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김춘택 (금속노조 마창지역금속지회)
'옥쇄(玉碎)'란 말을 들어보았나요?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옥쇄'란 말을 들으면 대부분 '옥쇄파업'을 떠올릴 것이다. '옥쇄파업'이란 말은 한국 노동조합 활동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인터넷에서 '옥쇄파업'을 검색하면 대표적으로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77일간의 공장점거 파업에 대한 언론보도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옥쇄'의 단어 뜻을 제대로 알고 '옥쇄파업'이란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 역시 '옥쇄'의 뜻을 이제껏 잘못 알고 있었다. 난 '옥쇄'의 '쇄'가 '쇄국(鎖國)'이란 단어처럼 잠근다는 뜻의 '鎖'인줄 알았다. 즉 '옥쇄파업'이란 공장을 점거해 철저히 봉쇄하는 파업이란 뜻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옥쇄'의 '쇄'는 부서진다는 뜻의 '碎'였다. 그러면 '옥쇄'의 뜻은 무엇일까?
'옥쇄'는 중국 역사책 《북제서(北齊書)》〈원경안전(元景安傳)〉의 "大丈夫寧可玉碎何能瓦全(대장부영가옥쇄하능와전)"이란 말에서 전해진 단어라고 한다. 대장부는 차라리 옥처럼 부서질지언정 깨지지 않은 기와처럼 하찮은 존재가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즉 '옥쇄'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크고 올바른 일을 위해 명예를 지키며 깨끗이 죽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다음 국어사전)
오키나와 전투와 옥쇄
그런데 우리가 흔히 쓰는 '옥쇄파업'이란 말은 《북제서》 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말인 1945년 오키나와 전투와 역사적으로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역사다.
제주도 한라산 등산코스의 출발지 중 하나인 어리목휴게소에서 한라산과 반대방향으로 올라가면 어승생악 오름이 나온다. 그런데 어승생악 정상에는 일제 말기 만들어 놓은 콘크리트 진지(토치카)가 있다. 계단을 내려가 안에 들어가 보면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지어져 앞으로도 수백 년은 끄떡없을 것 같다. 어승생악뿐 아니라 제주도 오름 곳곳에 그리고 해안가 곳곳에 이 같은 진지가 만들어져 있다. 우도의 절경 검멀레 해안에도, 수월봉에서 차귀포구까지의 아름다운 해안길인 엉알길에도 동굴진지가 있다. 일제말 만들어진 제주도의 동굴진지는 확인된 것만 7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은 '결7호(決7號) 작전'을 세웠는데 제주도를 요새화하여 오키나와 등 일본의 6곳과 함께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삼으려 했다.
재일조선인 소설가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 제3권에 이와 관련된 부분이 나온다.
“우리 일본군도 그때 한라산에 들어가 옥쇄(玉碎)할 예정이었지요... 대본영은 오키나와 다음의 결전장으로 제주도를 생각하고 있어서 말이죠. 제주도 전체를 요새화한 거지요. 한라산 중턱에 토치카가 많이 만들어졌어요. 전쟁이 끝나기 한 달 전인 7월에는 일본인 재류민 가운데 어린이와 여자들을 모두 조선 본토로 피난시켰고, 뒤에 남은 일본인 민간인 남자들은 미군이 상륙하면 한라산에 들어와 우리 군인과 함께 옥쇄할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오키나와 옥쇄 같은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제주도에서 옥쇄할 뻔한 일을 생각하면 난 지금도 소름이 끼쳐요”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3일까지 83일 동안 벌어진 전투로, 미군이 1만5천 명, 일본군 6만5천 명, 오키나와 민간인 약 12만 명 등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민간인이 12만 명이나 죽었을까? '옥쇄'에 그 해답이 있다. 일본군은 군인, 사령관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들에게도 할복 자결을 명해 수많은 주민이 수류탄으로 자결하거나 가족끼리 서로 목을 졸라 죽이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를 경험한 오키나와 주민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밤에는 모두 막대기를 들고 걸었다. 길보다 시체가 많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미군 폭격에 아버지와 두 누이를 잃었고 작은 아버지는 일본군에 속아 자살했다.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미군의 포로가 되면 치욕을 보인 뒤 죽인다고 자살을 강요했다. 아버지가 돌을 들어 자식의 머리를 짓뭉개고 서로 난도질하고 자폭하거나 벼랑에서 뛰어내려 죽는 사람들로 넘쳤다. 포로가 된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 오마이뉴스, <일본 패망 58년, 최후의 격전지 오키나와를 가다>
제주도 역시 옥쇄를 하려고 섬 전체를 요새화했고, 1945년 8월 당시 7만5천 명의 일본군이 주둔했다고 한다. 만약 오키나와와 같은 일이 제주도에서도 벌어졌다면 군인은 물론이고 또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인가. 다행히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고 제주도는 옥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3년 뒤인 1948년,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에서 결국 제주도 민중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또 다른 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일본인 친구에게 오키나와 전투와 같은 '옥쇄'가 일본 역사에서 처음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이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지 물어봤다. 혹시 '옥쇄'가 일본의 사무라이 전통과 관련이 있지는 않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오키나와 전투와 같은 옥쇄는 일본 역사에도 전례가 없다고 했다. 결국 오키나와 전투의 비극은 천황제에 바탕을 둔 군국주의의 광기가 초래한 민간인 대량 학살의 참혹한 역사였던 것이다. 한편 천황제와는 그 결이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는 맹목적 '국가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강요된 집단자결이 있었던 치비치리 동굴 입구에 있는 조각가 긴조 미노루의 조각상 (사진=http://blog.krhana.org/205)
'옥쇄파업'이란 말은 쓰지 말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옥쇄'의 사전적 정의는 "크고 올바른 일을 위해 명예를 지키며 깨끗이 죽는 것"이고 그 어원은 한 개인의 지사(志士)적 결단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정의는 오키나와 전투처럼, 전쟁 중에 '국가'를 위해 민간인까지 집단적으로 죽이는 것이다.
옥쇄의 역사적인 뜻을 알고 나니 '옥쇄파업'이라는 말은 노동조합 활동에서 지금처럼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마저 억압받는 한국에서 우리는 때로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투쟁'해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옥쇄'는 결코 그 뜻을 제대로 살리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옥쇄파업'으로 지금도 이야기되는 2009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 파업만 해도 그렇다. 당시 우리의 구호는 "함께 살자"였지 "함께 죽자"가 아니었다. 위험한 인화물질 가득한 도장공장을 점거하고 최후까지 투쟁했으면서도 결국 합의를 통해 투쟁을 마무리했던 것도 "함께 살기" 위함이었다. 함께 살기 위한 투쟁을 '옥쇄파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고 더 나아가 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동자의 투쟁을 국가주의의 광기가 어린 '옥쇄'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전혀 적절치 않다. 그러므로 이제 '옥쇄파업'이란 말은 쓰지 말자.
※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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