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필통 필진)
1. 금수(禽獸)강산
칠장이 히틀러는 / 말했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에게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 그리고 그는 갓 만든 회반죽을 한 통 가져와 / 독일 집을 새로 칠했다네 / 모든 독일 집을 온통 새로 칠했다네 // .... 그리고 구멍 난 곳과 갈라진 곳과 빠개진 곳들 / ... / 모든 똥덩이를 온통 발라 버렸다네 // .... 자네의 집은 / 회칠이 비를 맞으면 / 그 속의 더러운 것들이 다시 드러난다네. / 그 똥 뒷간 전체가 다시 드러난다네. // 칠장이 히틀러는 / 색깔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배운 바 없어 / 그에게 정작 일할 기회가 주어지자/ ... / 독일 전체를 온통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 - "칠장이 히틀러의 노래"(주1)
토카타와 푸거 D단조를 작곡한 바하의 나라를 히틀러가 똥칠갑 했다고 맑스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고발한다. 소엽산방(절 마당에서 낙엽을 쓸다)을 작곡한 황병기의 금수(錦繡)강산을 이명박이 갈기갈기 찢어놓은 위에 “색깔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배운 바 없”는 박근혜가 똥칠을 했다. 최순실-박근혜 공동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 그리고 사이코패스적 거짓말의 똥칠.
8순 노모께서는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죽으면 다 놓고 가는데...”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하신다. 1960년대 계란을 매일 먹고 1970년대 쇠고기 국을 매일 먹을 수 있는 넉넉한 형편에서 어머니는 종종 역 광장에서 막차를 놓친 시골 쌀장수, 과일-채소장수 아주머니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셨다. 찢어지게 가난한 청소 도우미 아주머니에게는 이불은 물론 돼지 한 마리를 기르라고 사 주시기도 했으며 부친께서는 종종 낚시 배로 이용하셨지만 지인에게 나룻배 한 척을 사 주시기도 했다. 대농인 친가와 중농인 외가 모두 나눔의 가치관을 가졌던 것인데 이런 “나눔의 인심”은 일제 강점기 이전 한반도 민중의 심성이었던 것 같다.
“... 상호부조와 모든 사람에 대한 흔연한 대접은 이 나라 국민성의 특징인데 솔직히 말하여 그런 특성은 여러 국민들보다 훨씬 우위에 서게 하는 것”이라고 조선에서 선교를 하던 프랑스 신부 달레는 이렇게 조선 민중을 높이 평가했다.(주2)
이런 민중에 반해서 지배계급은 어떻게 보였던가? “예전에는 용맹을 떨쳤지만 수 세기에 걸친 집권층의 부패로 인하여 점차 그 용맹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사벨 비숍 여사 역시 비슷한 평가를 한다. “한국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없다. 협잡을 업으로 하는 관아의 심부름꾼과 그들의 횡포 그들의 악행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당히 책정되고 수납된다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라면서 “관아 안에는 한국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우글거렸다”고 평가한다. 조선의 관리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오페르트에게서도 볼 수 있다. “관리들은 ...광범위하고 신속한 착취를 통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한다”.
“광범위하고 신속한 착취”. 신문-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아마 한반도 역사상 최대의 사기꾼 놈 최태민 일족 외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인 기피증이 있는 박근혜의 지령에 따라 안종범이 미르와 K재단을 일요일에도 공무원들을 동원, 불법적으로 인가한 범죄는 이런 연속성을 명명백백히 보여준다.
이 희대의 범죄행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해운대 엘시티 비리 사건 역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잘 것 없는 이영복 이라는 놈으로부터 거액의 금품을 받은, 부산 시장 서병수의 친구이자 시대착오적인 소위 자유 민주주의의 입장에서도 적 그 자체인 친박의 외곽조직 포럼 부산비전의 전 사무처장 놈이 체포된 사건에는 전 청화대(請禍臺) 정무수석 현기환 역시 뇌물수수를 했다. 서병수가 누군가? 세월호 침몰 원인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다이빙 벨”을 부산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문제를 두고 집행위원장 이용관씨와 갈등하다 그를 결국 사퇴시키는 것을 넘어 뇌물수수로 얽어 생매장시키려 한 악질 놈이 아닌가?
