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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노동단체 ‘조선노동공제회’ 창립 강연‧야학 개설…잡지‧기관지 발행 노동자·소작인 조직화…전국 46개 지회 6만여 회원 3.1민족해방운동 이후 민중의 힘을 발견한 운동세력들은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조직 건설은 두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고, 하나는 민중이 주체가 되어 밑으로부터 조직 건설의 흐름이 이어진 것이다. 임시정부는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등이 설립했으나 친미외교로 독립을 이루려는 노선과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이루려는 노선이 함께할 수는 없었다. 임시정부는 거창한 이름을 달았지만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 조직이었다. 이와 달리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이 억눌림에서 벗어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조직을 만드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었다. 3.1운동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 더보기
1948년 4월3일 제주 무장봉기 “앉아서 죽느니 일어서서 싸우자” 제2차 미소공위 결렬 후 미국은 한반도문제를 UN에 상정했다. 1948년 2월26일 UN 임시총회에서 “UN 한국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안이 채택됐다. 이즈음 제주도에서는 미군정의 탄압이 거셌다. 1월22일 제주 CIC(미군방첩부대)는 “제주경찰이 신촌리에서 열린 남로당 조천지부 회의장을 급습, 106명을 검거하고 폭동지령 문건 등을 압수했다”고 보고했다. 2월11일에는 경찰이 “2.7 사건 여파로 제주에서 방화 1건, 테러 9건, 시위 19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으며 3일 동안 290명을 체포했다. 2월 말 남로당 제주도당 임원들의 ‘신촌회의’에서 강·온파의 논쟁 끝에 12대 7로 무장투쟁 방침이 결정되됐다. 3월15일 전남도당 .. 더보기
1947년 3.10 제주도민총파업 “조선에서 처음 보는 관공리의 총파업” 1947년 3월1일은 제주현대사에서 분수령으로 기록될 만한 날이었다. 3.1절 28주년 기념식을 맞아 제주도 좌익세력이 주도한 시위에서 군정경찰이 발포하면서 빚어진 이날의 사건은 주요한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해 ‘조선에서 처음 보는 관공리의 총파업’(당시 자료)이 시작되었고, 군정당국은 이에 맞서 지원경찰과 서청 등 우파 청년단체원들을 제주에 대거 내려 보내 물리력으로 검거공세를 폈다. 미군정과 제주도 좌파세력이 전면 대립국면으로 돌입했다. 결국 3.1절 발포사건은 ‘4.3항쟁으로 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3.1절 발포사건으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에는 초등학생과 젖먹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