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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장기 저성장에 대비하는 자본의 전략과 노동자운동의 전장

한지원(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삼성의 인력 구조조정이 이슈가 되고 있다. 10% 넘는 인력을 정리한다는 계획인데 숫자로 따지면 1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케이티는 이미 작년과 제작년에 9천명에 가까운 노동자를 해고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새 경영진의 전략에 따라 무리한 해고를 대규모로 하려다보니, 그 과정에서 각종 인권침해가 이뤄졌었다. 해양플랜트 사업으로 적자를 본 현대중공업은 올해 초 이미 1천 명 이상을 희망퇴직 형태로 해고했고,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도 대규모 구조조정을 예비하고 있다. 이 밖에도 두산그룹, 에스케이그룹, 지에스그룹 등이 인력감축을 진행 중이다. 정부 고용정책 때문에 대놓고 한 번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지는 못할 뿐 매우 지속적으로 구조조정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들 재벌들이 구조조정에 나서는 건 당장 경영위기가 닥쳐서는 아니다. 삼성이야 두말할 나위 없고, 나머지 재벌들도 일부 적자가 난 사업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대규모로 해고를 할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재벌들이 이렇게 구조조정을 하는 이유는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에 대한 전망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장기 저성장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고, 세계 경제 역시 중국의 성장률 저하와 유럽의 끝 모를 불황에 침체가 꽤 오래 계속될 것으로 재벌들 대부분이 전망하고 있다. 선제적 구조조정을 해야 이윤을 확보할 수 있다고 재벌그룹 경영진들이 판단하고 있단 것이다.
현재 정부가 일반해고를 핵심으로 한 노동시장구조개혁을 강하게 추진하는 건 이렇게 장기 저성장을 대비하는 자본의 중장기적 요구 때문이다. 일반해고 요건 완화는 기업들에게 꽤나 효과적인 인건비 감축 수단이다. 노조가 없는 곳에서는 이미 권고사직, 희망퇴직 등의 이름으로 해고가 꽤나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간접적 수단을 통해서였다. 성과평가라는 것 자체가 사실상 객관화되기 힘들기 때문에 일반해고 완화는 사업주가 언제든 인원을 줄이고, 이를 무기로 임금을 삭감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고용정보원 통계(2013년)에 따르면 한 해 220만 명 정도가 비자발적으로 퇴직을 하는데, 이중 100만 명 정도가 기타회사사정에 의한 퇴직, 근로조건변경, 질병 등 사실상 일반해고에 해당했다. 그리고 300인 이상 대기업에서 이런 비중이 더 높았다. 일반해고에 대한 제약이 큰 상황에서도 이정도였는데, 이 빗장이 풀리면 어떻게 될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 대기업들은 상시적 인원조정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한 상태다.
현재 상황은 1996년과도 비슷하다. 한국 경제는 3저 호황 효과가 사라졌음에도 재벌들이 해외차입을 통해 과잉투자를 지속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재벌들의 부채비율은 당시 300~500%까지 상승했었다. 김영삼 정권은 1995년부터 노동시장유연화를 줄기차게 주장했는데, 노동자를 쥐어짜 부채를 갚는 길 말고는 재벌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5년 출범한 민주노총이 아직 상황을 엎을 만큼 힘이 없다고 봤고, 김영삼 대통령 지지도가 높아 얼마든지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고 봐 1996년 12월 25일에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켰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를 피해갈 순 없었다.
현재 당시만큼 재벌들의 재무구조가 부실하진 않지만, 그 시기보다 세계경제는 훨씬 더 안 좋은 상황이긴 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몇 년 간에 걸쳐 그럭저럭 회복된 건 재벌들의 부채를 국가와 노동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전가했고, 여기에 세계경제가 2천 년대 호황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시장유연화의 피해자들은 2천 년대 내내 고통 받았지만,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수입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세계 경제 호황 탓에 소위 말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더 공고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세계경제 자체가 불황이고, 한국 경제가 꽤 오랜 기간의 저성장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즉 노동시장 이중구조 자체도 유지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까지도 쥐어짜야 할 상황이 되었단 것이다. 이번 노동시장구조개혁에서 일반해고가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건 정규직의 과잉 안정성 탓에 청년 고용이 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대기업 정규직도 저임금 고용불안에 동참해야만 사업주들이 이윤을 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단 의미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그 생산성에 기대 수익을 높이는 것이 본연의 작동 방식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위기를 극복할 때는 언제나 자본주의 자체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했단 반증이기도 하다. 1997년만큼 급격하게 위기가 발생하는 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더 오랜 기간 경제위기가 저강도로,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가혹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편, 정부는 느닷없이 국정 교과서를 매개로 반공 의제를 쟁점으로 만들었다. 현재 검정 국사교과서들이 좌익 편향이라는 비판이다. 국사교과서에서 주체사상을 가르친다, 김일성을 미화했다는 등 유치한 내용들이지만 현재 상황으로 보면 이 반공 쟁점이 모든 사회의제를 덮고 내년 총선까지 갈 기세다.
생각해보면 박근혜 정부의 가장 초지일관한 정책은 출범부터 지금까지 ‘반공’이긴 하다. 경제위기 문제도, 청년 고용 문제도, 고령화 문제도 모두 반공 이슈로 해결하며 지금까지 꽤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 정도 되면 반공 경제학이라고 불러도 될법하다. 경제학은 시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학문이다. 경제학이다. 좌파 강경 노조의 쇠파이프 질로 청년고용문제가 발생했고, 좌파 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시민들이 반기업 정서를 가지고 있어 기업들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니, 비꼬자면, 박근혜 정부의 경제학은 모든 문제는 용공세력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반공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경제학이다.
현 정세는 한국의 장기 저성장을 어떻게 해쳐나갈 것이냐를 결정하는 게 핵심이다. 박근혜 정부는 노동자가 모든 희생을 짊어지도록 제도를 만들고 있고, 재벌들은 이미 선제적 구조조정이라는 전쟁을 시작했다. 국정교과서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집중할 건 재벌들의 선제적 구조조정을 중단시키고, 장기 저성장 시기를 재벌과 부자들이 책임지게 할 제도 개선책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