고등학생이 사회계약론에 입각해서 박근혜-최순실의 비정을 비판하고 청화대 세입자를 믿었던 노인들이 대중 앞에서 반성하는 현실에 더해서 친박은 가짜 보수라고 <조선일보>도 비판하는 상황에서 우병우는 이렇게 토한다. “(박대통령이) 항상 저한테 말씀하신 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진정성을 믿”기에 박근혜를 존경한다는 것이다. 우병우는 물론이거니와 공범자들인 안종범-차은택-고영태 등등이 이미 사실을 말했음에도 진실이 아닌 순실은 구치소 청문회에서 딱 잡아떼고 있지 않은가?
이 반역자 놈들은 ‘1980년 5월과 같은 상황이 오면 다시 그 때처럼 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한 허문도 같은 놈들이다. 제 놈들의 “법과 정의”(전두환을 수괴로 한 당의 이름은 민주정의당이었다)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박근혜가 “진돗개는 끝까지 물어뜯는다”며 문체부 고위 공무원들을 끝까지 물어뜯고 1만 명을 채우지 못하고 약 9500명을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린 야수성 역시 그런 것이다. 이런 철천지원수 년놈들을 “살처분”하는 것이 합법적 이며 윤리적인 행위로 공인될 수준의 정치혁명을 감행해야하지 않겠는가?!
이런 대담한 신념을 품지 않고서 “2002년과 2008년에 이어 이번에도 조직에서 배제된 다중들이 지침을 거부하며 n개의 깃발을 들고 개인끼리 연대하면서, 정치를 거부하는 순수한 개인들”(주3)로 시작된 “촛불혁명”을 위대한 성취로 마감할 수 있을까?
(사진 = 연합뉴스)
2-1. 배움과 성찰하는 의문, 진실과 진리의 칼빛
... 자기의 / 시대가 도래한 사람들에게는 / 결코 너무 늦은 것이란 없다! / ... / 당신은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한다. // ... 배워라, 감옥에 갇힌 사나이여! / 배워라, 부엌에서 일하는 부인이여! / 배워라,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이여! / 학교를 찾아가라, 집 없는 자여! /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는 자여! /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 // 묻기를 서슴지 말아라, 친구여! / 아무것도 믿지 말고 / 스스로 조사해 보아라! - “배움을 찬양함” (주4)
병법의 기본 중 한 가지는 “힘의 집중”이다. 경우에 따라서 분산하더라도 그 분산은 구심력을 전제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미군정 3년과 한국전쟁으로 마무리되지 못한 “민주적 자주 국가”라는 인간다운 삶의 적소(適所, Niche)를 구성하지 못했기에 분단 상황에서 1980년 이래 “계급전쟁”을 치루고 있다. 그것을 “중용 혹은 중도의 정신”으로 무시한다고 해서 회피할 수 있을까? “죽기를 각오하면 능히 이길 것”이라면서 “마침내 정의와 진실이 이기게 하기 위하여” “현직 대통령에 대한 인민재판은 안”되며 “졸속탄핵은 공산화로 가는 길을 열 것”이라는 놈들.(주5) 한국적 삶의 상황인식에 있어서 도저히 “언어와 사상이 통분”될 수 없는 악의 세력들에 대해서 n개의 깃발로 도대체 어떤 “혁명”을 할 수 있을까?
맑스가 “개인의 발전이 사회발전의 전제조건”임을 “Communist Manifesto”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안다면 이 시점에서 n개의 개개인이 어떤 정치적 전망 더 넓게는 어떤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지 냉철히 점검해 봐야한다. 250만 내지 300만의 자유와 정의를 요구하는 민주주의의 불빛에서 “인터내셔널가(Internationale)” 혹은 “너희는 조금씩 갈아 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다 찾으리라”라는 노동가의 가사가 거의 들리지 않았음은 이 감격스러운 운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개개인의 화학적 결합이 아니라 거대하지만 혼합물 같은 물결. 그 성격은 자유주의 혹은 보수주의라는 낡은, 언 발에 오줌 누는 정도의 개혁을 넘어 설 수 없는 것이다.
