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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 다녀오다


하승우 (청년활동가)

 

앞으로! 앞으로!

 

2015년 11월 14일, 박근혜 정권에 분노한 약 13만 명의 노동자 민중이 민중총궐기로 일어섰다. 차벽과 물대포로 막아선 경찰에 맞서 지도부가 “앞으로!”를 외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지도부의 외침에 따라 앞으로 전진하던 선두 대오와 시위 내내 눈을 괴롭히던 캡사이신 물대포도 기억에 남는다.

 

 

그랬던 것이 벌써 1년이 되었다. 그동안에도 수많은 일이 있었다. 정부가 인양한다고 자신하던 것이 계속 늦춰지고 결국 배에 손상만 입혔다. 백남기 열사를 죽이고선 그 누가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드 배치를 확정하였다. 그렇게 분노가 삭기는커녕 계속 쌓이고 쌓이던 게 1년, 드디어 11월 12일의 아침이 밝았다. 상경할 생각에 밤을 지새우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가는 길은 금속노조 현대위아지회 버스에 낑겨 탔다. 평소 집회에서 따라갈 깃발 하나 없는 무소속인지라 산추련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소속으로 함께하였다. 나 혼자는 아니고, 주변 지인들을 꼬드겨서 ‘산추련 청년위’을 만들어서 갔다. 11월 12일 민중총궐기 참가를 위한 비공식 임시 조직이다. ㅎㅎ

 

민중총궐기 상경 버스부대는 열심히 달리고 달려 오후 2시 30분쯤 서울에 도착하였다. 을지로입구역에서 버스를 내려 경남금속노조 대오와 함께 서울광장 앞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행하는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는 서울광장 안에서 진행하고 있었으나 우리 대오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무대를 모니터 스크린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서울광장은 물론이고 사방팔방 모든 도로에 사람이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반주 없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과 무대 위에서 휘날리는 붉은 깃발은 감동적이었다. 대회 중반에는 한상균 위원장의 투쟁사를 정혜경 부위원장이 대독하였다.

 

“온 국민의 항쟁으로 불법 권력자를 단죄한 역사를 만듭시다”

“지금 이곳 민심은 2선 후퇴, 거국내각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받아라. 박근혜를 체포하고 구속하라. 죄짓고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의 민심입니다”

“역사로부터 배워야 하지만 잘못은 되풀이돼서는 안됩니다. 4.19 혁명은 박정희 군사 쿠데타로 뒤집어지며 미완의 혁명으로 기록됐습니다. 87년 위대한 민주항쟁이었지만,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오역의 역사였습니다. 죽 쒀서 개 줄 수 없습니다. 박근혜 퇴진 항쟁은 민중이 주최가 된 더 큰 민주주의로 계속되어야 합니다”

“야당과 대권 주자들에게 민주노총 위원장으로서 요구합니다. ‘너희들은 싸우고, 열매는 우리가 가져가겠다’는 정치적 사욕을 버려야 합니다”

 

이후 대회가 끝나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성질 급한 산추련 청년위는 원래 대오의 깃발을 저 뒤에 둔 채 앞서 나갔다. 수십만 명의 행진 대오가 서울 시내를 돌며 구호를 외쳤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가자, 청와대로! - 행진을 하며 만나는 시민들 모두 시위대를 향해 큰 박수갈채를 보내 주었다. 구호를 같이 따라 외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저번 11월 14일 총궐기 때는 주변 시민들이 무관심했던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정국이 바뀌긴 바뀌었다. 서울에 10만 대오가 모여 좋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수십 만이 우습게 되었다. 나는 정말 태어날 때를 잘 골랐다. 어떤동지는 내게 지금 이 광경을 보기 위해 20년을 기다려야했다고 말했는데, 나는 태어나 20살채우고 나니 ‘혁명전야(?)’가 눈앞에 있다!

세월호 학살에 희생된 단원고 친구들도 이 광경을 같이 보고 있기를.

 

지나가며 보니 청와대로 가는 길들은 차벽과 의경들이 막고 있었다. 행진을 계속하여 광화문에 도착하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어느 방향의 도로를 보아도 대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광화문 앞 대로에 모여서 다 같이 투쟁가를 제창하였다. 광화문은 이미 흡사 해방구와도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100만 대오의 함성이 주는 감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여러 구호와 투쟁사도 이어졌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박근혜를 구속하라! … 그러다 한 발언자가 외쳤다. “박근혜를 타도하자!”- 구호를 외친 뒤 사회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드디어 타도가 나왔습니다!” 나도 하야하라는 말보다는 ‘타도하자’ 혹은 ‘처단하자’ 라는 구호를 좋아한다. 지 스스로 내려와선 안 된다. 민중이 자신의 손으로 끌어내려야한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문화제가 진행 중이었는데, 산추련 청년위가 다시 원래 대오로 돌아왔을 땐 이미 사람이 꽉 차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앉아서 간단히 밥을 먹으면서 광화문 앞에서 간이 집회를 하였다. 사람들의 자유발언 등이 이어졌다.

