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의 삶 :
아인슈타인의 마음과 불성을 통해서 삶의 방향을 찾는다
최형록 (2018-05-14)
1. 남북 평화와 번영의 시대 인공지능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는 경향은 불가피한 일인가?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to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 John Lennon, ‘Imagine’
상상해보세요 천국이 없다는 것을
해보면 쉽답니다
우리 발밑에 지옥이란 없지요
우리 머리위에는 오직 하늘이 있을 뿐
(톨스토이는 천국이란 우리들 마음속에 있다고 말했지요)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천년의 세월이 가더라도 옛일이 아니며 만년의 세월이 계속되어도 그 길이는 지금 이다 歷千去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상상해보세요 나라가 없는 세상을
해보면 어렵지 않답니다
죽여야 할 어떤 것도, 위해서 죽어야할 어떤 것도 없지요
그리고 종교 없는 세상 역시 그렇지요
(1980년 광주에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내며 베트남 퐁닛에서 “자유세계”를 위해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했지요)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화냥년”을 박해하던 시기 네덜란드의 스피노자는 “사상의 자유가 없는 곳에 평화란 없다”고 유태인 동족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히 주장했지요)
상상해보세요 사유 재산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시나요
탐욕스러울 필요도 굶주릴 필요도 없는 세상을
모든 인간이 형제자매인 세상을
(헌법상 권리인 노동자의 노조 결성권 행사를 헌법 파괴적이며 반인륜적으로 방해하고 파괴해온 재벌 삼성의 이건희는 왜 인류 사상 전무후무한, 차명계좌를 20개도 아닌 200개도 아닌 2000개를 넘게 가지고 있는 한편 라움 미술관 관장인 본처를 두고 성매매도 즐기는 삶에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레닌은 “러시아에 Saint Francisco가 10명만 있었더라면 혁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텐데...”라고 말했지요)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세상 전체를 공유하고 있는 세상을
아마 내가 몽상가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내가 유일한 몽상가는 아니랍니다
(의사의 길이 아니라 “사회적 의학으로서 사회 혁명가의 길”을 택한 Che Guevara는 “현실주의자가 되자, 동시에 불가능을 꿈꾸자” 라고, Martin Luther King Jr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고 말하고 행동했지요)
나는 희망합니다 어느 날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리라고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되겠지요
(불교에서는 먼지 하나에 온 세계가 포함되어있다-一微塵中含十方-하나가 다수이며 다수가 하나다-一卽多 多卽一-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현대 천체 물리학은 뭇 생명의 근원이 우주의 먼지-Cosmic Dust임을 밝혔지요)
좋아하는 팝송들 중 하나인 존레논의 “상상해보세요”입니다. 몽상처럼 들리는 생각이 사실은 통찰력 있는(In-Sight-ful) 대담한 모험심입니다. 존레넌의 꿈은 범속한 가치관과 통념들 너머를 생각, 상상하는 꿈입니다.
문 대통령: 남측으로 오셨는데 저는 언제쯤(북쪽으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김 위원장: 그럼 지금 넘어가 볼까요? (두 정상 군사 분계선 넘었다가 다시 건너옴)1)
보수세력 80% 역시 남북 두 정상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감격스런 순간이자 향후 통일의 대경사가 일어날 때 남북 민중이 그리고 평화를 갈구하는 전 세계인들이 “문재인의 마음 김정은의 기억”으로 감격하게 될 장면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초미의 관심사 둘 중 하나인 남북한의 종정협정과 평화협정으로 향하는 노력은 기대할만합니다. 그런반면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는 세대의 생존의 문제이자 이 세대의 꿈과 직결되는 고용 불안정이라는 과제는 분단극복이라는 과제에 비하면 오리무중입니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에서 김일성 대학교와 교류를 추진하자는 청년다운 제안은 부결되었다는군요. 그 이유는 “생존경쟁”에 그런 낭만적 일을 할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2)
천재 기사 이세돌을 꺾은 알파고라는 인공지능에 대한 경이로움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도 합니다. 아날로그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세대 역시 공감하는 불편함이 이동 전화기로 기업에 전화통화를 할 때입니다. 그런 까닭에 개그 콘서트에서도 예전 Voice Fishing의 경우처럼 이런 불편함을 소재로 다루고 있더군요. 요컨대 인공지능에 기반한 4차 산업혁명을 자본가 계급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야합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일상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운데 자본가 계급이 주도하고 국가권력이 그런 경향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할 경우 과연 인간의 노동의 보람과 “자아실현”에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애플 조립 공장으로 악명 높은 폭스콘은 로봇을 대거 도입해서 무인공장으로 변신하고 있지요.3) 회사의 노동자 수는 2003년 10만 명→2011년 100만 명→2013년 130만 명으로 증가세에 있다가 2015년 100만 명→2016년 말 87만여 명으로 줄어드는 추세에 있습니다. 자살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자 회사가 심리학자들을 동원해서 제시한 해결책이라는 것이 자살할 경우에 대비해서 매트리스를 설치해놓는 것이었지요. 박근혜-최순실 경제 공동체의 핵심 범죄 집단 삼성이 서비스 노동자 염호석씨의 시신 탈취에 관여한 것은4) 물론 그의 분신을 노조 탈퇴 1인 추가라는 “전과”로 보고한 사실은5) 총성 없는 자본 대 노동 사이의 일상적 전쟁 상황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같은 언어도단과 그 악질성은 폭스콘의 경우와 얼마나 다를까요?
중국 항저우에서는 무인 레스토랑이 등장했다지요. 휴대폰으로 QR코드 스캔 후 전자 메뉴판으로 주문한 다음 배식창구에서 비번을 입력하면 음식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무인 검진은 인공지능 의사와 대화해서 진단을 받고 병원 의사에 통보하는 한편 자판기에서 약을 구매하는 것입니다. 택배 역시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드론으로 배송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공사 현장에서는 로봇이 용접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은 그 천성(天性이자 賤性)이 저임금과 노조의 어용성을 추구합니다. 그런 만큼 아예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다면 좋은 일이지요. 옥스퍼드 대학교의 Carl Benedikt와 Michael Osborn은 2013년 9월 보고서에서 향후 20년 내 미국에서 모든 일자리의 거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며 심지어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들 역시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6) 프로그래머들이 갈수록 의존하고 있는 “자가 정정”(Self-correcting) 코드와 일에서 학습할 수 있는 기계들을 만들어내고 있기에 그런 사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을 1929년 대공황을 벗어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한 John M.Keynes는 1930년 “우리 손자녀들 시대의 경제적 가능성들”에서 “기술적 실업”이라며 예상했습니다. 실제 이 때 철로의 기계화로 무려 약 50만 명이 실업하게 됩니다.