문학은 당대의 심성, 느낌 혹은 감정 그리고 이성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문화행위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응모작의 성격은 나의 이런 판단을 지지해준다.(주6) 모든 부문에서 응모작이 크게 증가 했는데 이것은 참다 참다 못해 봇물처럼 터진 “지옥 조선”에 대한 분노, 한반도 민중의 저항의 역사에서 분수령이 될 수도 있는, 진실과 진리의 불칼의 예광탄으로서 “촛불 바다”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에 있어서는 고해성사나 기도와 예배를 다룬 종교적 시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미래나 가공의 세계를 통해 현실을 반추하는 공상과학(SF) 소설이 많았는데 완성도 면에서 아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정치를 고발하는 작품도 있었으나 사실 나열에 가까워 의미를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는 무엇일까? 발본적(Radical) 노동-농민운동의 쇠퇴와 맑스-레닌-체 사상에 대한 관심의 소멸이다. 이런 양극화, 인구의 다수가 궁핍해지는 상황에서 20대의 취향 혹은 감수성이 자본주의적 취향에 머무른다는 김사과의 지적(주7) 그리고 한국문학의 탈 역사성에 관한 심진경의 지적이 그렇다.(주8) 그에 따르면 중국 소설은 한 개인의 일생을 역사 전체와 겹쳐서 사유하고 상상함에 비해서 한국문학은 개인의 육체와 정신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삶의 경험을 배제하면서 추상적 공간 내 쿨하고 자유로운 삶의 양식을 재현하는 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탈 역사적 태도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화해 불가한, 엄연한 역사적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기억상실은 각자도생을 자연스레 생각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혹은 보수주의라는 마약과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그런 만큼 민주주의는 공허한 개념으로만 남게 된다. 서울대 총학 선거가 투표율이 50%가 안 돼 연장투표를 하고 연세대는 처음으로 총학 선거가 무산되는 것이(주9) 이런 사고방식의 귀결이자 원인인 것이다.
소련이 붕괴했으니 맑스 사상이 생명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교회를 세습한다고 예수를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조계종 종립 대학교인 동국대 이사장이 탱화도난 그리고 논문 표절을 했다는 소문만으로 불경을 불살라버리려는 불경(不敬)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TV에서 이른바 인문학 특강을 시청해 보면 오늘날 삶을 강의하면서 맑스는 고사하고 자본주의를 언급하는 교수를 본 기억이 없다. 결코 그 시리즈물을 다 시청한 것은 아니지만. 2005년 BBC 라디오4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서양 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서 한국의 인문학자들이 거론하는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는 10위권에도 들지 못했으며 칸트만 7위를 기록한 반면 맑스가 아인슈타인(1999년 ≪타임≫지의 20세기의 인물로 꼽혔다)을 앞서 1위를 기록했다.(주10) 그리고 BBC는 최근 니체 그리고 프로이트와 함께 맑스에 관한 다큐를 방영했으며 독일의 공영방송 ZDF 역시 맑스를 조명한 것은 무엇을 뜻 하는 것인가?
2-2. 배움과 의문 그리고 반성
... 당신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보는 사람을 / 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하라! // ... 확고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면서 / 오 멋져라, 머리를 옆으로 흔드는 것은! ... // 모든 의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그러나 / 겁 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이제는 더 / 믿으려하지 않는 것이다! // 오, 얼마나 힘들여 하나의 교리는 쟁취되었던가! /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 / 이것은 꼭 이러한 것이지 대충 그러한 것이 아님을 / 알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웠던가! /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어느 날 한 사람이 그 교리를 지식의 비망록에 써넣었다. / 아마 오랫동안 그것은 그 책에 수록되어 있었고, 많은 세대가 / 그것과 함께 살아오면서 그것을 영원한 지혜로 알고 / 전문가들은 그것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 ... 불신이 ... 새로운 경험이 / 그 교리에 의혹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다. // ... 하느님이 스스로 만드신 책을 / 귀에다 대고 떠들어대는 엄숙한 목사들의 경고를 받으면서, / ... 이 세계가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세계이며 / 자기 방의 천장에 뚫린 구멍도 하느님이 손수 계획하신 것이라고. /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 이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는 힘들다. ... // 절대로 의심할 줄 모르는 생각 없는 사람들도 있다. / ... 필요한 경우에는 / 사실이 그들을 믿어야한다. ... / ... 논쟁을 할 때 / 그들은 첩자의 귀로 듣는다. / ... 절대로 행동할 줄 모르는 생각 깊은 사람들... / 이 생각 깊은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 결단을 피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 / ... 근심스런 표정으로 / 그들은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 살인자가 치켜든 도끼 아래서 / 그들은 살인자 역시 인간이 아닐까 자문한다. / 이일은 아직도 충분히 연구 검토되지 않았다고 / 중얼거리면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어간다. / 그들의 활동은 우유부단을 본질로 한다.... // ...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 잘못 행동할 지도 모른다. /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험 속에 머물게 마련이다. //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 - “의심을 찬양함” (주11)
앞의 “배움을 찬양함”에서도 “아무 것도 믿지 말고 스스로 조사해 보아라!”고 하는 태도를 이 시에서는 상세히 말하고 있다. 이 시는 시장 만능론에 미친 자유주의, 보수주의 그리고 교조적 스탈린주의를 그리고 하느님이 역사(役事)한다는 신앙을 확고 불변의 진리로 믿음을 사실에 비추어 의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침몰하는 자본주의라는 배에서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을 믿지 말고 그 배를 버리라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인가?”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의 천박함과 통한다. 이를테면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따고자 필답시험을 치루는 데 관련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지 않고 시험을 치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거짓이 아닌가?