 

저녁 9시쯤 되어 경남 금속노조는 이만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보아하니 부산 쪽 단체도 거의 다 빠지고 없었다. 다만 나는 계속 남아 있기로 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적어도 1박 정도는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노동자 대오는 더더욱. 대오 후미에서 시민들 속에 묻혀 있다가 저녁에 땡하고 그냥 갈 거면 힘들게 서울까지 왜가는 것인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노동자 대오가 앞장서야한다. 선두에 서서 싸우고 대중을 이끌어야한다.

 

같이 온 사람들과 이별한 후 어디로 갈 지를 생각하였다. 서울 지리도 잘 모르고 다른 곳의 상황도 알기 힘들어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곳이 하나밖에 없었다. 청와대. 지도 어플을 키고 청와대로 가는 가까운 루트를 찾아서 갔다. 다른 사람들 생각도 다 비슷비슷한지, 청와대로 가는 길 중 내자동 사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볼려 해도 앞으로 가기가 힘들었다. 어찌 어찌 비벼 들어가 보니 역시 차벽과 차벽앞에 나온 경찰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다 싶어 구호를 외치며 조금씩 대오 앞으로 갔다.

 

그런데 시위대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태극기가 몇 개보이는가 싶더니 역시나 그놈의 평화 프레임이 짙게 깔려 있었다. 경찰이 ‘비폭력’이라 외치니 따라 외치고, 누가 차벽위에 올라가니 내려오라 욕하고, 누가 방패를 뺏으면 방패를 돌려주라 욕하고, 누가 경찰이랑 싸우니 도리어 경찰다친 거 아니냐고 걱정하고…이러한 분위기는 애국가를 부르면서 절정에 달하였다. 뒤에서 한 남성이 “여러분, 애국가 4절까지 부릅시다!” 라고 외쳤다. 그가 일베충인지 박사모인지 아니면 순진한 ‘애국시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한마디로 인해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긴 그가 누구던 간에 시위대의 의식 수준이 딱 그 정도인 것이 잘못이다. 도중 나처럼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지 옆에서 “애국가는 백남기에 대한 모독이다!”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나도 용기를 얻어 “애국가 부르지 맙시다!”, “백남기 열사가 국가의 폭력으로 돌아가셨는데 애국가를 부르는 게 말이 됩니까!” 라고 외쳤다. 내가 또 외치는 목소리가 큰 편이라 애국가 부르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내 주변에서는 애국가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나 대오 뒤쪽까지는 어쩔 수 없었는지 자꾸만 애국가가 들려왔다. 정말 답답한 순간이었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 나라에 충성할 거면 대체집회엔 왜 나왔는가!

 

나 말고도 이따금 “애국가 좀 그만 부르지…”하고 짜증을 내는 사람이 있었으나 분위기 전체를 바꾸지는 못하였다. 조금 지나서 나를 포함한 몇 명이 같이 임을 향한 행진곡을 불렀는데 이 역시 일부에 그쳤다. 집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이 많아 가사를 몰랐으리라 추측해 본다.
시간이 흐르니 차벽위에 한두 명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화시위 프레임 속에서 차벽을 뚫을 일은 요원해 보였고 나는 ‘평화’에 지쳐대오 뒤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잠시 머리를 식힐 겸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무대 위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었고, 북쪽광장에는 1박 2일 농성 텐트가 여러 개 펼쳐져 있었다. 사람이 많이 빠져 한산한 거리를 걸으며 잠시 쉬다가, ‘빠질 때 빠지더라도 가장 마지막에 빠져야한다’는 생각에 다시 차벽 앞으로 향했다.

다시 가 보니 차벽 앞에 있던 의경들은 다 물러난 모양이었다. (앞은 시위대, 뒤는 차벽인데 대체 어떻게 물러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평화적인’ 시위대가 물러날 길이라도 터 준 건지…) 많은 사람들이 차벽위로 올라가 있었다. 차벽위의 일부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 잡혀가기도 하였다.

다시 비좁은 틈을 비벼 들어가며 최선두로 갔다. 사람들은 ‘박근혜는 퇴진하라’ 구호에 맞춰 차벽을 두드렸다. 어떤 사람들은 세차게 때리기도 하고, 성질나서 발로 차기도 하였다. 하지만 밧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단한 차벽을 뚫기는 불가능하였다. 그저 “열어라!”라고 외칠 뿐이다. 평화시위 프레임이 얼마나 지독한지 경찰의 불법채증 카메라를 깃대로 치는 것조차도 하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경찰 눈엔 시위대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을까…….

차벽에 가로 막힌 채로 전혀 진전이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지치고, 대오를 이탈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러나 또한 시간이 갈수록 평화시위 프레임도 옅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 스스로가 지치고 답답했기 때문이리라. 몇 시간 전에는 앞의 차벽에 올라타거나 부수려 들면 하지 말라고 욕하던 것이, 점점‘잘한다, 멋지다’라는 말과 환호로 바뀌었다. 적어도 ‘하지마’라는 말은 사그라 들어갔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새벽 2~3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나중에 뉴스를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새벽 3시를 넘어가서는 천여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이 다 빠지고 나자 경찰이 진압작전을 실시하였다.