케인즈에 앞서 Karl Marx는 ≪자본≫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불변자본/가변자본의 비율)가 높아지며 그에 따라 산업”예비군“이 양산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지요.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연구는 현재 제조업 공정의 10%를 기계가 수행하고 있는데 2025년경에는 25%까지 책임지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산업에서 용접공의 시간 당 비용은 $25임에 비해서 로봇은 $8이면 된디는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컴퓨터로 말라리아 치료 합성물을 발견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호텔에서 데스크 체크와 청소를 로봇으로 처리하고 있지요. 인간 사이의 소외가 갈수록 확대되어 가고 있는 시대에 MIT의 개인용 로봇 그룹의 Synthia Breazeal은 크라우드 펀딩과 벤처 캐피탈 펀딩으로 세계 최초의 사회성 로봇을 출시했습니다. 컴퓨터의 성능이 18개월마다 두 배로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을 감안하면 이런 경향은 가속화하겠지요.
본 강의에서는 자본이 주도하는 인공지능 기반 제 4차 산업혁명이 야기할 실업과 삶의 황폐화를 저지하고 인공지능을 비롯한 제반 기술-과학(Techno Science)을 맑스적 원리에 따라 이용할 수 있음을 아인슈타인의 “왜 사회주의인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며 소련의 AI에 대한 관점의 변화와 활용 그리고 Allende 대통령의 칠레 사회주의 정권에서 미완으로 좌절된 Cybersyn 체제를 살펴보고 창의적 교육 그리고 과학과 종교의 관계와 윤리적 인간성을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이에 앞서 소인배 근성이 강한 한국인들이 간과하는 “숲을 보는 관점”이라는 입장에서 오늘날 2018년 현재 한국사회가 어떤 역사적 상황에 처해 있는지 간단히 성찰하고자 합니다.
2. 역사를 둘러싼 기억 전쟁과 긴밀한 국내외 모순
오늘날 삶의 상황을 2094년 동학농민 전쟁 200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19세기 말 서세동점(西勢東漸 : 유럽과 미국 제국주의 세력의 아시아 침략)시대에 비해서 내우외환(內憂外患)이 덜 한 시대라고 볼 수 있을까?
첫째, 한반도가 지정학적 제약이라는 강한 전자기장 속에 있다는 점에서 19세기 반봉건-반식민지 이던 중국의 대국굴기(大國掘起)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20세기를 미국의 세기가 아니라 “소련의 세기”(Moshe Lewin)라고 보는 관점에서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로 볼 수 있다.7) 이명박근혜의 노인성 치매상태를 벗어나 2016-2017의 “촛불항쟁”의 “젊은 혈기”의 성과인 2018-04-27 남북 정상회담이 문재인 정부의 신중한 접근과 김정은 지도부의 대담함으로 한반도 평화의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한편 그런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은 주요한 변수다. 당-국가 체제의 강력한 집중력을 가지고 “자본주의 대장정” 중인 중국의 부르주아지는 남한 부르주아지의 막강한 상대이며 중국 노동자-민중의 해방운동은 남한은 물론 한반도 노동자-민중운동의 향방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구 10만 명당 천재가 1인 정도 있다는 지능 연구를 감안할 때 남한 인구를 5천 만으로 잡는다면 천재의 숫자는 500명인 반면 중국 인구를 14억 명으로 잡는다면 14000 명이나 된다. 국가 인재교육과 적정한 배치라는 점에서 그 차이는 산술적인 28배 이상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세계적인 삼성의 스마트폰의 중국시장 점유율이 작년 4분기에 0.8% 밖에 되지 않음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우려가 서서히 악몽으로 나타나는 한 일례라고 볼 수 있다.8)
북한이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한 이유는 “상식” 그 자체다.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보자. 한국전쟁 후 소련군은 철수했으나 미군은 철수하지 않았으며 1958년부터1991년 기간 핵무기를 배치했는데 1967년에는 핵탄두의 수가 950개에 달했다.9) 같은 기간 북한에 소련이 핵무기를 배치한 일이 결코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한반도 핵문제의 피의자가 어느 쪽인지는 지극히 분명하다. 그리고 한미 간 군사훈련이 매년 두 차례 진행되는데 단 한번이라도 북한-중국 혹은 북한-소련의 합동 군사훈련이 진행된 적이 있는가?
둘째, 19세기 조선왕조는 황현의 ≪매천야록≫과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이 전하고 있듯이 지배계급의 부정부패와 무능이 극에 달해있었다. 이를테면 과거시험 문제의 답안지가 매매되어 낙폭전(落幅錢)이라는 부수입을 관리들이 챙기는가 하면 시험장 내에서 선비가 술과 사탕을 먹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이득을 노리는 일인들을 인도하는 간사한 놈들을 보며 매천은 “우리나라 사람의 어리석음이여”라고 한탄하고 있다.10) ≪금수회의록≫에서 무장공자(無腸公子: 게)는 이렇게 한탄한다. “남의 압제를 받아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되 깨닫고 분한 마음 없고 남에게 그렇게 욕을 보아도 노여워 할 줄 모르고 종노릇하기만 좋게 여기고 달게 여기며 관리의 무례한 압박을 당하여도 자유를 찾을 생각이 도무지 없으니 이것이 창자 있는 사람들이라 하겠소?” 조선사회 현실을 다각도로 보고서 안국선은 “사람이 떨어져서 짐승의 아래가 되고 짐승이 도리어 사람보다 상등이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을꼬?”라고 탄식하고 있다.11)
오늘날 남한 지배계급의 몰골 또한 이와 얼마나 다를까? 청화(禍)대의 세든 년이 진실을 요구받고 있는 순실과 국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안보 보좌관 김관진이라는 놈이 사드배치에 앞장서고 그런 반헌법적-반민중적 역적 놈의 구속영장을 판사가 기각하는가 하면 민중적 해커단체 Anonymous(익명의 라는 뜻)의 가면을 쓰고 봉건영주 조씨일가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대한항공 노동자들의 시위 등등!