브레히트가 말하는 것은 공자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고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思而不學卽殆 學而不思卽罔). (주12) 즉 맑스 사상을 배운 다음 자신의 삶을 “계급”의 관점에서, “일”을 노동과 자본의 착취와 지배의 관계에서 살펴보는 성실함! 이런 학습을 통해서 “사실”의 구체성이 담고있는, 점증하는 보편성을 드러내는 추상적 진리를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실사구시” 바로 그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한국 자본가 계급의 실증주의적-관념론적 사고방식 그리고 파시스트적 혹은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의심하는 과정이 바로 “의심-의문”의 올바른 행동인 것이다.
이런 학습을 하지 않기에 <한겨레>나 <경향신문>에서도 516 쿠데타 이후의 역사를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보며 이제 두 세력 중 “합리적 보수 세력”과 “중도적 진보 세력”이 의회를 중심으로 분배를 생각하며 성장 동력을 새로이 높여 무한경쟁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논조를 펴고 있다. 심지어 한 때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하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한다는 주대환 같은 자는 박정희의 공과를 공이 7 과가 3이라고 평가하면서 등소평이 모택동의 공과를 7:3으로 평한 것을 인용한다.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다. 모택동이 언제 난징학살 등 반 인류적 범죄를 저지르는 일제의 주구가 되어 반일 무장 항쟁하는 자신의 동포들의 철천지 원수 노릇을 했던가? 민주화 운동 세력이 한국의 경제발전을 줄곧 도외시 해왔다는 것인가? 청소년으로 빨치산 활동도 했으며 ≪민족 경제론≫을 쓴 박현채 선생은 산업화 세력인가? 이런 궤변은 인간이랄 수 없는 파시스트 세력 그리고 그 놈들과 공모하기도 한 자유주의 세력의 비열함의 크나 큰 책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주13)
“절대로 행동할 줄 모르는 생각 깊은 사람들”. 시인 송경동이 지적한 “관료”(주14)와 호형호제할 자들이 아닌가?! 흔히 살인 사건은 우발적이 아니고 계획적인 것이더라도 시간 차원에서 그 시작과 끝이 대단히 한정적 인만큼 사람들의 주목을 쉬 받는다. 영화가 왜 대중적일까? 9시간이 넘는 Claude Lanzmann 감독의 Shoah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영화는 인생의 이런 저런 면을 압축적으로 볼 수 있고 느끼며 성찰할 수 있도록 만든다.
삼성이 불법적으로 정유라를 지원하는 거액에 비하면 빵 하나 값이랄 수 있는 돈마저 주지 않으려 산재로 백혈병에 걸려 부모를 앞서 이승을 떠난 황유미씨와 그 가족 그와 동질적인 산재를 당한 노동자들에 대응한 반인도적 행위에서 반드시 보아야할 점이 있다. 노동 조건으로부터 병에 걸리거는 것을 방치하거나 불법적인 환경오염 물질들을 방출하는 것은 좁디좁은 “형법적 살인의 고의성”에서 벗어나는 “자본주의적 생산으로부터 비롯하는 사회구조적 살인”이다. 이런 실정법에 쉬 낚이지 않는 것, 압축적으로 쉬 느끼거나 전문지식이 없는 한 이성적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사건이 산업재해와 환경재앙이다.
