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동

희망 비행기 (인도 원정투쟁기)

이갑호 (쌍용자동차지부 창원지회)

지난 1월 쌍용차 대주주인 인도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과 만나면서 교섭을 열었지만 8개월간의 지루한 교섭이 이어졌다. 회사의 진정성 없는 시간만가는 교섭으로 인하여 8월31일 김득중 지부장님의 단식이 시작되었다. 교섭 결렬시 인도 원정 투쟁 계획이 있었지만 당기기로 하고 2주간의 짧은 준비 기간을 갖고 ‘희망 비행기’라는 이름으로 9월 23일 새벽, 지부장 단식 24일차 5명의 인도 원정단이 출발하였다.


지부 2명 창원, 정비, 비지회 각 지회별 한명씩으로 구성하였다. 우리의 목표는 인도에 대책위를 구성하고 마힌드라 회장과 만나서 티볼리가 잘 팔리면 해고자를 복직 시키겠다는 약속을 지키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교섭에서 어느 정도 진척이 있기는 하였다. 유가족실태 조사가 이루어졌고다. 하지만 손배 가압류와 해고자 복직 시기에서는 한 달이 넘도록 교섭을 해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에, 회사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였기에 인도로 달려가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서 직접 회사의 진정성을 확인하려 하였다.


미지의 땅 이였다. 마힌드라 본사가 있다는 것 말고는...
인천공항에서 동료들의 배웅을 받고 출발하여15시간의 비행뒤 뭄바이 공항에 도착하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덥고 습한 날씨와 네팔에서 우리의 원정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도와주겠다고 달려와준, 통역과 촬영을 도와줄 세명의 동지였다. 
통역이 없었다면 어쩌면 늦어 질수도 있는 원정이었기에 우리에게는 최고의 만남의 시작, 그렇게 우리의 희망 비행기의 첫발을 내딛었다
숙소로 이동하던 동안 고층 건물은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70년대 이전 같은 느낌이었다.
에어컨이 나오는 차량이었지만 너무 더웠고 차량의 경적소리, 차선은 그려져 있지만 무용지물인 무법 천지의 거리, 고속도로에도 오토바이가 다니고, 사람들의 차로 무단횡단은 기본이고 어린시절 알던 판자집보다도 못한 곳에서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낮에도 짐승과 사람이 길거리에서 잠자고 있는 모습, 인도거리에서의 시작은 너무나 당황스럽고 ,혼돈 그 자체의 모습 이었다.


23일 저녁 숙소에서 인도에 가기 전에 민주노총과 금속에서 연락을 해준 인도 노조 대표와의 만남이 호텔 숙소에서 이루어 졌다. 우리는 쌍차의 상황을 설명하고 선전물을 나눠 주고, 준비해간 영상물도 보여주며 절박한 우리의 심정을 이야기 하였다.
그 후로 그 동지들을 만나며 우리의 상황을 알려 나갔고 CITU위원장님의 도움으로 여러 곳의대표들을 만나러 다녔다.
“우리는 쌍용차 해고자들이다. 한국에서 노동자 시민들이 연대의 맘으로 모아서준 돈으로 희망 기행기를 타고 인도에 올 수 있었다. 쌍용차 대주주는 마힌드라 그룹이고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인도 현지 노동자들의 연대의 힘이 필요하다.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서 쌍차 해고자 문제를 직접 해결 하라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였다.
이후 위원장님의 소개를 받고 계속 다른 대표자 분들과 함께 간담회를 하였고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만국의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손을 잡아 주었다.
막막하기만 하던 대책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리들은 기쁘면서도 약간은 당황했다, 이렁게 까지 함께 하겠다고 손내밀어 주며 우리를 반겨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28일 대표자 회의에 30명 정도의 대표자분들이 참석해 주었다. 대표자들은 쌍용차 해고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함께 할 것이고 만약 10월까지 문제 해결에 진전이 없다면 11월부터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함께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7년 동안 쌍용차 해고자들이 내민 손을 한국의 수많은 시민들이 잡아 주었던 것처럼,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인도 노동자들이 해고자들을 품어주었다. 그날 대표자회의에 함께 한 정당, 노동조합 명의로 마힌드라 그룹에게 면담을 요구했다.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우리의 계획은 투쟁이었다. 강제 출국까지도 생각하며...

 

 

국제노총 70주년 뭄바이지역 노동자 대회'쌍용차 해고노동자 연대의 날'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마힌드라 그룹의 경영진이 나와 면담을 진행했다. 코엔카 의장이 아니라 내심 실망했지만 쌍용차 해고자들과 함께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면담에 나온 경영진은 쌍용차 상황이 어떤지를 알고 윗선에 보고하여 해결하겠다던 말을 하였다.  쌍용차 해고자 문제 해결을 결정할 수 있는 경영진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척추 수술로 입원 중인 쌍용자동차 이사회 의장인 파엔코엔카가 입원실에서 우리는 만났다. 코엔카 의장은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평택에서 진행 중인 노-노-사 교섭에서 문제가 풀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 현재 노노사 교섭은 중단 된 상태이고 그 교섭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쌍용차 해고자들이 인도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문제 해결의 진전이 없다면 한국으로 돌아 갈 수 없다고 절박한 상황을 전달하였다. 코엔카 의장은 노노사 교섭이 진행될 수 있도록 바로 쌍용차 경영진들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병원에 누워 해고자들을 맞이해주고 교섭을 약속한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들리는 이야기로는 인도에서 기업인들이 그런 방법을 자주 쓴다는 말을 듣고 확신 할 수는 없었다.
3차 대표자 회의에서 코엔카이사회 의장과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는 한국의 회사에 전화해서 중단 되었던 교섭을 재게 하라고 이야기 했다며, 우리 원정단이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협의가 진짜로 열리고 진정성 있는 교섭이라는 상황이 인식이 되어야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한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10월 5일 쌍용차 최종식 사장은 기업노조 홍봉석 신임위원장과 함께 36일 째 단식 중인 김득중 지부장을 찾아가 진전 있는 교섭을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진정성 있는 교섭, 지금까지와는 다를거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후 2시, 보름 넘게 중단되었던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노노사 교섭이 다시 시작되었고. 어쩌면 7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물꼬가 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7년 간 쌍용차 해고자가 된 후 안해 본 투쟁이 없을 정도로 우리의 투쟁은 강고 하였으나 항상 벽에 막힌듯한 느낌이었다.
대한문 투쟁, 여의도 등 서울 곳곳에서 투쟁 하였고 죽음을 각오하며 고공농성, 단식을 이어가고 다시 평택으로 돌아와서, 공장안의 동지들에게 우리의 투쟁을 이야기 하고 안과 밖의 거리감을 줄이는데 노력하였고, 함께하자고 도와달라고 그리고 공장안의 굴뚝 농성을 이어 왔었다.
지난 7년간 쌍용차 해고자라는 낙인으로 28명의 동지들이 사라져갔다. 창원 공장에서 같이 일했던 동지들도 4명이나 된다. 인도에서 이번에는 꼭 해고자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며 해결되기를 빌고 또 빌었고, 더 이상의 희생자가 생기지 않는 희망이라는 두 글자가 우리에게 다가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인도 노조 대표단에 상황을 이야기 하고 돌아간다고 이야기하며,  만약 일이 해결 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 왔다.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길이 활짝 열리기를 바란다.
공장 문이 열릴 때까지 쌍용차 해고자들은 하나로 뭉쳐서 우리는 함께 행동하여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