“촛불혁명”이라는 가당챦은 성격규정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1987년 “노동자-시민 대투쟁”이래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한반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도록 되었는지를 전반적으로 성찰하는 일이다. 국내 자본주의 모순은 미국 제국주의에 더해서 사회주의로부터 국가 자본주의로 퇴행하고 있는 중국이라는 새로운 초강대국과의 경쟁으로 더욱 심화-확대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는 지도사상으로서 동학이 민중의 소망을 집결시켜 그 소망을 폭정으로부터 민중을 구하며 제국주의 왜놈과 서양을 배척한다(除暴救民 斥洋斥倭)는 정치적 구호로 민중을 조직하여 반봉건-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한 역사에 비추어 오늘날 상황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셋째, 범죄 기업 삼성 이씨 왕조의 무소불위한 반 민중성을 강화시켜주는 합병을 불법적으로 지원하고 민중을 여론 조작의 대상으로 한 댓글공작 그리고 산천을 마루타처럼 난도질하는 사(四-死-詐-邪)대강 사업을 벌이는데 책임이 막중한 파시스트 정당이 그 수괴들이 형을 언도 받고 수사가 진행되는 정도에 이르렀음에도 제 1 야당으로 “의회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은 대단히 심각한 위기가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행정의 “독립성-공정성-투명성”을 국민에게 약속했다. 여기서 공정성-투명성은 부정부패 척결의 의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새해가 되면 전혀 불필요한 도로작업은 건설사들의 로비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합법을 가장한 도둑질이라고 본다. “독립성”이란 자유주의적 3권 분립 체제의 견제와 균형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유(파시스트) 한국당(매국노 당)그리고 <조선일보>의 신조-일부는 자기위선임을 알고 있을-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 바로 그것이다. 특히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자유를 공허하게 만드는 재벌의 경제논리를 비판하는 것을 이 민주파괴 세력들은 항상 ”정치논리로 경제문제를 다루려 한다“고 강변한다. 이런 반 현실적-가상 현실적 논리는 자본주의 부르주아 체제의 ”자유계약“론이라는 허구의 산물이다.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의 기업에 취업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자유“가 가능한 일인가? 먹고 사는 문제는 경제문제일 뿐인가? 생존의 문제는 경제문제인 동시에 정치문제이며 문화문제인 인간 삶의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이미 지적했다시피 “촛불혁명”이라는 현실인식의 “가상화폐”론적 오류에서 벗어나야한다. 참을 수 없는 “촛불의 분노”를 정치이성의 에너지로 변환시킬 것임을 공언한 문재인 정부의 국정지침은 “경제 민주화”다.12) 헌법 제 119조 제 1항이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규정이라면 제 2항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폐해를 예방하는 “경제 민주화” 규정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얼마나 그 민주화를 진척시키고 있는가? 대통령 후보시절 “통신비 인하”를 공약(公約)했건만 공약(空約)이 되지 않았는가? 청년 일자리를 공무원을 늘림으로써 해결하겠다는 정책 방향은 오늘날 사회 양극화의 원천인 남한 천민자본주의의 주역 “재벌체제”를 손보지 않고 회피하는 것이다.
강도 귀족 놈 이재용에 대한 2심에서 서울 고법 형사 13부(재판장 정형식)는 합병-순환출자 고리 해소과정에 사이코패스 대통령이 지원한 사실이 드러났음을 인정하면서도 범죄적 정경유착이 없었다고 무죄를 선고하는 “법비(法匪)” 행위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13) 한비자의 경구가 떠오른다. “법의 뜻은 알지 못하면서 법조문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사람은 비록 법 지식이 넓더라도 소송에 임해서는 반드시 혼란에 빠질 뿐이다”(不知法之義 而正法之數者 雖博臨事必難).
삼성전자 현장 작업환경이 원인이 되어 백혈병 등이 발병한 것이 거의 확실함을 규명하고자 관련 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으나 삼성은 “영업비밀”을 구실로 제출을 거부하고 있으며 산업 통상 자원부는 아마 삼성의 강력한 로비로 삼성 측을 편들고 있는가 하면 “촛불이 혁명이라면” 당연히 폐간해야할 남한 천민 자본가 계급의 아가리 <조선일보>는 그 “범죄적 노동환경과 유해물질에 대한 비밀”을 공개하면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에서 불리해짐을 구실로 반인륜적 악덕기업 삼성 편을 게거품 물고 대변하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한 파시스트 놈 이병철의 계승자들과 그 패거리 경영자라는 놈들은 그룹 차원에서“노조파괴”를 획책하며 삼성전자는 “노조와해 총괄 TF팀”까지 조직했다는 문건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14) 이런 반 헌법적-불법행위에 관련된 경영자들에 대한 구속요구를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나라!
2018년 남한 노동자-민중은 이명박근혜라는 반동의 10년뿐만이 아니라 1987년 체제를 넘어, 파시스트 일본 군국주의의 한국판 박정희의 경제동물적 조국 근대화라는 미망을 극복하는 문화-정치-경제 체제를 구상하고 반드시 실현하려 노력해야할 역사적 전환기에 서 있는 것이다. “촛불 항쟁”은 합리적 보수(?)와 자유주의라는 틀 내, 전신이 암세포 덩어리 그 자체인 자본주의라는, “인간성의 악의 측면에 매몰되며 온전한 인간다움의 창조과정을 가로막는, 역사적 병사 단계에 돌입한 체제” 내에서 진행된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2016년 10월 말부터 2017년 3월 10일 얼음공주의 탄핵에 이르기 까지 연인원 1700만 명이 엄동설한을 견디는 가운데 항쟁민중의 뜨거운 가슴과 자기 정당성의 확신을 재삼재사 확인하는 정서와 정치-도덕적 이성을 간명하게 표현한 노래.
그런 한편 교회를 사유화하고 여신도들을 성폭행하는 이재록 같은 목사 놈들에게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경구를 말하고 김기춘과 우병우에게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닌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慾 勿施於人)는 경구를 말하고 전두환에게 악업을 짓지 말고 선행을 실천하며 그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이 가르치는 바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를 말한다고 효과가 있으며 성 프란치스코 같은 인물처럼 살려는 사람들이 놀랍도록 늘어나고 “사상의 자유가 없는 곳에 평화란 없다” 경고한 스피노자적 사회가 자발적으로 탄생하며 법정 스님 같은 분들이 흔한 불국토가 조만간 우리 눈앞에 설경처럼 펼쳐질까?
이런 인간다움의 윤리-도덕적 원리를 구체적 현실로 형성해나가는 데는 세속적-정치 이성적 사상의 방편(Skilled Means)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런 성격의 사상이 바로 2018년 탄생 200주년을 맞이한 Karl Marx의 사상이다. 2005년 영국 국영방송 BBC가 3400명을 대상으로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1위를 차지한 인물이 바로 미완의 기념비적 저작 ≪자본≫(Das Kapital-Capital)의 저자 칼 마르크스 였다. 그의 지지율은 27.93%였음에 비해서 2위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2.67%의 지지를 받은 데이빗 흄 이었다.