더구나 산재를 피해자로 하여금 입증하도록 한 것 자체가 간접 살인자의 피해자가 살인을 수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살인자가 치켜든 도끼 아래서 그들은(생각이 깊어 신중한 자들!) 살인자 역시 인간이 아닐까 자문한다”는 구절은 이런 시각에서 진지하게 생각해야한다. 민중이 은행 채무에 시달리고 더욱이 은행문턱이 높아 고리 사채를 쓸 경우 “해결사들”에 심지어는 “신체포기 각서”를 쓰기에 이를 경우에 받게되는 지옥 같은 고통을 과연 임금을 체불하는 중-대 자본가 놈들이 겪고 있는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조직 내 민주적 소통 특히 지도자의 허심탄회한 대화능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왕조 시대의 수렴청정 보다 더 한 “은둔정치”를 겪고 있는 한국에서 너무도 절실한 지도자의 자질이 아닌가?!
2.3 노동자-민중 역사의 주체
... 황금빛 찬란한 / 리마에서 건축 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 어디로 갔던가? ... / ...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 바다가 그 땅을 삼켜버리던 밤에 / 물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 ... //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 그 많은 사실들. / 그 많은 의문들. -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주15)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한 집과 같은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 앞서 지적한 맑스(馬克思)가 개인의 성장을 중시했다고 할 때 그 성장은 삶의 충만한 의미와 기쁨일 것이다.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 적성을 정확히 파악해서 그에 맞는 직업에 종사하며 자신이 목표를 정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 목표를 성취할 때 사람은 보람과 함께 환희를 느낄 것이다. 목표를 성취함으로써 성취하고자하나 그러지 못한 고통(求不得苦)에 빠지지 않음은 물론 나의 성취로 다른 이들의 고통을 없애고 더불어 기쁨을 누릴 수 있는(離苦與樂) 삶이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사회에서 불가능함은 노동자-민중이 일상적으로 겪는 삶이 아닌가?! 그것은 살아있으되 죽은 것(Living Dead) 같은 삶이며 극단적으로는 자살하거나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깊은 좌절감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이 아닌가?!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는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에서 비롯한다. 노동의 설계와 구상으로부터 배제되어 자본가 계급과 경영진이 결정한 목표와 그들이 정한 노동과정에 따라 노예처럼 목표를 실행하는 생산양식은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
스트레스와 좌절감을 먹는 것과 온갖 종류의 “문화상품”으로 잠깐 피하는 인생은 개 보다 얼마나 팔자 좋은 삶일까? 먹방 이라는 프로그램에 혹은 이런 반인간적 생산양식을 노골적으로 혹은 교묘하게 정당화해서 순한 개처럼 순치시키는 모바일 게임으로 인생을 허비하게 하는 체제는 기술-과학적 진보를 제외한다면 얼마나 살만한 세상일까?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면 과학-기술 발전은 불가능한 것인가? 두 가지 실례만 들자면 우주공간에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운행시키고 수학의 난제들 중 하나인 “푸엥카레 추측”을 증명한 수학자도 모두 볼셰비키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인들의 성과였음을 상기해야한다. 소련이 비록 “혁명 후 사회”, 국가자본주의, 타락한 노동자국가 등으로 성격규정을 받지만 맑스적-레닌적 사회주의를 지향한 엄연한 사실(史實)을 무시하지 말아야한다.
