 체포하겠다는 이런 경찰국가에서 정치적 타협이 가능하며 그렇게 할 경우 노예적 타협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느님이 아니라 민중이 마르지 않도록 보우해야할 질문들
고 리영희 선생의 이런 결론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며 그런 만큼 패배주의적이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마르크스적(Marxian) 민주주의자들”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의 원인을 다각도로 탐구하고 있다. 찬찬히 두 가지를 반드시 생각해보아야하지 않을까? 첫째 “눈물의 계곡”이 깊고 깊은 만큼 교회 첨탑이 많은 한국사회에서 조용기 목사나 한경직 목사 류의 파시스트적-신자유주의적 “예수사랑”이 있는가 하면 마르크스 사상을 수용한 남미 해방신학을 실천한 현 교황 성 프란치스코에 열광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지배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의 사상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스탈린주의를 축으로 삼은 사회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산상수훈으로부터 2000년이 지나도록 예수와 뛰어난 신학자들의 사상을 나침판으로 삼아 이 “고해”를 항해하는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반자들은 “달을 보지 못하는 몽상가들”인가? 그렇지 않다면 왜 겨우 167년 정도 밖에 안 된 젊디젊은 사상을 유토피아로 바닥 짐(Ballast)처럼 버려야할까?
둘째 인간은 과연 어쩔 수 없는 “이기적 짐승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새는 중력에 저항하는 양력으로 창공을 날아다니며 인간은 이런 자연의 힘들을 이성적으로 파악하여 꿈같은 인위적 새-비행기를 발명하지 않았는가! 나아가 중력을 9.8km/초 이상으로 날 수 있는 과학과 기술력으로 지구 밖을 비행할 수 있는 경이로운 문명을 이룩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인간에 대한 이해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시대에 비해서 더욱 확장되고 깊어져가고 있다. “인지과학 혁명”을 둘러싼 탐구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는(Trans-Disciplinary) 연구들, 진화론에 대한 다각도의 질문을 던지는 연구들, 인간의 비-반 합리성을 밝혀내는 행동 경제학, 영장류 연구 등등의 연구 성과들에 무지한 것이 이 시대 패배주의의 구성요인들 중 중대한 것이다. 인터넷과 유튜브라는 “정보-지식 혁명”의 시대에 경악스런 일이 아닌가! (최형록 “새로운 변혁주체의 형성”, ≪다윈과 함께≫, 김세균 엮음, 사이언스북스, 2015 참고)
인간 역시 동물계(Kingdom Animalia)의 일원으로서 진화의 오랜 과정에서 짐승으로서 생존을 위한 “이기심”을 형성해왔으나 그것이 인간성의 총체는 결코 아니다. 오늘날 다윈주의자들 내에서는 자연선택만이 아니라 “사회적 선택”론 역시 근거를 확보해나가고 있음은 역사적 사회 구성체의 하나로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이성적-정서적 근거다. 인간다움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온전히 구비하며 그런 한편 불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다움이란 짐승성을 능가할 수 있는 “행동적-상징적 유전체계”를 내장하고 있으며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다움”을 부단히 창조해나가는 과정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는 허무맹랑한 통념 역시 박살내버려야 한다. 이런 입장야말로 부르주아 계급의 실증주의적 관점이며 역사란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패배주의적 역사관이다. 이성적인 역사적 가정이란 승리할 수도 있었던 실패, 현재적 미래로서의 꿈-초현실주의에 후퇴해 있는 잠재력을 초혼(招魂)하는, 물망초(Forget-me-not)를 꽃 피우는 “정치적 동물”다운 지적 행위다!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자유(La Liberte)와 평등(L' Egalite)의 날개로 훨훨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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