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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열사병의 원인은 태양이 아니라 저열한 제도(制度)

경남근로자건강센터 류현철

얼마 전 반가운 산재승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고생하신 노무사님이 아주 밝은 목소리로 연락을 주셨다. 내심 재판까지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던 사안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인정되어 승인되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늦여름이나 초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역 금속노조에서 노동안전보건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간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조선소에서 일하던 만 23살의 젊은 하청노동자의 돌연사 건이었다. 젊은 하청 노동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산업재해의 가능성이라도 타진해보는 것이 그나마 가능한 애도의 방식이었던 탓일까 그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젊은 노동자는 8월 한여름 낮에 조선소에서 작업을 하던 도중 혼자 쓰러진 상태로 동료 작업자에 발견되어 응급실로 후송되었으나 결국 사망했다. 담당의사도 심근경색을 사망원인으로 의심했고 돌연사의 가장 흔한 원인이 되는 것이 뇌심혈관계질환이기에 그쪽으로 가능성을 두고 있었으나 국과수의 부검결과 뇌심혈관계질환의 가능성은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의사 선상, 뭐라도 쫌 방법을 찾아보소! 어떻게 안 되겠능교?"

부검 소견으로 인해서 산재의 가능성도 멀어지는 듯했고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나에게 연락을 넣었던 모양이다. 부검소견을 대략이라도 알려달라고 하니 사인은 불명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응급실 진료기록 상 간수치가 높아서 급성 간부전에 의한 사망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언급은 있었다고 했다. 당일 오전까지도 멀쩡하게 일하던 젊은 노동자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급성 간부전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적절해보이지 않았지만 간효소 검사 수치가 급성 간부전을 언급할 정도로 높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열성질환(열사병)의 경우에 간효소 수치의 급격한 상승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뭐라도 쫌 해봐야 했다.

최초 발견되어서 후송된 응급실 진료기록 전체, 부검소견서, 과거 건강검진기록을 다시 검토했고, 최초 발견자의 진술을 다시 확인하고 고인이 일하던 조선소 현장을 찾아갔다. 그의 일은 선체외부 용접을 하기 위해서 선체 안에서 용접될 철판을 100-120도까지 예열하고 용접이 잘 이루어지도록 백킹제라는 것을 탈부착하는 업무였다. 그가 쓰러진 날은 8월, 한여름 낮의 날씨는 더욱더 작업장의 열기를 더했을 것이다. 열사병의 가능성은 높았다. 그러나 열사병의 경과로서는 너무 급작스러운 사망이었다.
의료기록에서 응급 검사기록상 높아진 간효소 수치,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으로 의심했던 심근 효소 수치의 증가(열사병의 경우에도 심근효소 상승이 있을 수 있다!)를 확인했다. 이 역시 열사병에서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역시 발견부터 사망에 이르는 시간 경과 상 열사병으로 인한 사망의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나 최초 도착 시 질식 상태에 대한 언급, 응급간호기록지에서는 기도 흡인을 할 때 음식물이 배출되었다는 기록 역시 확인했다. 최초 발견자가 말했던 구토의 흔적이나 얼굴이 검게 되어 있었다라고 언급한 정황과 맞추어보면 기도폐색으로 인한 질식의 가능성이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열사병으로 인해서 그렇게 빠른 시간에 사망에 이르기는 힘들 것이고, 또한 정상적인 경우라면 술에 취하거나 뇌손상도 없는 젊은 성인 남자가 구토로 인해서 질식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열사병으로 인해 활력과 의식이 떨어진 상태에서의 구토라면 다르다.

"열중증(열사병)으로 인한 활력 및 의식 저하를 동반한 구토, 구토물의 기도폐색으로 인한 질식사"가 의심되었고 기존의 문헌자료 검토와 의무기록, 현장검토 기록을 첨부하여 업무와 관련한 사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업무관련성 평가 소견서를 작성했다.
그 건이 다행히 산재로 인정된 것이다. 근간의 일들 중에는 적지 않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먼저 젊은 조선하청 노동자의 외로운 죽음이 업무와 관련된 것이었음이 입증된 것이 중요한 의미이다.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아주 작은 위안이라도 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직업환경의학을 하는 의사로서의 작은 의미와 보람을 일깨워준 일이기도 하다. 응급실에서 처음 고인을 접한 의사의 의견도 국과수 부검의의 의견도 의학적 사실에서 벗어난 것들은 아니었으며 그들의 책무를 다하지 아니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고인의 직업과 일을 돌아볼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그 죽음의 진짜 원인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인은 열사병, 기도 폐색이면서 또한 저열한 원하청 제도이기도 하다. 그것을 밝히고 이야기하는 것이 직업환경의학 의사의 일이다.

8월 한 여름 거대한 강철 구조물 안에서 벌어지는 필사의 노동. 조선소 하청업체 노동자는 추천을 받아 직영으로 들어가게 해준다는 직영추천제가 주는 작은 희망에 매달려 그렇게 일하다가 쓰러졌다. 스물 세 살이었다. 고인이 남긴 휴대전화의 문자 대화들을 보라!

         

스물셋의 나이에 작업장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된 그 노동자의 죽음은 추천을 받아 직영(원청)노동자로 되는 것을 목표로 온갖 것을 감내하며 일하는 젊은 조선 하청노동자들의 숨 막히는 현실, 직영추천제를 빌미로 희망을 착취하는 비정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이런 현실에서 빚어진 노동자의 죽음이 업무와 관련한 사망임을 밝히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사후약방문일 뿐이다. 이런 애달픈 죽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이제부터 할 일이다.

열사병에 이르게 하는 혹독한 작업환경이 개선되어야 할 것이며, 더불어 자신의 건강과 안전에 위협을 느끼게 되는 상황에서는 작업을 중단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어떻게든 직영이 되고자 가혹한 조건의 노동을 감내하고 휴식의 기회조차 내놓아야하는 현실 속에서 하청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은 위협받기 마련이다.

다시 뜨거운 여름이 다가온다. 노동자들의 건강을 열사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맞서야할 것은 무심한 태양이 아니다. 열사병의 원인은 태양이 아니라 저열한 제도(制度)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