“촛불항쟁”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지도사상으로 보다 깊고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어 노동자-민중이 이성적 자기 정체성과 자기 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을 품고 연대-단결할 때 “촛불혁명”으로 활기차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3. 아인슈타인의 “왜 사회주의인가?”(Why Socialism)
새벽녘 날이 밝아오자 난 달리고 있죠
태양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에서
태양이여 내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해주세요
이민국에 드러나지 않도록
내 마음이 느끼는 이 고통은 사랑으로 상처받은 거예요
난 당신과 당신 품을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의 입맞춤과 사랑을 기다리면서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 건가요?
희망을 찾는 것이 내 바램이어요
난 혼자가 되어버린거죠 혼자가 되었어요
사막을 떠도는 도망자처럼 난 가고 있어요
몇일 몇주 몇 달이 지나 당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어요
곧 당신은 돈을 받을실 거예요
당신이 내 곁 가까이 있으면 좋겠어요
많은 일 때문에 시간이 버겁지만
난 당신이 웃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신 사랑 없이 사는 건 의미 없는 삶이예요
도망자처럼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 건가요?
희망을 찾는 것이 내 바램이어요
난 혼자가 되어버린거죠 혼자가 되었어요
사막을 떠도는 도망자처럼 난 가고 있어요
난 어디로 가야만 하는 건가요?
희망을 찾는 것이 내 바램이예요
난 혼자가 되어버린거죠 혼자가 되었어요
사막을 떠도는 도망자처럼 난 가고 있어요
- 티시 히노호사, ‘Donde Voy’ 난 어디로 가야만 하나요?
“레닌에게서 나는 한 인간을 존경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희생해서 자신의 온 에너지를 사회정의 실현에 바쳤다. 나는 그의 방법이 권할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 그와 같은 인물들이 인류의 양심의 수호자들이자 혁신자들이라는 것”.
아인슈타인이 레닌 별세 5주년에 쓴 추도사다.18) “그가 (이스라엘 대통령직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대응할는지 말해주시오. 난 그에게 그 직을 제안해야했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그가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난처해질 것이오.” 1952년 데이빗 벤 구리온이 나중에 미국 대사가 된 이차크 나본에게 아인슈타인에게 대통령직 제안의 딜레마를 말한 것이다. ≪타임≫지가 20세기의 인물로 간디를 제치고 선정한 아인슈타인은 이런 인물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을 반대한, 소련의 M. Rostropovich(우리나라의 세계적 바이얼린 연주자 장영주의 스승)와 바하의 무반주 첼로 연주로 쌍벽을 이루는 Pablo Casals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확실히 그는 위대한 석학이다. 그런데 그는 그 이상을 넘어 인간의 양심의 기둥이다...”19) 이런 인류의 위대한 사표가 주장한 사회주의 사상을 간략히 살펴보자.
3.1.경제-사회적 쟁점들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 견해를 밝히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 그 원인은 무엇일까? 탈출구는 있는 것일까? (99~100면) 부분.
아인슈타인은 자본주의적 경제 환원론을 비판하고 있다. 경제-정치(전쟁은 정치의 다른 수단-Clausewiz)-종교(문화)가 상호작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발전의 포식적(捕食的)단계에 있다면서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은 정확히 말해서 인간발전의 포식적 단계를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서 조명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옳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사회-윤리적 목표를 지향한다”며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동물적 인간관(Homo Economikus)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인간관계가 바로 “자본주의적 소외”다.
마르크스는 ≪경제-철학 원고≫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하는 4대 소외를 지적하고 있다.16)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자연으로부터의 소외-자신으로부터의 소외-인간으로부터의 소외. 특히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란 “인간(노동자)은 오로지 자신의 동물적 기능들-먹는 일, 마시는 일, 생식 혹은 대체로 자신의 거주지에서만-에 있어서만 자유로운 행동을 하고 있음을 느끼는 반면, 인간적 기능에 있어서는 동물에 불과함을 느낀다”. 그리고 “당신의 존재가 미미할수록 당신은 자신의 삶을 덜 표현하게 되며 당신이 소유를 많이 하게 되면 그럴수록 당신의 삶의 소외 정도는 확대되며 소외된 삶을 저장하게 된다....그러므로 온갖 열정과 행위는 탐욕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노동자는 오로지 소유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허용될 뿐이다.” 이런 사상을 Erich Fromm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Herbert Marcuse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계승-발전시킨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떤 노동자는 자신의 꿈이 “먹고 살면서 일하는 것이 고되게 느껴지지 않는 모두에게 즐거움으로 다가가는 생활”이라고 밝힌다. 그는 이런 꿈을 품고 있지만 일상은 고통 그 자체다. “이 돈으로 살아봐. 이건 사는 게 아니라고...힘겨움의 무게도 다르다”. “배우자나 자식이 힘들게” 하는 것 역시 고통의 진원들 중 하나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그는 “소외”를 날카롭게 자각하고 있다. “돈이 뭔 죄가 있을까?...돈을 굴리는 인간이 문제지. ” 그가 돈이 웬수다라는 번지수가 틀린 통념을 넘어서 있음은 올바른 인간조건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오늘도 힘겹게 힘겹게 울부짖는다....그래서 많이 울었습니다. 펑펑.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전쟁터에 나가 총 맞고 쓰러지는 기분입니다. 오늘은 총이 아니라 대포에 정면을 강타당한 것 같습니다....인생사 새옹지마...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닌 듯합니다, 그렇게 그렇게도 살아내기가 어렵네요.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화병. ...” “이 더러운 세상 쓰러지는 꼴 볼 때까지는 살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아하는 음악, 일, 사람이 없네요....또 다시 눈치 보며 숨죽이며 입 닥치고 살아가는 것은 지금까지로 족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쓰러져도 원 없이 나 하고 싶은 것은 해 보았노라 외마디 비명이라도 질러볼 수 있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인생 너무 비루하고 한심한 삶만 기억될 터니... 잘 버티기, ...제일 잘 하는 버티기...”.
맑스 사상의 전개를 둘러싼 논쟁들 중 주요한 주제가 맑스의 Humanism의 계속성 문제다. ≪자본 읽기≫의 저자 Louis Althusser는 그 사상의 핵심개념인 소외(Alienation)가 “≪자본≫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지만 명백한 오류다. 오히려 ≪Grundrisse≫에서 ≪자본≫에 이르기까지 소외 개념의 밀도가 높아진다.17)
3.2. 인간, 사회적 존재이며 문화적 존재
아인슈타인은 인간은 “사회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런 사회성은 “폐지할 수 없는 자연적 사실”임을 강조한다. 맑스가 인간을 “사회적 제반 관계의 총화(Ensemble)”라고 정의한 것과 동일한 생각이다. 유전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는 한편 구체적 사람 됨됨이는 성장기의 환경-사회구조-사회 전통에 따라서 형성됨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치매로 죽음에 이른 얼음공주의 선배 영국 수상 대처가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본주의 외 대안이란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고 호언장담한 망념과는 대척점에 있는 관점이 아닐 수 없다.