10월 29일 이래 용서할 수 없는 악의 세력이 발광해도 굳건하게 넓어져온 “진실과 진리의 빛의 바다”가 요구해야할 것은 경제 민주화와 “민중안보”로 집약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 민주화는 노동자-민중을 배제하는 자본주의적 설계와 구상의 권리를 민중주권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것이다. 각종 세제의 공평성 확보에 그칠 것이 아니라 재벌의 국유화를 추진해야한다. 규모의 경제를 유지하면서 국민의 다수인 민중의 필요에 적합한 생산을 하는 체제로 이행해야한다. 이럴 때 교육은 개개인의 적성을 말살하면서 악질적인 재벌 등 대기업의 개 같은 피고용인이 되기 위한 죽은 교육의 고역으로부터 해방 될 수 있다. 그리고 대선에 불법을 저지르는 등 헌정 파괴기구인 국정원을 해체하여 “민중안보”에 충견처럼 복무하는 기구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브레히트의 시가 강조하는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관은 그에 앞서 478년 전 내가 존경하는 조상들 중 한 분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호남을 여행하면서 장성현을 방문하는데 그 곳에서 진시황이 장성을 쌓을 때 인민들의 참혹한 노역을 떠올린다.(주16) “나라에 쌓인 재물은 모두 백성들이 마련 한 것이며 윗사람들의 옷과 신발은 바로 백성들의 살가죽이며 음식요리는 백성들의 기름이며 궁전과 수레도 백성들의 힘으로 이룩된 것이며 세금과 공물 그리고 모든 용품도 죄다 백성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군주는 백성들도 자신과 같은 음식을 옷을 주거를 외출을 하고 있는 지 생각해야한다...”고 “백성을 사랑하는 의로움”(愛民義)이라는 시를 지었다.(주17)
소비에 따른 만족에 그치고 그 만족을 위해서 분배정의에 민주주의의 범위를 한정하는 반면 바로 자기 자신의 노동과정을 민주주의의 시야 밖에 둘 때 “시민적 개인”의 삶은 허망한 것이다. 노동 생산물과 노동 그 자체로부터의 소외는 다른 사람들과의 소외 그리고 이 경이로운 지상의 자연 나아가 우주로부터 소외와 함께 자본주의 체제 내 삶을 사막보다 더한 허망한 삶으로 만든다.
자연 과학자들은 지구 생태계가 인간세(Anthropocene)에 돌입했다고 경고한다.(주18) 지구환경을 최소한 50만년 간 유지해온 매개변수들에 생산력 주의와 경제성장 지상주의적으로 간섭하고 방해하여 1945년 혹은 1950년경부터 인간의 삶을 심각한 위기에 빠트려왔다는 것이다. 생물 다양성의 감소-숲의 소멸에 따른 사막화-기후 온난화-폭우와 폭풍우 등이 그것들인데 한반도에서 난대성 작물의 재배 가능 지역이 계속 북상하고 있는 것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는 인위적 재앙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인간의 필요를 배반하는 이윤확대에 미친 성장 위주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파국적 인간세의 원인이다!
( “이보게 형제들, 지금 무얼 만들고 있나?”- “장갑차라네” / “그럼 겹겹이 쌓여있는 이 철판으론?” / “철갑을 뚫는 탄환을 만들지” / “그럼 이 모든 것을 왜 만들지?”-“먹고살려고” - 베르톨트 브레히트 ≪전쟁교본≫
3. 민중의 법 감정은 정의로운 법치의 토대다
미합중국의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 사람들을 심사하는 로스앤젤레스의 판사 앞에 / 이탈리아의 식당 주인도 왔다. 진지하게 준비해왔지만 / 유감스럽게도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 때문에 시험에서 / 보칙 제 8조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받고 / 머뭇거리다가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 시민권 신청자에게는 국어에 대한 지식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 그의 신청은 각하되었다. 3개월 뒤에 /... / 이번에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누구였는가 하는 / 질문이 주어졌는데 (큰 소리로 상냥하게 나온) 그의 대답은 / 1492년 이었다... / 세번째로 ...대통령은 몇 년마다 뽑느냐는 / ...질문에... / 또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 판사... /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 지 조회해본 결과 / 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네번째로... 판사는 그에게 언제 / 아메리카가 발견되었는가 물었다. 그리하여, 1492년이라는 그의 정확한 대답을 근거로 하여 / 그는 마침내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 “민주적인 판사” (주19)
지난 번 “훼방 70년 ⓼”에서 인용한, 베트남 이주민이 “애국가 2절을 부르지 못해 떨어진” 눈물겨운 동시에 분노스런 판결을 내린 판사보다 인간미가 있지 않은가? 진작부터 전경련에 매수되어 온 구더기만도 못한 년놈들이 자신의 아들-딸 혹은 손자녀-외손자녀가 악질적인 범죄 집단 재벌의 탐욕과 거짓 그리고 “창조적 컨설팅에 따른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거나 될 수도 있음을 망각하고 헌재가 “진실과 진리의 빛”의 압력에 굴하지(?) 말라고 지랄발광하고 있지 않은가?
