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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훼방 70년 ⑥ : 육아-정치-사회적 재생산


최형록 (필통 필진)


11세 소녀가 부모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추락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정을 탈출, 편의점에서 과자를 먹는 사건, 생후 겨우 3개월인 딸을 폭행해서 방치해 숨지게 한 부부, 초등생을 아내가 “공부학대”한 까닭에 남편이 이혼소송을 제기 승소한 사건 등등. 인간에 가장 기본적 사회단위인 가정의 붕괴가 심각한 상황이다. 보건복지부 등의 통계에 따르면 아동학대는 2010년 5657 건이었던 것이 매년 증가해서 2014년 1만 27 건에 이르렀다.(주1)


공자의 격언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사회적 재생산

왜 이런 늑대 보다 못한 만행이 발생하며, 어떻게 사회의 축도인 가정의 붕괴를 극복할 수 있을까? 공자의 격언이 생각난다. “자신의 인격수양을(修身) 하고, 가정의 질서를 바르게(濟家)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천하를 평안하게(平天下) 만든다.” 표현은 점증법적이지만 이 네 가지에 우선순위는 없다. 1200조에 이르는 가계부채는 대기업 위주의 은행제도 그리고 국토의 75%가 산인 나라에서 부동산 투기를 “창조경제”의 정책이랍시고 추진하는 같잖은 국가 경제정책에 그 원인이 있으며 부부 갈등의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가 아닌가? 나아가 그 부채는 미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가 결정하는 금리의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사회적 삶의 상이한 수준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제가는 수신-치국-평천하와 분리해서 이뤄질 수 없다.



이런 삶의 조건 속에서 삶에 보람이 있는 목표를 추구해 나가는 개개인은 어떤 사고방식과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가계부채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현명한 해결책을 모색할 것이다. 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조건에서 여전히 근대적 국민국가가 개개인의 세계관에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틀(Frame)을 부과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es)다. 요컨대 공자의 격언은 바로 이 사상으로 현대적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그 긍정적 뜻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킬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란 가정-학교-교회-사법기구를 주요 구성부분으로 하는데 한국의 경우 교회뿐만이 아니라 불교의 사찰 역시 포함한다.


사회적 재생산과 육아방식 그리고 정치 지향 

이런 자본주의적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문제의식의 틀에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쟁점은 육아 방식과 정치적 관점의 밀접한 관계다. 장경섭 교수는 한국 가족의 이념을 유교적-도구주의적-서정주의적-개인주의라고 규정하면서 이런 가족 이념들의 혼합성을 지적하고 있다.(주2) 이런 이념적 규정을 수용하면서 육아 방식과 결부해서 그 정치적 지향성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육아를 일상적으로 하는 대한민국 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엄마는 아이들을 삼키고 있으며 아버지는 찌질한 정처 없는 사람들이다.(주3) 이런 부모상은 기본적으로 중간계급에 속하는 부모들인 것 같으나 장 교수가 지적한 한국 가족의 이념들 중 특히 중요한 성격이 유교적-개인주의라고 할 때 이런 부모상은 한국 사회에 일반적인 것이라고 보아도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다. 2010년 여성 가족부의 전국 가족실태 조사에 따르면 아빠를 대화 상대라고 답한 아이들은 0.9%에 불과하며 “부모 안티 카페”에는 부모들에 대한 육두문자가 버젓이 올라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 가정은 정서적 소통과 지지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형해화한 가족의 심각한 소외 상황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 네 가지 육아 방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주4) 첫째 “무시형” 육아방식이다. 핵심을 피해서 아동의 감정 표현을 봉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동의 느낌은 비합리적이므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동이 부정적 감정을 보이면 적응을 잘 하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이런 부모들은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양육된 아동은 자신의 감정 규제에 어려움을 겪는다. 둘째 “부인형” 육아 방식이다. 이것은 “무시형”과 많은 점에서 동일하되 보다 부정적 경향을 보인다. 아동에 대한 한계 설정이 지나쳐서 부모가 좋다고 생각하는 표준에 적응할 것을 강요한다. 아동이 부정적 감정을 이용해서 부모를 움직이려한다고 믿기에 부모-자식 간 일종의 권력투쟁을 초래할 수도 있는데 권위에의 복종을 강요한다. 그런 한편 생존을 위해서 아동을 감정 차원에서 거칠게(Tough) 키운다.