맑스와 아인슈타인의 이런 올바른 관점과 통하는 입장이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이다. 오늘날 남한 사회에 만연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각자도생”은 인간의 이런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 선언≫은 널리 퍼진 왜곡과 정반대인 입장을 서두에서부터 분명히 밝히고 있다. “개인의 발전이 사회발전의 전제조건이며 사회의 발전이 개인의 발전의 전제조건이다”라고. 아인슈타인이 강조하는 “개인의 삶은 “사회”라는 작은 낱말 뒤에 숨겨져 있는, 과거와 현재의 수백 수천만 사람들의 노동과 노동의 성취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부분은 현재 특히 젊은 세대의 어리석은 사고방식에 대한 경종으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우리의 휼륭한 전통을 이해하고 신념화하기만 하더라도 가능한 것이다.
“음식요리는 백성들의 기름이며 세금과 공물 그리고 모든 용품은 죄다 백성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20) 김시습은 ≪십현담 요해≫라는 불교 저작을 쓸 정도로 불교 역시 깊이 탐구하였는데 그의 유학의 민본 사상만으로도 이런 가치관을 품을 수 있었으리라.
이런 전통이 제대로 가정과 학교에서 교육되지 않는 조건은 남한 사회구성체가 “신식민지 국가 독점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한다. “신식민지성”은 군사-외교 영역에서 미 제국주의에 종속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정책의 중요한 일부로서 “식민사관”에 따라 민족문화가 억압된 역사의 “식민지성”을 정리-극복하지 못한 상황으로부터 비롯된다. 해방 후 종일(從日)이 종미(從迷)로 계승되면서 전통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이 국학자들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못한 위에 미 제국주의의 “문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적 “문화 산업”의 힘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일상적 “소외”의 경험과 같은 힘들에 의해서 유가적 가치들은 가부장제적 가치만으로 전면 부정되며 불교의 깊은 통찰들은 기복 불교로 축소 왜곡됨으로써 문화적 자주성이 대단히 부족한 차원 역시 뜻한다.
“사람됨됨이”와 사회의 전통을 간략히 살펴보자. 맑스적 인텔리겐챠는 우리의 유가적 선비와 상통한다. 성호 이익은 노비와 주인의 “의리”를 임금과 신하의 의리에 비길 뿐만 아니라 노비에게도 벼슬을 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제나라 위왕이 부정부패한 태수를 삶아 죽인 것은 잘못 된 일이 아니라며 지금 세상에는 이런 임금이 없으니 백성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도 하소연할 데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21)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작태는 얼마나 봉건적인가?! 얼음공주를 옹호하는 파시스트 놈들을 성호의 관점에서 보자면 능지처참할 놈들이 아닌가?!
담헌 홍대용은 어머니와 집안 부녀자들을 위해서 일기체 한글본 ≪을병 연행록≫을 쓰는가 하면 부부가 동침하는 것은 도와 학문의 시작이라면서 방자하고 음탕한 정욕을 경계했다. 담헌이 타임머신을 타고 오늘날 남한에 온다면 #MeToo 참여는 물론 여성 해방운동(Feminism)을 열렬히 하지 않을까? 그리고 주목할 지적은 그가 조선의 8가지 병폐를 지적하는데 7번째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함을 지적하며 예로부터 “고려의 공사(公事)는 사흘 밖에 못간다”라는 나쁜 전통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남한의 고위 관료 놈들이 대체로 이렇지 않은가? 동시에 당대 유학자들의 태도를 비판한다. 자랑하려는 마음-이기려는 마음-권력욕-사리사욕 추구 그리고 자기기만을 지적한다. 담헌이 지적하는 “붕당을 세우는 고질” 역시 여전하지 않은가? 이런 고질의 극복책과 직결되는 학문 태도가 바로 공관병수(公觀倂受)다. 모든 것을 공평무사한 눈으로 보아 다른 사상의 장점을 두루 받아들인다는 입장이다.22)
담헌의 공관병수와 상통하는 아인슈타인의 창조적 인식론은 이렇다. “(학자는) 일종의 거리낌 없는 기회주의자로서 지각행위로부터 독립적인 세계를 표상하고자 노력하는 만큼 ‘실재론자(Realist)'로서 나타난다. 그는 경험적 소여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자유로운 발명으로서 개념과 이론을 생각하는 만큼 ’관념론자‘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개념과 이론을 감각경험 사이의 제반관계로부터 논리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한에서만 그런 개념과 이론이 근거를 지닌 것으로 생각하는 만큼 ’실증주자‘로 나타난다”.23) 공관병수-아인슈타인의 인식론적 기회주의와 상통하는 관점을 맑스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일관된 자연주의 혹은 Humanism으로서 그런 관점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진리를 통합하는 것”.24)
이런 공관병수-인식론적 기회주의-관념론과 유물론의 통합의 관점을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적인 관념론이 어리석은 유물론에 비해서 지적인 유물론에 더 근접해있다”고.25) 공관병수-인식론적 기회주의-관념론과 유물론의 통합-지적 관념론과 지적 유물론의 친화성과 상통하는 불교의 관점은 이렇다. “빛과 그림자, 긴 것과 짧은 것, 흑백...그것들은 동일한 것의 상이한 측면들일뿐이며 그것들은 실재(Reality)라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관한 용어들이다”.26)
3.3.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과 천진난만한 삶
아인슈타인은 우리 시대의 위기가 사회에 대한 개인의 관계가 “경제적 생존에 대한 위협”임을 지적하고 있다. 1946년 이 글을 쓸 때의 위기가 오늘날 세계적인 양극화 현상으로 지속되고 있다. Oxfam의 2017년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부의 87%를 단 1%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27) 뭇 새들도 하는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는 남한 젊은이들의 절박한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그런 만큼 불안감과 외로움이 삶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앞서 지적한 “자본주의적 소외” 바로 그것이다. 개개인이 이기주의의 포로들로서 천진난만하고 단순한 삶을 즐기지 못하고 있으며 삶이 짧고 위험스러운 것이지만 “오직 사회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개인주의를 “감옥”으로 본다. “종교가 없는 과학은 눈 먼 것이며 과학이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다”. “삶이란 거대한 태피스트리다. 개인이란 막대하며 기적 같은 패턴 속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한 올 실에 불과한 것이다” 동시에 “삶에서 가장 섬세한 것들은 상호관계에 대한 명징한 파악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파악을 오직 대단히 우울하고 허무주의적 기분으로만 부인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사람들에게 이런 <우주 종교적> 느낌을 분명히 이해시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모든 시대의 종교적 천재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바로 이런 종류의 종교적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독단 그리고 인간의 이미지를 띤 신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런 신에 바탕한 가르침들을 중심으로 삼는 교회란 있을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예술과 과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이런 느낌을 일깨우며 그런 느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그것이 계속 생생하게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다”.28) 아인슈타인의 이런 발언들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광대무변한 우주의 역사 속에서 개인의 지극히 유한한 삶의 현실을 직시하면 개개인의 삶이 허무할 수 있으나 우주-지구-지구상 생명체들의 진화의 역사-인간의 역사-개개인 삶의 당대의 국민국가-계급-지역-학연-혈연-문화 전통-종교-인종과 민족과 같은 다양한 층위의 “정체성”(Identity)을 개개인이 어떻게 조합하느냐 라는 얼키고 설킨 “인연”을 생각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
우리 각자는 완벽하지 않은 해도를 가지고 “인연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며 “인연의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이다.
