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혁 언론노조 KBS본부 경남지부장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 광장에서 KBS와 MBC는 국정농단의 공범으로 지목됐다. 언론이 정부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제대로 했다면 나라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 하는 비판을 넘어선 날선 질책이 KBS를 향했다. 역사 미화와 정권 찬양, 진실을 외면한 보도와 정부 선전 프로그램이 지난 정권을 떠받쳤던 한 축이었던 것을 국민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정농단 사태가 그것을 더 선명하게 보여줬을 뿐이다.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라며 촛불을 들고 나선 시민들로부터 KBS는 텔레비전에서 외면 받고 현장에서 조롱당했다. 권력을 향한 비판 기능이 무뎌진 KBS가 국민의 편이라고 여기는 국민이 없었기 때문이다. KBS에 대해 국민들은 이미 심판을 내렸다.
그래서 바꿔야 한다
KBS에는 방송을 사유화하려는 권력에 조응한 적폐가 쌓여 있다. 그 정점에 고대영 사장이 있다. 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먼저 사람을 바꾸는 일일 것이다. KBS 대다수의 구성원(전국언론노조 KBS본부, KBS노동조합)이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제 역할을 하기 위해 고대영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KBS본부노조(새노조) 2천 명의 조합원이 9월 4일 파업에 돌입한 지 4주차에 접어들었다. 채널 7번과 9번에서 나오는 방송 콘텐츠를 사장이 직접 만드는 것도 아닌데 KBS가 망가진 모든 책임을 사장에게 돌리는 것도 염치없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염치 불구하고 사장의 퇴진 없이는 KBS가 바뀔 수 없다는 절박함이 조합원들을 파업에 나선 이유이다. 사장 퇴진 외에는 다른 출구를 염두 하지 않은 ‘끝장파업’이다. KBS 구성원 스스로 방송을 바꿔내야 한다는 건강한 열망과 더 늦으면 안 된다는 염치가 남아 있어서다. 그 동안 KBS가 공영방송 역할을 하지 못 했다는 자기 고백과 함께 반성하는 마음으로 국민들 앞에 설 수밖에 없다. 이는 김장겸 사장 퇴진을 요구가 불붙은 MBC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파업은 KBS를 다시 국민의 방송으로 돌려놓겠다는 다짐이자, 공영방송을 망친 사장을 쫓아내려는 실천이다.
사장 한 명이 나간다고 될 일인가
하지만, 변화를 위한 첫걸음을 떼야 한다. 다시 말해 사장 퇴진 없이는 국정농단 공범으로 지목된 KBS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항간에 떠돌던 비선실세 최순실이 신문 지면에 활자화되어도 “최순실이 대통령 측근이야? 측근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 라는 것이 고대영 사장이 임명한 보도국장이 편집회의 석상에서 했다는 말이었다. 보도 참사라고 규정할 만큼 국정농단 전모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무기력했던 KBS 보도를 이끌었던 그 보도국장을 고대영 사장은 지난 8월 대전총국장으로 영전시켰다. 지난 7월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성주시민들의 시위 현장에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는 뉴스가 방송된 과정 그렇다. 대구총국의 현장 취재기자는 확인되지 않은 팩트라고 수차례 보고했지만 현장 기자를 배제한 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뉴스는 제작됐다. 전국기자협회는 ‘안보에 있어서는 다른 목소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고대영 사장의 임원회의 발언에서 비롯된 사실상의 보도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보고 사내 게시판을 통해 문제제기를 했지만 돌아온 것은 전국기자협회장과 대구기자협회장 등에 대한 특별감사였다. 이 같은 일들은 지역에서도 언제, 어느 때고 교묘하게 행해질 수 있다. 정권 눈치보기로 제작 자율성을 침해하는 많은 사례들로 KBS는 지난 9년 동안 신뢰도와 영향력 추락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고대영 사장 취임 뒤 급격한 채널 경쟁력 하락이 지표로 나타나고 있다. 사장이 바뀐다고 뉴스가 하루아침에 바뀌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지난 9년 동안, 그리고 최근 고대영 사장이 이끄는 KBS에서 사라진 취재기자와 데스크 간의 토론, 합리적인 의사결정, 소통의 길은 점차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그것이 KBS가 저널리즘의 본연의 기능을 하면서 신뢰도와 영향력 1위 언론사로 인정받던 그때의 KBS로 돌아가는 짧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이제 와서 숟가락을 얹나
지금껏 KBS 사람들은 무엇을 했냐는 지적은 부끄러운 대목이다. 그동안 내부에서 징계를 감수하며 끊임없이 싸웠고, 세월호 보도 개입 의혹으로 길환영 사장을 몰아내는 성과도 있었지만 결국 KBS를 권력에서 떼어 놓지 못하고 지금에 위치해 있다. 2010년 우리 새노조가 만들어지고 잇따른 파업에서 우리는 늘 국민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파업에 나서며 “KBS를 살리겠습니다.” “RESET KBS! 국민만이 주인이다”, 또 “KBS는 국민의 방송이다.”라며 반복되는 구호로써 국민에게 돌아가겠다고 결의를 불태웠는데 결과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셈이다. 이번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국민들에게 호소하게 됐다. “다시 KBS, 국민의 방송으로” 돌려놓겠다는 약속, 이번 파업의 슬로건이다. 수신료를 주요 재원으로 하는 KBS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국민의 것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이치를 KBS는 거슬러 왔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었다고 사장 퇴진을 요구하고 KBS를 바꾸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다. 외부에 알려질 기회가 없었지만 고대영 사장 퇴진요구는 정권이 바뀌기 전인 지난해부터 사내에서 이미 전개되어 온 싸움이다. 지난 9년 동안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보도국장과 해설위원실장, 보도본부장 등 요직을 거치며 KBS 저널리즘을 망친 고대영 사장에 대한 불신임은 정권이 바뀌자 터져 나온 목소리가 아닌 것이다. 고대영 사장이 승승장구하는 지난 정권에서 KBS와 MBC 방송을 사유화하고 장악하기 위해 국정원이 개입하고 청와대가 관여한 실체가 드러나며 KBS에 대한 개혁의 요구는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우리는 고대영 사장 퇴진 투쟁 승리 이후, KBS 내 적폐 인사들을 청산하고 현 정권의 권력으로부터 KBS가 독립하는 제도적 장치인 방송법 개정을 반드시 이뤄야 하는 숙제까지 안고 있다.
내가 기자로 출입하는 통영과 거제에서도 파업 동안 가치 있는 뉴스 현장, 제보가 많았다. 파업이라서 그들에게 현장 취재가 어렵다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기자, PD가 취재와 제작 현장을 떠나고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내려놓는 것은 어느 현장 노동자의 파업처럼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방송을 잠시 멈추고서라도 우리의 힘으로 사장을 퇴진 시켜야겠다. 시청자들에게 계속 불량품을 팔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파업으로 뉴스가 파행으로 방송되고 프로그램이 결방되고 있지만 도민들로부터 ‘KBS 안 봐서 관심 없다’, 또는 ‘다른 종편 보면 돼지’ 하는 말을 수차례 들었다. 현재 KBS 위상을 대변하는 말이어서 마음이 아프지만 절실함은 커진다.
다시 KBS를 국민의 방송으로 돌려놓는 이번 싸움은 사장이 바뀌더라도 계속 해야 할 싸움인 것이다. 그 동안 시청자, 국민들도 공영방송 KBS를 되찾아 오겠다는 주인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시면 된다.
* 마창산추련 소식지 102호 실린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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