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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민주주의의 통쾌한 승리, 영덕 핵발전소 유치찬반 주민투표 자원봉사 참가기

주민투표 결과 발표 직전 모습 ⓒ 이헌석 (페이스북)

 이정희 (경상대 사회학과 대학원)

올해 봄 탈핵 희망버스 때 영덕에 처음으로 다녀온 후 좀처럼 갈 기회가 없었다. 10월 한 달 내내 서명버스가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영덕에 한 번 가야 되는데…” 마음이 무거웠던 차에 주민투표 기간 동안 자원봉사자가 무려 500명이나 필요하다는 공지를 보고선 마음이 더더욱 급해졌다. 하지만 창원에서 영덕까지는 쉬운 길이 아니다. 창원에서 포항까지 하루에 다섯 번 있는 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영덕 가는 시외버스를 타야 하는 4~5시간은 족히 걸리는 길이다. 과연 혼자 그 먼 길을 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마침 남편이 당분간 백수임이 확정되었고, 기쁜 마음(?!)으로 둘이 함께 투표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선 미리 가서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첫째 날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투표 전날인 11월 10일 저녁 9시 교육을 받기로 하고 오후 4시 창원에서 출발했는데, 자동차로 이동하더라도 영덕은 꽤 멀었다. 여차저차 4시간 넘게 걸려 저녁 8시 반, 배정 받은 병곡면 투표소 숙소에 도착했다. 병곡면에 배정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경남 지역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분들이었다.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투표소에서 할 일에 대해 교육을 받고나니 밤 10시가 넘은 시간. 내일 아침 5시에 투표소에 집결하려면 4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모두들 서둘러 잠을 청했다.

11월 11일 투표 시작 날 새벽 5시. 투표소로 향하는 길 올려다본 영덕의 하늘에는 별자리 공부를 해도 좋을 만큼 무수한 별들이 선명하게 빛났다. 투표소에 도착하니 덩그라니 텐트만 처져 있고 탁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투표 동선을 짜서 책상을 새로이 배치하고 투표소 밖에 현수막과 안내판을 부착하고 투표에 필요한 각종 집기와 서류들을 챙기니 6시가 다 돼 간다.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자리를 잡고, 드디어 6시! 자원봉사자 일동 기립해서 선서로 주민투표를 개시했다.

 

 

영덕 핵발전소 유치 찬반 주민투표는 투표 성사를 위한 정당한 요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투표를 승인하지 않아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인명부조차 협조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책위에서는 주민투표 성사를 위해 받은 서명자 12,008명을 기준으로 선거인명부를 자체적으로 준비했다. 투표 과정은 먼저 주민분이 투표하러 오면 선거인명부에 기재돼 있는지를 우선 확인한 후, 기재돼 있는 경우 신분증과 대조해 본인 여부와 인적사항 정보를 확인한 후 투표하고, 만약 선거인명부에 기재돼 있지 않을 경우 새롭게 선거인명부를 작성해서 총인원에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투표를 진행했다. 매시간 기존 선거인명부 상 투표자와 신규 등록 투표자수를 집계해서 보고했는데, 보고는 신원 확인 부스뿐만 아니라 투표지 교부관, 기록 담당관 등을 통해 이중, 삼중으로 교차 확인할 정도로 투표 진행에 엄중을 가했다. 

난생 처음 지켜보는 주민투표 과정은 말 그대로 경이로웠다. 선거인명부는 결과물만 보면 두툼한 A4 용지 묶음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직접 발품을 팔아서 만든 그 동안의 노력과 고생들이 녹아 있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엄정하고 공정한 선거로 만들기 위해 만든 무수한 서류들과 확인 장치들이 있었고, 투표소마다 변호사들을 배치해 법률적인 문제도 바로바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매일 오후 8시 투표가 종료되면 투표함을 비롯한 선거 관련 서류들을 모두 봉인해 놓은 뒤, 수송 담당자들이 와서 검수를 하고 수송하는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기도 했다.

이렇듯 영덕 핵발전소 유치 찬반 주민투표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를 더욱 빛나게 해주신 분들은 단연 영덕 주민들이었다. 106세 어르신부터, 다리에 기브스를 하고도 투표소를 찾아주신 주민, 올해 7월 생일이 지났다며 웃으며 달려온 1996년생 학생까지. 또한 새벽 일찍 일 나가러 가시다가 들르신 주민, 점심시간 짬을 내서 달려오신 주민들, 그리고 저녁 시간 흙 묻은 작업복을 입고 투표소를 찾은 주민들까지.

투표소를 찾은 주민 한 분 한 분이 모두 반갑고 고마웠던 건 민주주의를 훼손시키기 위한 저들의 방해공작이 너무나 뻔뻔하고 어이없어서 투표하러 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수원은 이른 새벽부터 투표소 앞에 떡하니 차를 대놓고 투표소 주변을 촬영하면서 감시했다. 결국 경찰까지 불러 항의하니 투표소 50m 밖으로 차를 이동시키긴 했지만, 차에 있던 사람들이 투표소 주변에 2~3명씩 흩어져 투표소의 동태를 계속해서 파악했다. 그리고 투표소 바로 앞에 있던 면사무소에서도 직원들이 건물 밖으로 나와 어슬렁거리면서 투표소 쪽을 주시했다. 자원봉사자들도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사방에 흩어져 있는 한수원과 면사무소 직원들의 시선들과 마주쳐야 했는데, 이런 시선들이 주민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실제로 어떤 분은 투표소 앞까지 오셨다가 누가 볼까 두렵다고 발길을 돌리기도 하셨고, 어떤 분은 “누굴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지네들이 투표를 하라 마라 왜 난리야?”라며 역정을 내기도 하셨다. 면사무소 안에는 “원전반대 불순 좌파세력 강력히 규탄한다”, “가짜투표 참여하지 맙시다”라고 적힌 유인물이 버젓이 놓여 있었다. “투표장에 가시면 안됩니다”라고 적힌 빨간 조끼를 입은 청년들은 마을을 돌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실제로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자원봉사자들을 “빨갱이”라고 윽박지르고 위협하기도 했다.

 

투표기간 내내 벌어진 투표방해 행위들 ⓒ 영덕탈핵(페이스북)


이렇게 감동과 분노가 교차하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11,209명 투표”(선거인명부 기준 투표율 60.3%), “10,274명 반대”(반대율 91.7%)라는 결과는 정말 기적처럼 여겨진다. 녹색당의 논평처럼 이번 주민투표는 “인구 4만 명이 채 안 되는 군에서 군민 1만 1천이 대규모 항쟁에 나섰고, 최소 1만 여명의 반대 민심을 확인”한 결과이다. 핵이 주는 위협으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탈핵 운동의 최전선에서 반대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해주신 영덕 주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투표가 끝난 지 채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주민투표의 결과를 축소하고 부정하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영덕 주민들의 탈핵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의 싸움은 영덕 주민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싸움이다. 더 많은 연대와 지지로 영덕은 물론이고 다른 어느 곳에도 핵발전소가 들어서지 못하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