이런 사고과정은 이성적이면서 “우주 종교적 느낌”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우주적 관점에서 허무하기 그지없는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방도는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보다 고귀하고 보다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한 윤동주의 심정이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특히 사시사철 밤하늘의 경이로운 별들의 세계를 일상적으로 볼 수 없고 그 별들을 헤는 밤을 자연스레 경험할 수 없는 오늘날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은 이런 조건에서 “우주 종교적 느낌”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만큼 “예술과 과학의 역할”은 Anthropocene 세대에게 지극히 중대하다. Anthropocene 시대란 지구 역사상 인간의 생산활동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초래된 기후변화로 지질학적으로 새로운 시대구분을 한 것이다.29) 조조의 아들 조식이 “한 세상 산다는 것은 마치 아침 햇살 아래 이슬 같은 것”(人生處一世 若朝露晞)30)이라고, 무상한 그리고 유한한 삶의 차원을 재치 있게 읊은 것이라면 아인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추도사는 그 허무를 넘어선 위대한 인물의 “텅 빈 충만”을 기리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스스로 “불교야말로 우주적 종교에 가깝다”고 말한 바에 주목해야한다.31) 불교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변화시킨다”(上求菩提 下化衆生)를 실천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나”를 앞서 지적하였듯이 “티끌 하나 속에 온 세상이 들어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하며 “모든 사물은 실체가 없으며 실체가 없는 것이 실체를 띤다”(色卽空 空卽色)라는 관점을 견지한다. 이런 철학적 통찰은 현대 양자역학의 발견과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적 “실체-몸”이란 소립자이자 파동인 쿼크 등의 운동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깊은 안목을 가지지 못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아집”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집착이야말로 삶을 고통의 바다로 만드는 것이다. 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데 그 방도는 창조주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自燈明) 8 정도(八正道)를 실천하여(法燈明) 탐욕에 사로잡히고(貪) 남을 미워하며(瞋) 어리석은 미망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癡) 마음의 상황을(無明)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친구와 광주 민중항쟁을 화제로 대화하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폭행하고 살해한 병사들도 “피해자”라고 궤변을 듣고서 나는 이렇게 반박했다. 계급의 관점을 가지는 동시에 개인의 책임이라는 차원을 무시하는 비변증법적이자 불교의 인연론을 잘못 적용한 판단오류다. 이런 이성적 입장에 더해서 그의 “죄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518 쿠데타 주모자 놈들이 “필요하면 폭도들에게 발포하라”고 했더라도 “명령 불복종”해야 합니다. 베트남 전쟁 때 장교의 인륜 파괴적 명령에 대해서 어떤 병사들은 그 장교를 살해하기도 한 사실에 주목해야합니다. 이러기는커녕 처녀를 성폭행하는 것도 모자라 사람을 두부처럼 짓이긴 놈들을 피해자라고 관용하는 태도는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는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 이런 합리화는 “집단적 죄의식”이 저변에서 작용한 궤변으로서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는 것으로 개인의 윤리-도덕적 작용을 완전히 무시하는 오류다. 그런 궤변적 논리에서는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저항운동-반윤리-도덕적 요구-명령에 응하지않는 부작위”란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며 인간의 정의실현을 위해서 선택할 수도 있는 “한 가지” 투쟁방도로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죄의식의 비루함에서 비롯하는 허무주의”. 이런 논리라면 “지존파”의 살인과 동학농민군이 왜병을 살인한 것의 경중은 물론 그 명백한 질적 차이를 사리분별하지 않는 반 논리인 것이다.
이런 죄의식의 비루한 허무주의와 대칭을 이루는 것이 “정의로움의 독선성”이다. 일상적이든 “역사적”이든 다수가 이런 양 극단의 포로들이다. 아인슈타인의 사회-개인관계와 상통하는 불교의 중도는 이런 양극단의 허무주의와 독선이 아니라 “연기적 공성의 충만”을 깊이 절실히 깨닫고(頓悟) 부단히 “나”를 쇄신해나가는(漸修) 자비이자 지혜다.
3.4. 자본주의라는 악 그리고 사회주의 교육체제
아인슈타인은 악의 진정한 근원을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이며 그런 결과 “개개인이 사회의식의 불구자가 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나쁜 악”이라고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폭발하는 것이 공황인데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 계급에게 “자유계약”이라는 “임금님 옷” 같은 계약을 통해서 상품처럼 판매함으로써 생존해야하는 노동자-민중을 가정파탄과 “자결”로 내몰며 생산기술과 생산설비에 있어서 경쟁력이 약한 자본가 계층을 도태시키고 자본의 집중과 집적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맑스의 ≪자본≫의 핵심 내용을 아인슈타인은 요약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노동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이 “노동자가 생산해 내는 것(잉여 노동시간과 잉여가치 포함)”과 “노동자가 받는 것” 사이의 관계 즉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잉여노동이 생산하는 잉여가치를 “착취”한다는 맑스의 획기적 통찰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청년 아르바이트생들의 경우 노동계약 자체를 문서화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한 상황이 현실이며 어떤 택배 회사의 경우 계약서 자체를 노동자 개인에게 교부하지 않는 일도 있다. “창조 (?) 컨설팅”을 통한 유성기업의 노조 파괴공작 그리고 “적폐청산”과 개헌 그리고 남북한의 평화와 번영을 향하여 제한적이지만 분투하는 문재인 정부를 “민주 헌정”의 위기를 조성한다며 집단적 저항을 하는 파시스트 세력의 그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살인-강도적 행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지 않는가? 사적인 재정지원을 받을 수 없는, 그 따위 착취자들의 지원을 결코 바라지 않는 정당, 통합 진보당을 반 헌법적으로 “위헌 정당”이라며 해산하는 폭력과는 정반대로 파시스트 정당이면서 “자유와 민주의 가면”을 쓰고 있는, 성호 이익의 관점에서 “삶아 죽일 놈들”의 정당이 다수 민중의 자유와 민주를 공공연히 짓밟고 있으며 그런 파시스트 매국행위를 적극 옹호하는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신문-라디오-TV-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온갖 유언비어와 날조한 거짓 뉴스를 양산하고 있는 상황을 아인슈타인이 실시간으로 논평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노동자들이 길고 긴 어려운 정치투쟁을 수행함으로써”라는 구절은 오늘날 남한 노동자-민중운동이 왜 문재인 정부가 법의 이름으로 전교조를 법외 단체로 전락한 상황을 고치겠다고 문 대통령이 공약했음에도 무기력하게 방치하고 있는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다.