“헤겔은 항상 관념(Idea)을 주어로 삼으면서 ‘정치적 감성(Sentiment)’과 같은 진정한 동시에 현실의 주어를 술어로 만들어버린다.”(주20) 신경과학에 따르면 감정이 이성을 향도(向導)한다.(주21) 법관의 객관적 공정함은 그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법조문을 법관만큼 모르더라도 뇌물로 줬다고 증언했음에도 2심에서 진경준 같은 범죄자 놈의 뇌물 수수를 무죄로 판결한 것은 바로 “법관의 양심에 따른 판결”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의 법관들은 일제 잔재를 철저히 청산하지 못함에 더해서 보수적인 실증주의 법학의 감옥에 갇힌 수인들이다. 실증주의적 법 형식주의. 노동자-민중의 집회-시위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도로교통법 위반, 업무상 방해죄로 판결하는 것에 더해서 파업이라는 노동조합의 단체 행동권을 민형사상 손배소로 억압하는 악질적 관행이 바로 법치라는 관념을 정치적 동물인 인간의 감성에 정면도전 파괴하는, “법치를 빙자한 범죄행위”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400년 전 태어나 불후의 걸작들을 남긴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주22) 맑스의 이런 인도주의적 통찰과 정확히 상통한다. 뱃사니오는 큰 재산을 상속 받은 여인 포셔와 혼인할 비용 3000두카트를 친구 안토니오에게 빌리려한다. 안토니오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인심 좋은 상인이다. 마침 그 돈이 없어서 안토니오는 평소 경멸하는 냉혈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찾아가 돈을 빌리려한다. 안토니오를 평소 벼르고 있던 샤일록은 물실호기, 이자 대신 복수에 불타는 계약을 제안한다. 채무상환 약정일에 갚지 못하면 샤일록 자신이 좋을 대로 안토니오의 신체의 어떤 부위에서든 1 파운드의 살점을 떼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토니오의 배들이 몽땅 실종됐다는 비보가 전해진다.
이에 포셔는 발타사르 박사로 변장해서 안토니오를 변호하기에 나선다. 포셔는 실정법 상 샤일록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그의 잔인함을 인지시킨다. 포셔는 자비를 베풀어 돈을 받으라고 권한다. 이런 상황에서 안토니오와 뱃사니오는 상호 걱정하는 진정한 우정을 보여준다. 박근혜가 역사적 불법부정 사건으로 기록될 범죄행위를 최순실에게 모두 떠넘기는 비루하기 그지 없음과는 너무도 다르다. 이 희곡은 인간다운 법 감성에 입각한 이성이 냉혹한 자본주의적 실증주의에 승리하는 순간 절정에 이른다. “이 계약은 당신에게 피 한 방울도 흘리게 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계약서에는 분명히 1파운드의 살이라고만 적혀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의 피 한 방울이라도 흐르게 하면 베니스의 법에 따라 샤일록의 토지와 재화를 몰수해서 국가에 귀속될 것임을 선언한다! 극장에서 관중이 기립박수 했을 장면이다. 어떻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살점을 떼 낼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한 법치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샤일록은 베니스 시민의 생명에 반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이제 자신의 재산을 몰수당할 위기에 처한다. 관대한 안토니오는 국가로부터 받을 샤일록의 재산 절반을 돌려주되 사후 딸과 사위에게 상속시킬 것을 약속하는 증서를 쓰도록 한다. 그리고 안토니오의 실종됐던 상선들이 무사히 귀항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4. 나의 어머니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 “나의 어머니” (주23)
나의 어머니께서는 TV에서 범죄자 놈들을 보면 항상 “태어났을 때는 부모와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을텐데...”라고 말씀하시며 측은히 여기신다. 길에서 어쩌다 죽은 매미를 보고도 그 놈을 조심스레 거두어 나무 있는 곳에 안치시키신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되 세상의 어머니들은 대체로 어짊(仁)의 실마리인 측은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나의 세 가족의 전세 값으로는 어림없는 4000만원에 달하는 미용시술을 받고 한 달 계돈으로 1000만원을 쓰는 벌레만도 못한 최순실도 딸 얘기에는 눈물을 흘린다. 300만년 이상의 진화과정에서 형성된 모성은 대기오염으로 빛이 산란되어 밤하늘의 별빛을 볼 수 없을 뿐 그 이면에서 빛나고 있듯이 악의 이면에 여전히 박명으로라도 남아있는 것이다.