대략 1980년대 광주민중항쟁 시기에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를 겪은 세대 이전 한국 부모들의 육아방식이 이런“부인형” 혹은 “무시형”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육아방식은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파시즘의 득세를 “권위주의적 가부장제”와 결부시켜 이해하려한 시도를 생각할 때 아동의 정치적 지향성을 반 민주적 파시즘 혹은 권위주의 체제 친화적으로 형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에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대략 419 미완의 시민혁명 이래 자유주의적 경향 그리고 1980년 광주의 “핏빛 5월” 투쟁 이래 주체 사상적 경향 그리고 부활한 마르크스적 경향 이 3대 정치적 정향성(Orientation)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경향이 여성주의 운동이다. 이 획기적 운동은 가부장적이며 봉건적 경향이 주조를 이뤄온 유교적 남녀 차별을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혹은 보다 발본적(Radical)으로 극복하고자 분투했다. 이런 반 독재적 이질적 경향은 무시형과 부인형에 대한 강력한 저항으로서 특히 자유주의적 여성주의와 화학적 결합을 해서 셋째 육아 방식 “자유방임형”을 지배적 방식으로 만들었다. 어떤 억압도 없이 아동의 모든 감정표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만큼 아동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반면 아동에게 어려운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도를 애써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결과 아동이 자신의 감정을 규제할 줄 모르며 정신집중에 그리고 교우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천민자본주의 정권의 반민주적 계급성 그리고 그 무능한 무책임성에 따른 세계 최저의 출산율 등등은 이런 육아방식과 화학적 결합을 하여 오늘날 극단적 교육-사회적 문제들을 낳고 있지 않은가? 이런 육아 방식은 사유재산제를 신성불가침으로 하는 자유주의 정치 지향성을 양산-강화하고 있다.

넷째 “감정 유의형” 육아방식. 이 방식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현실화할 수 있는 “감정과 이성을 조화”시키는 현명한 육아방식이다. 이것은 아동이 어떻게 느껴야하는 지 강요하지 않으며 아동의 감정을 존중한다. 아동이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순간마다 자기규제를 배울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여 감정 표현을 적절히 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이런 육아방식은 “무시형”이나 “부인형” 의 경우처럼 부모-자식 간 대화의 부재라는 질식할 것 같은 반 이성적-억압적 인간관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동시에 “어 하게” 키우는 “자유방임형”의 이기적이며 개인주의적 인간성 역시 극복할 수 있는 육아방식이 아닐 수 없다.

 

민주화 투쟁의 도덕적 힘과 감정 유의형 육아방식

반민주 대 민주의 투쟁 구도가 생명을 다 했다고들 한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이런 상황 판단은 자유주의적이다. 절대 빈곤을 벗어나고 기본 인권이 법 형식적으로는 확보되었으나 그 실질성은 여전히 절박한 투쟁을 요구하는 황무지 영역에 속해있다. 역도 박정희의 노선이 유일한 방도였다는 너절한 역사관, “좌파의 무능”을 주절대는, “나무의 공양”을 헛되이 만드는 비열한 자기기만과 자기 합리화는 우리 역시 겪어야 하는 민주화 대장정의 한 경과 지점일 것이다. 무엇보다 “세월호의 침몰”은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가소로운 인식을 정면 직시할 것을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고 있다.



정치의 윤리성이 비웃음을 사고 인륜이 땅에 떨어지는 그 중력은 무엇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인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리고 사회적 인간관계 바로 그것이다.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와알은 도덕의 두 기둥으로 상호성에 입각한 공정성 그리고 감정이입에 입각한 자비심을 거론한다.(주5) 앞에서 짤막하게 거론한 육아방식들 가운데 어떤 방식이 이런 도덕성 함양에 딱 들어맞을까? 나는 드 와알의 두 기둥에 이성적 용기를 추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험을 통해서 카푸친 원숭이 사회에서도 공정성이 중시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이 정당함을 표명한다. 감정에 유의하는 육아방식”을 통해서 아동의 뇌신경 세포들은 파시스트들과 자유주의자들과 다른 시냅스 구성이라는 민주주의 전진에 부합하는 유물론적 토대를 구축할 것이다.(주6)

“무지한 조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어린이들의 얼굴에 슬픈 빛을 지어주느냐”고 한탄한 소파 방정환의 고뇌(주7)를 기억의 박물관으로 보내버려야 부모 노릇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닌가?!

 

<주>

1. <법보신문>, 2016-03-23일자, 26면. 최호승 기자의 칼럼.

2. 장경섭, ≪가족 ․ 생애 ․ 정치경제: 압축적 근대성의 미시적 기초≫(창비, 2009), 98~114쪽.

3. 이승욱 ․ 신희경 ․ 김은산, ≪대한민국 부모≫(문학동네, 2012), 84~139쪽.

4. John Gottman, ≪Raising an Emotionally Intelligent Child: The Heart of Parenting≫(Simon & Schuster, 1997). 50~63쪽.(국역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한국경제신문, 2007)) 그리고 Polly Young-Eisendrath, ≪The Self-Esteem Trap≫(Little Brown and Company, 2008), 30쪽. 올바른 자존심(Self-Esteem)은 항상 감정 차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현명한 관계를 맺는 지 여부에 좌우됨을 지적하고 있다.

5. Frans de Waal: Moral behavior in Animals, TED lecture 2012-04-10 게시.

   http://www.ted.com/talks/frans_de_waal_do_animals_have_morals

6. “훼방 70년 ⑤: 선낭(選狼)들 대 혁명적 사고틀과 슈퍼 거울 신경세포”참고.

   http://gnfeeltong.tistory.com/112

7. 방정환, ≪어린이 찬미 외≫(종합출판범우, 2006), 27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