 

항의를 하고 방패를 막는다고 막아 보았지만 어쩌겠나. 사람 수부터가 얼마 없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방패를 막고 다른 사람이 잡히는 걸 막고 하다가 결국엔 연행을 당하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의경 놈들이 나를 안에 가두고는 안 보이는 데서 때리면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웬 듣도 보도 못한 경찰한 놈이 와선 지가 ‘피해자’고 나는 ‘피의자’라고 한다. 어이가 없다. 나보고 현행범이라 하는데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파쇼정권의 피해자이고 네가 파쇼정권을 비호한 현행범이다’
잡힌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전부 차벽으로 동원해서 남는 게 없어서인지 스타렉스를 타고 서로 이동했다. 가는 도중 경찰 두 세명이 대화하는 걸 잠깐 들어 보니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많이 잡히면 좋겠다”, “100명쯤 잡히면 좋겠다” …

서에 도착해서는 같이 잡힌 몇 명과 인사를 하였다. 피곤하여 좀 쉬고 있는데 동지들이 찾아왔다. 기분이 좋았다. 경찰들이 면회가 안 된다고 씨부렁대서 오래 보지는 못하였다.
동지들에게는 서 안이 뜨뜻하니 잘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새벽이라 수사를 안 하는 것인지 좀 쉬다가 아침에 수갑과 포승줄을 차고 유치장으로 이동하였다. 원래 있던 곳이 중부 경찰서인데 남대문 경찰서의 유치장으로 간다고 한다. 유치장에 가서는 다른 사람들과 따로 혼자 방을 썼다. 서로 입을 맞추는 것을 막기 위함인 것 같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잤지만 한번 자고 나니 너무 지루하고 할 게 없었다. VIP도 아니고 독방도 아니고 뭐하자는 것인지 싶었다. 혼자 앉아서 투쟁가들을 하나씩 작은 소리로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경찰한 명이 나보고 누가 면회를 왔다고 한다. 누군지는 몰랐지만 너무 반가웠다. 면회실에 가 보니 5~6명의 동지들이 와 있는데, 아는 동지도 있고 모르는 동지도 있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마지막에 외친구호는 기억이 난다. “박근혜를! 타도하고! 양심수를! 석방하자! 양심수를! 석방하자! 투쟁!” 그러자 안의 경찰들이 기겁을 해서는 면회를 마치고 동지들이 가고 나서도 계속 씨부렁거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부 경찰서에서 내가 있는 곳을 잘못 알려 주어서 그 동지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때문에 화가 많이 나서 경찰을 붙잡고는

 

 “우리 동지 내놔!!!!”
 “그 동지가 어떤 동지인데 니들이 잡아가!!!!”
라고 외치며 싸웠다고 …정말 대단한 동지들이다. 나도 혹시나 다른 동지가 잡히면 이렇게 해야겠다.

 

이 이후에는 딱히 다른 일이 없었다. 그냥 유치장 안에서 변호사를 접견한 뒤 1차 조사를 받고, 나중에 다시 중부경찰서에 가서 2차 조사를 받고 나왔다. 나는 1차 조사와 2차 조사 모두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래서인지 조사 과정에서 수사관들이 나를 엄청 쪼아 대었다.
나를 담당한 여성 수사관은 처음엔 잘해 주는 척하면서 회유하더니 내가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자 태도가 돌변하였다. 또 다른 한 남성 수사관은 지가 날 조사하는 것도 아니면서 옆에서 반말로 계속 쪼아 대었다.

 

“난 니들한테 악감정 없어. 다 법적으로 하는 거야”
(이 말을 한 작자가 제일 악감정 있어 보였다)

“자꾸 이러면 또 조사 받아야 한다”

“100만 명이 모여서 한 명도 안 잡혔으면 기네스북에 올랐을 건데
평화시위의 의의를 니들이 부순 거야”

“아무리 그래도 시위는 합법적으로 해야지, 엉? 법적으로.”

     “나중에 뉴스를 봐라. 댓글에서 니들을 얼마나 욕하고 있는지”
…….
다른 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우리를 욕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서 슬펐다. 나보고 ‘프락치’라느니, ‘시위대를 욕 먹이는 자들’이라느니 … 답답할 따름이다. 언제까지 평화시위 프레임에 갇혀있을 것인가.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평화시위’를 하면 누가 이득을 보는가…그리고 다 떠나서 자신이 ‘평화시위’를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앞장서서 싸우는 사람을 욕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내가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ㅎㅎ)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선언의 <선을 넘는다> 라는 것이 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좋아하는데 요즘 같은 때에 특히나 더 의미가 있다.

 

자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간다 / 우릴 가두고 막아선 그 선을 넘는다
마침내 가야할 노동해방 세상 / 너희가 쳐 놓은 선 넘어 세상 / 온 몸뚱이로 부딪쳐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