잉여가치의 착취에 대한 분노는 고사하고 생산성 향상 그리고 물가상승에도 미치지 못 하는 임금을 수동적으로 받는 현실은 남한 노동자 계급-민중의 정치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며 그런 정당한 자기 정체성에 입각한 용기 있는 과감한 행동력의 부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그런 만큼 사회-정치-문화 의식이 불구임을 뜻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렇기에 “교육을 통한 대동단결”만이 살 길이다! 오늘날 가정이건 학교에서든 각종 대중매체에서는 “소유 지향적(Acquisitive) 성공”을 숭배하도록 자녀들을 길들이고 “권력과 성공의 영예를 찬양”하는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인슈타인은 교육이 상호 경쟁하는 정치집단이 이용하려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도구”임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해방 이후 파시스트 군국주의적 냉전논리의 교육은 조화로운 발전을 한 개인이 아니라 가만히 기다리는 “잘 훈련된 개”를 양성해왔다. “칼 맑스, 탄신 축하해요. 당신이 옳았어요!”라는 기사를 게재한 <뉴욕타임스>는 1953년 6월 13일 사설에서 “X 교수가 조언하듯이 시민 불복종이라는 부자연스럽고 불법적인 힘을 채택하는 것은 하나의 악을 다른 하나의 악으로 공격하는 것이다”라며 악에 바친 악담을 퍼부었고 <워싱턴 포스트>는 이 X를 극단주의자라며 “시민들이 X교수의 조언대로 (상원 국내 안보 소위원회 혹은 하원 비 미국적 활동 위원회) 증언을 택한다기보다 감옥행을 택한다면...우리의 대의제도는 마비될 것이다”고 개 거품을 품었던 사실을 음미해야한다.32)
한국 교육이 김기춘이나 우병우-안태근, 수학실력은 비범하나 제자를 성 추행하는 교수, 의사가 형법적 범죄행위를 저지르면 면허에 제한을 가하려는 대한변호사 협회에 강력 반발하는 대한 의사협회 회장 등 간부 놈들을 배출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아인슈타인의 사상이 그 답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교육의 목표는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개인들의 훈련이 되어야한다. 하지만 그런 개인들은 공동체에 기여함에서 자신의 삶의 성취가 최고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독립적”이라는 말의 뜻이 얼음공주나 파시스트 매국당 놈들이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독재적으로 정책을 밀고 나가는 행태일까? 경제 범죄 집행유예율이 일반인의 경우에는 44%임에 반해서 재벌의 경우에는 72%에 이르는 무전유죄 유전무죄 류의 법적 불공정성과33) 같은 일이 손바닥 뒤집는 일 같이 일어나지 않는가? 흔히 듣는 논리가 “법 감정”과 “독립적인 법의 엄정함” 이다. 이런 반인륜적 논리는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법언(法諺)을 정면 도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법 감정은 이런 도덕 감정으로부터 비롯하는 “윤리적 판단”의 불가분한 요소다. 문재인 정부 출범 1년 간 청와대 국민청원 중 최대 지지를 받은 안건이 연쇄 살인범 조두순의 출소 반대임은 이런 “도덕의 최소한으로서 법과 법 감정”을 명명백백히 보여주는 사실이 아닌가?! 그리고 법률가들이 정말 윤리-도덕적으로 일반 수준을 넘어서며 지성적일까? 한국의 경우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다수가 법비(法匪)들이 아닌가? 의사-법률가-최고 경영자들이 과연 “젊은이로 학교를 떠날 때 전문가가 아니라 인격이 조화로운” 인재일까? 아인슈타인이 중시하고 자신이 실천한 용기 있는,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조화로운 인격”이란 ≪숫타니파타≫의 경구와 같은 것이리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34) 사회적통념에 집착하는 안전함을 비판적으로 사리 분별하는 독립적 사고를 하고 그에 따라 용기있게 행동하는 개방적 사유를 하는 조화로운 인격은 불교의 “모든 현상에는 실체라는 것이 없다(諸法無我)는 공(空: Sunyata)의 사상과 상통하는데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의 날조에 앞장 서 투쟁하시고 인권운동 사랑방과 인권운동 연구소를 설립하셨으며 국가 인권위원회 창립에 기여하신 서준식 선생님은 선승의 깨달음과 같은 물음을 자문한다.
“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지 않고 포용하기란 쉽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면서 그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가득 품고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쉽다. 그러나 적개심과 원한 없이 사랑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35) 이순(耳順)에 이르기까지 직접 혹은 책을 통해서 만난 이 시대 동포들 가운데 내가 가장 감격스럽고 존경하는 분이 바로 서준식 선생님이다. 17년 간 인간에 대해서 성찰한 “사상의 사리들” 중 일부가 바로 이 자문(自問)이다.
