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김춘택 (거제통영고성 조선소 하청노동자 살리기 대책위원회)
서른여덟 앞길 창창한 젊은이였다. 아홉 살, 일곱 살, 다섯 살 세 아이의 아빠였고 든든한 남편이었다. 병역특례로 시작해 조선소에서만 이십 년 잔뼈가 굵은 노동자였다. 그 대부분을 ‘빅쓰리’ 조선소 중 하나인 거제 삼성중공업에서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로 일했다. 스물다섯 살에 최연소 반장이 되어 주변에 화제가 되었을 정도로 일 하나 만큼은 자타가 인정하는 A급 기술자였다. 현장 관리자인 반장 직책을 가졌지만 회사에 바른 말 할 줄 알고, 반원들은 끝까지 챙겨서 선후배 동료들로부터 신망 두터운 노동자였다.
그도 다른 노동자들처럼 일벌레였다. 평일엔 늘 9시 30분이 돼서야 집에 왔다. 토요일은 항상 일했고 일요일도 일하는 날이 많았다. 곱빼기 연속 철야로 한 달 400시간을 넘게 일한 적도 있다. 세 명의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지 못해서 늘 미안해했다. 그렇게 밤낮 없이 일했지만 불안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졌다. 특히 삼성중공업을 비롯한 ‘빅쓰리’ 조선소가 엄청난 적자를 내면서 일터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다. ‘상시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직도 ‘상시 해고’ 되는 상황에서 사내하청 노동자인 그가 불안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TV와 인터넷에서는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넘쳐났다. 구조조정이 인원 축소를 의미한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부산에 사는 누나가 오랜만에 전화해서 “일요일에 아이들 데리고 한 번 다녀 가”라고 해도 “요즘 조선소 분위기가 안 좋아서 회사 빠져서 밉보이면 구조조정 대상자가 될지 몰라서 안 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4월 29일 고인이 누나와 주고받은 카톡. 구조조정이 예견된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내하청업체에 ‘본공’이 줄어들고 ‘물량팀’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이 힘들어 사람은 구하기 어렵고 물량은 처내야 되니 물량팀 고용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작년 말부터 회사에서는 그가 일하는 취부 1반과 취부 2반을 하나의 반으로 통합한다는 이야기가 간간히 흘러나왔다. 두 개 반을 하나로 합치면 당연히 반장 한 명은 필요 없어질 것이기에, 반장을 맡고 있는 그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만약 소문이 현실이 된다면 자신보다 연장자인 취부 2반 형님에게 통합 취부반의 반장을 양보하겠다는 마음은 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소문으로 끝나기를 바랐다.
오랜만의 3박4일 가족 나들이의 결과는 직책 강등, 보직 변경, 임금 삭감
박근혜 대통령이 5월 6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해 생각지도 않았던 4일 연휴가 생겼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임시공휴일 지정을 요청했다는데, 경제인단체가 공휴일 지정을 요청했다는 것도 뜻밖이고 대통령이 그 요청을 선뜻 받아들였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다행히 사내하청업체들도 유급휴일로 한다고 하니 반대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5월 5일 어린이날은 특근을 하고 저녁에 모처럼 다섯 가족이 가까운 문화관광농원으로 3박4일 캠핑을 갔다. 언제 회사에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안감에 멀리 가지는 못했지만 정말 오랜만에 해 보는 가족 나들이였다. 그렇게 5월 6일, 7일, 8일 꿀같은 휴식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냈다.
하지만 쉬는 3일 동안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휴식 첫날인 5월 6일 아침 7시 30분부터 상사인 직장이 현장 관리자들의 그룹채팅방에 심한 질책성 톡을 올렸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똥딲어 줘야 되는지 이리 바쁘다고 난린데 취부 반장들은 한 명도 안 나오고 사람 바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책임을 지고 그만두니까 알아서들 해라” 그러면 그렇지, 회사에서 하루라도 맘 편히 쉬게 놔둘 리가 있나 씁쓸했다. 책임을 지고 그만둔다는 직장의 말은 한 번 해보는 소리겠거니 생각하고 넘겼지만, 월요일 출근하면 욕 꽤나 먹겠다 싶었다.
(오랜만의 가족캠핑 첫날 아침 회사 상사가 집단채팅방에 올린 카톡)
그런데 3일 쉬고 월요일 출근했을 때 상황은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간간이 소문만 들리던 취부 1반과 2반의 통합이 느닷없이 실시됐다. 아무런 사전 통보가 없던 일이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그는 반장 직책을 잃었다. 취부 1반 반장에서 물량팀을 관리하는 물량팀 조장으로 직책도 강등되고 보직도 변경됐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반장은 월급제이지만 조장이 되면 시급제로 바뀌어 임금도 삭감된다. 왜 갑자기 회사에서 이렇게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에서 정한 임시공휴일에 일하지 않고 쉰 것이 이 정도로 큰 잘못인가 억울했다. 회사의 갑작스런 처사는 누가 봐도 ‘불이익을 감수하고 계속 일 하든가, 싫으면 나가든가 알아서 하라’는 얘기였다.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하루아침에 이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지 모멸감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또 자신이 반장으로 일하던 취부반과 물량팀과는 업무상 경쟁관계에 있게 되는데 물량팀 조장이 되어 그동안 함께 일하던 취부반원들과 껄끄러운 관계가 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조선소가 어려워지면서 원청인 삼성중공업에서 하청업체들에게 물량팀부터 내보내라고 공문으로 지침을 내렸다는데, 물량팀이 다 나가고 나면 물량팀 조장은 쓸모없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도 컸다.
