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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1947년 3.10 제주도민총파업

 

“조선에서 처음 보는 관공리의 총파업”

 

1947년 3월1일은 제주현대사에서 분수령으로 기록될 만한 날이었다. 3.1절 28주년 기념식을 맞아 제주도 좌익세력이 주도한 시위에서 군정경찰이 발포하면서 빚어진 이날의 사건은 주요한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해 ‘조선에서 처음 보는 관공리의 총파업’(당시 자료)이 시작되었고, 군정당국은 이에 맞서 지원경찰과 서청 등 우파 청년단체원들을 제주에 대거 내려 보내 물리력으로 검거공세를 폈다. 미군정과 제주도 좌파세력이 전면 대립국면으로 돌입했다. 결국 3.1절 발포사건은 ‘4.3항쟁으로 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3.1절 발포사건으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에는 초등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날의 발포는 위협 수준을 벗어난 것이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식산은행 앞 노상이나, 도립병원으로 가는 골목 모퉁이에 쓰러져 있었다. 도립병원의 검안 결과 희생자 중 1명을 빼놓고 나머지는 모두 등 뒤에 총탄을 맞은 것으로 판명됐다.

 

3.1절 기념식 발포사건으로 시작, 4·3항쟁으로 가는 도화선

1947년 3월10일부터 제주도에서는 한국에서 유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관공서뿐만 아니라 통신기관, 운송업체, 심지어는 미군정청 통역단 등 공무원과 회사원, 노동자, 교사, 학생까지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었다. 이 파업은 경찰의 3.1 발포 등에 항의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3월10일 정오 제주도청에서 직원 간담회가 개최됐다. 이 간담회를 통해 3.1사건진상조사단에 진상보고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즉각 청원廳員대회를 소집했다. 오후1시 박경훈 도지사와 김두현 총무국장 등을 비롯한 100여 명의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도청 청원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제주도청 3.1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리고 하지 중장과 스타우트 제주군정장관에게 보내는 6개항의 요구조건을 결정하고 “이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제주도청 청원 140여 명은 사무를 중지한다”는 파업 결의를 했다. 제주도청의 파업 성명서 요지는 다음과 같다.

“과거 3.1운동은 조선민족이 다 같이 조국을 찾고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학무도한 탄압과 지도층의 미약한 일제와의 타협적 태도와 당시 국제정세의 불리로 말미암아 허다한 희생자만을 내고 실패에 귀歸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거 3.1운동을 회상할 때 감격과 새로운 희망에서 해방 후 3.1운동을 민족독립 전취에로 옮길 단계임을 자각함과 동시에 과거의 선배를 추모하기 위하여 제주읍의 기념행사는 3만 대중이 모인 가운데 엄숙한 식을 거행하고 평화와 질서 있는 행렬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포악한 경관의 불법 발포로 인하여 6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중경상자를 내게 되었음은 역사적 시일是日을 모독하고 민족적 이념마저 상실한 탄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평화군중에 대한 발포는 과거의 역사에 유례가 없으며 일제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포악이요, 해방된 조선에 있어서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우리는 여사한 현실을 일관할 때 허다한 모순당착이 내포하여 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30만 도민의 충실한 공복으로서 냉정한 입장에서 고찰하고 선량한 인민과 더불어 그 진두에서 용감히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성명한다.”

요구조건은 ①민주경찰 완전확립을 위하여 무장과 고문을 즉시 폐지할 것 ②발포책임자 및 발포경관은 즉시 처벌할 것 ③경찰수뇌부는 인책 사임할 것 ④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을 보장할 것 ⑤3.1 사건에 관련한 애국적 인사를 검속치 말 것 ⑥ 일본경찰의 유업적 계승활동을 소탕할 것이었다.

 

모든 기관·단체 참여,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 동참

<독립신보>는 제주도 파업사태에 “156개 단체 직원이 총파업에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제주경찰사>에는 그 당시의 자료를 인용,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전 기관·단체가 총파업을 실시해 166개 기관․단체 41,211명이 참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도 경찰관 파업 숫자는 빠져 있는데, 이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밖에도 모슬포, 중문, 애월지서 등지에서 제주출신 중심으로 현직 경찰관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또 일부 지역에서는 상점이 문을 닫아 파업분위기에 동조했는데, 이런 민간인들의 파업상황까지 고려한다면 이보다 더 많은 인원이 3.1 경찰 발포사건에 항의하는 총파업에 참여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송시우┃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 출저 : 사회변혁노동자당 기관지 <변혁정치> 제23호 (2016년 5월)

[참고자료]

-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 <한내 뉴스레터> 28호, 2011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