브레히트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고통, 영면해야 비로소 온갖 고통에서 해방되는 삶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어떻게 거두어야할까? 탄핵 국면에서 더민주당의 지지율이 40%로 상승한 반면 정의당의 그것은 3%로 오히려 떨어졌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브레히트가 지적한 “생각 깊은 사람들이 침몰하는 배의 승객들에게 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도끼 든 살인자들 역시 인간이 아닐까”라며 비판받는 사고와 가치관의 틀에 여전히 갇혀있음을 보여주지 않는가?! 정약용을 욕되게 만드는 손학규가 안철수와 손잡고 집권함으로써 혹은 안보는 우익이면서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부르주아적 관점에서만 합리적인 보수를 주장하는 유승민 세력이 집권하거나 맑스적 혁명이 아닌 혁명을 말하는 문재인 세력이 집권한다고 해서 앞에서 지적한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을 창출할 수 있을까?
청년들 그리고 청소년들은 2016년의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정치적 체험을 학습을 통해서 이성적 정의감으로 내면화해야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국의 동년배들이 국가 자본주의적 체제에 과감한 저항운동 나아가 혁명운동에 나설 때 연대해서 인간성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혁명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한다. 당면 상황에서는 노동당이나 녹색당 혹은 정의당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세상 어머니들의 그 많은 고통에 대한 빚을 갚는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외계인이 도래해서 인류를 유전자 변형 생명체(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황재형 作 = 존엄의 자리)
<주>
1.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 ≪살아남은 자의 슬픔≫(한마당, 1986년), 김광규 옮김, 76~77면
2. 우윤,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사람”, ≪우리 역사를 읽는 33 가지 테마≫(푸른숲, 1997년), 305~314면.
3. <한겨레>, 2016년 11월 28일자 10면과 2016년 12월 14일자 9면.
4.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 ≪살아남은 자의 슬픔≫, 74~75면
5. <조선일보>, 2016년 12월 23일자 A30과 A31면의 하단 광고.
6. <조선일보>, 2016년 12월 19일자 A25면.
7. “대화: 20대 얘기, 들어는 봤어?”, ≪창작과 비평≫, 2010년 봄호, 290~291면.
8. “대화: 세계문학, 동아시아 문학, 한국문학”, ≪창작과 비평≫, 2011년 봄호, 366~367면.
9. <조선일보>, 2016년 11월 23일자, A10면.
10. news.bbc.co.uk/2/hi/461545.stm
11.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 ≪살아남은 자의 슬픔≫, 98~103면
12. 박희병 편역, ≪선인들의 공부법≫ (창비, 2008년), 14면.
13. 최형록, “훼방 70년 ⓸ : 새는 좌우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날개로 난다-2”, 경남노동자민중행동 <필통> 2016년 1월 29일자. Harry Braverman, ≪노동과 독점자본≫(Monthly Review, 1974년).
14. 최형록, “훼방 70년 ⓼ :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연민이 분노를 부둥켜안을 때”. 경남노동자민중행동 <필통>, 2016년 11월 29일자.
15.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 ≪살아남은 자의 슬픔≫, 104~105면).
16. 심경호,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03년), 187면.
17. 김시습 씀, ≪금오신화에 쓰노라≫(보리, 2005년), 57~58면. “음식요리는 백성들의 기름이며 세금과 공물 그리고 모든 용품은 죄다 백성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부분이 춘향가에서 “금동이의 잘 빚은 술은 많은 사람의 피요 옥쟁반의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을 짠 것이다”라는 절창으로 메아리친다. 신병주-노대환 지음,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돌베개, 2003년), 176면. 홍세화 선생께서 칼럼에서 고발한 청화대 만찬의 상어 지느러미 요리 등 산해진미는 민중의 기름과 고혈이 아닌가?!
18. Ian Angus, “언제 인간세가 시작됐는가 그리고 왜 그 일이 중대할까?”, ≪Monthly Review≫, 2015년 9월호 1~11면.
19.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 ≪살아남은 자의 슬픔≫, 119~120면.
20. 칼 맑스, ≪헤겔 법 철학 비판≫, Joseph O'Malley 편집(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1970년), 10면.
21. “최형록의 사론곡필3 _봄바다가 깊기로”, 진보넷 속보란 47833 게시물 , 2014-04-13일자.
22. Charles and Mary Lamb, ≪Tales from Shakespeare≫(Puffin Classics, 2010년), 109~127면.
23.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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