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
얼마 전 가스공사 홍보실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쓴 글에 대한 항의였다. 도시가스 설치노동자가 비정규직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내가 쓴 글은 이삿날 우리가 만나는 인터넷 설치 기사, 정수기 설치 기사, 도시가스 설치기사들이 모두 비정규직이라는 내용이었다. 왜 비정규직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위탁한 업체의 정규직이고, 관련법에 민간에 위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30분 넘게 실랑이를 했다.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 SK브로드밴드 설치기사,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비정규직이 아니라 하청업체의 정규직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런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고 하자, 그제야 전화를 끊었다. 서울시 산하 공사의 홍보담당관이 이런 수준이니 다른 곳은 어떨까 싶었다.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삼성의 옷을 입고 삼성전자 제품만을 고치는 기사들, 소비자들은 기사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투쟁에 나서기 전까지 이들을 비정규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사들 스스로도 비정규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도,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노동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하는 노동이 정규직 노동인지 비정규직 노동인지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다.
하청 용역 파견 위탁 외주 도급 협력업체… 비정규직의 다른 이름이다. 자본은 복잡하고 어려운 용어들을 사용하며 비정규직을 숨기고 진실을 은폐한다. 2007년 한글날 현대자동차는 ‘거부감이 일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은 용어에 대한 순화운동’을 한다며 하청을 협력사로 바꾼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2011년 고용노동부도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부정적인 용어’로 ‘비정규직’과 ‘중간착취’를 포함시켰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노동이다. 보수적인 법원에서조차 위장도급이거나,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하는데, 정규직노조 간부들조차 스스로 협력업체라고 부른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김혜진 동지가 쓴 <비정규사회>는 비정규노동에 대한 ‘진짜 교과서’다. 비정규 노동이 무엇인지, 왜 생겨났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A에서부터 Z까지를 정확히 알려준다. 김혜진 동지가 책에서 물어본 ‘비정규직은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일까?’ ‘비정규직이 된 것은 내 탓일까?’, ‘비정규직을 없애면 회사가 망할까?’, ‘비정규직을 그대로 두고 차별만 없앨 수 있을까?’라는 네 가지 질문에 대해 명징하게 대답할 수 있는 노조 간부가 몇 명이나 될까 궁금하다.
근로기준법이나 노동조합법처럼 책상 앞에 꽂아놓고 필요할 때마다 펼쳐보는 책이 있다. 노동조합 규약이나 단체협약도 그렇다. <비정규 사회>는 바로 그런 책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헷갈리거나 어려울 때 꺼내서 읽는 책이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정규직 중심의 노동을 밑동부터 허물기 시작해 천만 비정규직 시대가 된 2015년까지 오롯이 17년을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의 문제를 껴안고 싸워 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어떤 학자나 전문가의 유려한 문장에서도 나올 수 없는 현장감과 진실의 혜안이 담겨있는, 그래서 노동조합을 하는 사람이라면 교과서처럼 읽어야 하는 책이다.
노동조합에는 입만 열면 ‘투쟁’을 말하고, 마이크만 잡으면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비정규직에 대해 자세하게 물어보면 대부분 멈칫하거나 입을 다문다. 비정규직 당사자들도 마찬가지다. 최근 현대, 기아자동차 비정규직노조가 일부 조합원들만 정규직이 되는 안에 합의하는 일도 있었다. 산업과 업종을 망라하고 가장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고 토론하고 함께 싸워온 김혜진 동지는 ‘양보’가 아니라 ‘연대’가 답이라고 말한다. 정규직이 되기보다 비정규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연대가 답인지, 어떻게 비정규 체제를 바꿀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비정규직은 거스를 수 없는 고용 형태가 되었으니 차별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설사 임금 및 고용조건이 정규직과 비슷한 수준이 되더라도 해고될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차별은 사라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현실을 바꿀 힘이 시혜나 온정주의가 아닌 노동자들의 연대에서 비롯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얼마 전 세월호 참사로 돌아가신 단원고등학교 기간제 선생님의 아버지를 만났다. 죽어서도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교사의 아픔을 보듬고 함께 싸우고 있는 사람이 바로 김혜진 동지였다. 그가 살아온 발자취가 비정규 노동의 역사다. 그가 온 몸으로 써내려간 책 <비정규 사회>를 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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