그래서 회사의 부당한 처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직책도 떼이고, 임금도 삭감되고, 불안정한 자리에서 일을 하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회사를 그만 두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이라도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차라리 회사를 그만 두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퇴근할 때 사직서를 들고 집에 와서 아내와 의논했다. 퇴직금과 이번 달 월급 나올 테니 다섯 식구 한두 달은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기능 정도면 당장 삼성중공업의 다른 사내하청업체로 옮기는 건 쉬운 일이지만, 조선소 사내하청업체끼리는 서로 담합해 옮기기 전 업체에서 ‘취업 동의서’를 써 주지 않으면 업체를 사직하고 6개월 동안은 다른 사내하청업체로 취업을 할 수 없었다. 명백한 불법이지만 대형 조선소에서는 불문율처럼 존재하는 관행이었다. 결국 다른 조선소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행이 인근 대우조선해양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 새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 깨끗하게 그만두는 거야.” 그는 결심을 굳히고 사직서를 썼다.
다음 날 그는 느지막이 출근해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막상 그러고 나니 회사에서는 오히려 사직을 만류하고 붙잡았다. 물량팀 관리 업무로 가는 건 변함없지만 반장직은 떼지 않고 유지시키고 임금 삭감도 없는 일로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기쁜 게 아니라 더 화가 났다. 아니 이럴 거면 왜 그렇게 부당하고 불이익한 조치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던가. 부당한 대우를 해도 다섯 식구 생계 때문에 감내하고 받아들일 거라고 계산산 것은 아닌가. 그래놓고 막상 사직하겠다고 하니까 손바닥 뒤집듯이 새로운 제안을 하는 회사에 대한 배신감만 더 커졌다.
소박한 계획들, 뜻밖의 죽음
사직서를 내고 일찍 퇴근해 아내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한 일이라고 서로 위로했다. 새 일자리를 구하며 잠시 쉬면서 그 동안 놀아주지 못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십여 년 전 돌아가신 형님 기일에도 최근 몇 년 동안은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찾아뵙지 못했는데, 형님 유골을 뿌린 부산 황령산에라도 아이들 데리고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기분 전환도 할 겸 아내와 미용실에 가서 머리 염색도 하기로 했다. 하지만 “개같이 일했고, 개같이 쫓겨났다”는 마음을 끝내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저녁엔 취부반원들과 마지막 회식을 했다. 평소 형님들 앞에서는 좀처럼 속내를 밝히지 않는 성격이라 회사를 그만두고 마지막으로 하는 회식자리에서도 별 이야기는 없었지만, 1차가 끝나고 친한 동생 몇 명과 남은 자리에서는 그동안의 괴로웠던 마음을 비추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회식 자리가 파하고 새벽 1시쯤 집에 돌아왔다. 아이들을 사이에 두고 아내와 함께 누워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내는 먼저 잠들었다. 그랬는데, 다음날 새벽 그는 아파트 욕실 수건걸이에 때타올로 목을 매어 숨진 채 발견됐다. 왜 그랬을까. 모처럼 아이들과도 많이 놀아주기로 했는데, 그 동안 못 찾아뵌 돌아가신 형님도 찾아뵙기로 했는데. 왜 그랬을까. 자존심을 지키려고 정작 회사에 사직서를 냈지만, 그 과정에서 겪은 모멸감과 배신감, 상실감과 불안함을 끝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회사는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조직을 변경했지만 아직은 일감이 충분히 남아있어 인력감축을 할 상황이 아니었으며, 구조조정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다. O씨 등 직원 누구에게도 사직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O씨는 회사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직서 내는 것도 적극적으로 말렸다”고 말했다.(경향신문 기사) 회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도대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그가 느낀 모멸감과 배신감, 상실감과 불안함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단 말인가. 회사 관계자가 장례식장에 와서 처음 한 말은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사과나 유족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밥그릇 가져다 줄까요?"였다. 이 말에 그의 죽음을 대하는 회사의 태도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세 아이와 함께 남겨진 미망인은 이 같은 회사의 책임회피에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것도 견디기 힘든데, 회사의 책임회피에 남편의 죽음이 왜곡되고 매도되는 것은 더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미망인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 회사가 책임지고 진정한 사과를 하기 전에는 장례식을 치르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지금 관에 뉘어져 거제 백병원 냉동고에 있다.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 그를 믿고 따랐던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이 장례식장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삼성중공업일반노조 김경습 위원장과 ‘거제통영고성 조선소 하청노동자 살리기 대책위원회’도 유족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다. 서른여덟, 한창 나이에 짧은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난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어떤 모습으로 마지막 이별을 하게 될까.
중국 자본의 ‘먹튀’와 회사의 회계조작으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당하는 과정에서 스물여덟 명이 목숨을 잃었다. 얼마 전 총선이 끝나자마자 정부와 채권단은 매일매일 ‘사람 자르는 구조조정’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으며 언론은 거제 통영 고성 지역에서 앞으로 이만 명 이상의 하청노동자들이 해고될 것이라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될지 짐작하는 것조차 두려운 일이다. 더 이상의 비극을 조금이라도 멈추기 위해서는 ‘사람 자르는 구조조정’을 중단시키기 위해 더욱 열심히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는 모범답안이 당장의 상황에 대한 위로나 희망이 되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 답을 붙잡고 그 답과 씨름하는 방법뿐이다.★
※ 이 글은 참세상, 프레시안, 오마이뉴스에 함께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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