“나에게는 학교에서 가장 나쁜 것은 주로 공포감, 강제력 그리고 인위적인 권위라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학생들을 다룸으로써 학생의 건전한 정감들, 진지함 그리고 자신감을 파괴시킨다”. 무지하고 이기적인 교사들이 학생들을 모욕하고 정신적으로 억압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한국의 교육은 나의 어린 시절보다는 덜 하지만 충분히 자유스러워 “탐구하고자하는 성배 같은 호기심으로 질문하는 진정한 기예(Art)"를 양육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특이하게 “자기 주도적 학습으로서 독서”를 통해서 나 자신의 능력개발과 인격형성을 해왔다. 억압적인 학교 그리고 암기식 수업을 깊이 혐오했기에 초-중-고 시절 학교는 전날 읽은 책의 내용을 음미하고 공상하는 장소에 불과했다. 대학교에 가서야 어느 정도 나 자신이 시간표를 짤 수 있는 자유를 누리면서 처음으로 강의에 열심히 참여했다, 유신의 억압을 강렬히 느끼는 가운데. 나의 “자기 주도적 학습법”은 공자의 진리추구 방식과 상통하는 것이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며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인터넷과 Mobile Phone이라는 Stupid Phone 시대에 전 사회적이며 전 세계적인 “주의력 결핍 과소행동장애”의 시대에 독서는 일상적인 명상과 같은 적극행동이다. “혼밥과 혼술 그리고 혼행”에 Mobile Phone은 Smart하다. 손쉽게 당장 필요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으므로. 그러나 자본가 기업은 수학적 Algorithm을 동원해서 이용자들에 관한 Big Data를 수집해서 이윤창출에 Smart 하게 활용한다. 어디 그뿐인가? 미국의 용기 있는 청년 Edward Snowden은 사생활에 관한 미국의 수정헌법 제 4조를 파괴하는 국가안보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의 비밀파일을 폭로하는 역사적 행동을 감행했다, NSA는 1943년 미국과 영국이 “Brusa Comint"라는 전자 간첩 정보망에 협력하는 비밀조약을 체결하면서 설립한 영국의 정부 통신 사령부(GCHQ)와 함께 미국이 설립한 정부 기구다 이 조약에 호주-캐나다-뉴질랜드 그리고 독일과 함께 군국주의 일본이 가담해있음에 유의해야한다. 그리고 이 전자 체제를 이용해서 미제는 세계 최초의 선거를 통해서 출범한 온건 사회주의 Allende정부를 도청하고 있었다.36) 그런 범죄적 행위가 진행되고 있는 시간에 아옌데 정부는 영국의 AI 전문가 Stafford Beer의 도움을 받아 노동자 정부에 의한 생산과 분배과정 통제를 도모하는 Cybersyn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소련 모델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가에 의한 이런 범죄행위에 한국이 예외가 결코 아님은 이미 명백하다. 국정원과 국군기무사의 헌정 파괴적 범법행위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 않는가?! 최근 전 서울시 교육감 곽노현 선생 등은 ”내놔라 시민행동(국민사찰 근절과 국가 정보원 개혁을 위한 열어라 국정원 내놔라 내파일) 운동을 통해서 국정원에 불법적 파일 공개를 요구했으나 국정원은 응하지 않았다,37) AI의 악용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세계 30개국 지도적인 인공지능 연구자와 로봇공학 연구자 50인 이상은 남한의 고등 과학기술 연구원(KAIST)과 무기 제조업체 한화가 인공지능을 이용하는 무기 기술 개발계획에 반대하는 공개서한을 발표, 카이스트 총장이 그 계획을 철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8)
향후 길벗 도서관에서 AI-Internet 시대 교육과 육아 그리고 독서, AI-Internet 시대 국가권력의 불법사찰과 사상의 자유문제를 각각 다룰 수 있기를 바란다.
달라이라마(Dalai Lama: 지혜로운 바다) 역시 이상적인 경제체제란 사회주의적 유형의 경제체제라고 말하고 있다.39) 개량주의-패배주의-냉소주의가 창궐하고 있는 오늘날 이 지구를 이 한반도를 뒤흔들 수 있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용맹을 발휘하는 자세가 인간다운 인간의 길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자
패배시킬 수 없는 원수와 투쟁하자
참을 수 없는 비애를 견뎌내자
용감한 자들이 감히 가고자 하지 않는 곳으로 뛰어가자.
저 별을 따라가자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아무리 멀더라도
세상은 개선될 것이다
왜냐하면 비웃음을 받고 상처로 뒤덮여도 여전히 한 사람이
필사적인 용기를 지니고 분투했기 때문에
그 다다를 수 없는 별에 이르기 위해서“
- Cervantes 40)
<주석>
1. <한겨레> 2018-04-28일자.
2. <조선일보> 2018-04-26일자 A13면.
3. <조선일보> 2018-04-09일자 B9면.
4. <한겨레> 2018-04-17일자.
5. JTBC 2018-05-03 8시 뉴스.
6. www.nybooks.com/articles/archives/2015/apr/02/how-robots-algorithms-are-taking-over
7. 최형록, “한반도 변혁과정의 중대변수, 중국”. 진보넷 속보란 46016. 2013-06-29일자(원래 2006-12-06일자로 작성, 울산 배움터에서 강 의) 혹은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 시절의 꿈나무를 키워 나간다≫ 448면~457면 참고. (비매품. 도서출판 다올 2012. 국립 중앙도서관 ISBN 9788996686187. Moshe Lewin, ≪Le Siecle Sovietique≫ (Fayard, 2003년).
8. <조선일보> 2018-04-06일자 14면.
9. www.tandfonline.org/doi/full/10.1080/ "Nuclear Notebook: A History of US Nuclear Weapons in South Korea", Hans. M. Kristensen and Robert S. Norris.
10. 황현, ≪매천야록≫. 54~59면. 71면.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8년).
11. 최형록, “훼방 70년: 108년 후의 금수회의록”. 진보넷 속보란 51177. 2016-11-08일자 참고.
12. <코뮌 영상교실> 사이코패스들, 경제 민주화의 적들. 진보넷 속보란 43354 2012-07-16일자. youtube.com에서 검색해서 시청 가능.
13. <한겨레> 2018-02-07일자.
14. <한겨레> 2018-04-03일자 그리고 2018-04-11일자.
15.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 꿈 나무를 키워 간다≫, 99~104면. 유튜브에서 “아인슈타인의 Why Socialism 그리고 한국사회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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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아리 편역, ≪홍대용 선집≫, 240~243면, 17~23면, 138~149면. (돌베개, “우리 고전 백선 04, 2006년). 박희병 편역, ≪선인들의 공부법≫, 148~166면. (창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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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한겨레>, 2018-04-24일자. 12면.
34. 법정 옮김, ≪숫타니파타≫, 34면. (이레, 2002년).
35. 서준식, ≪옥중서신≫1985-10-26일자, 569면. (야간비행, 2003년). 최형록, “獄中蓮: 서준식 선생님의 삶”, ≪진보평론≫, 2003년 여름호 수록. 진보넷 속보란에서 “옥중련: 서준식 선생을 말하다”, 43786(2012-09-01)-43832(2012-09-08)-43892(2012-09-15) 참고.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꿈나무를 키워나간다≫ 80~91면.
36. Armand Mettelart, ≪La Globalisation de la Surveillance: Aux Origines de L'ordre securitaire≫, 72~75면. (La Decouverte, 2007).
37. <한겨레>, 2018-01-24일자. 21면.
38. http://futureoflife.org/2018/04/04/ai-and-robotics-researchers-boycott-kaist/
39. ≪Au-dela des dogmes≫, 32면. (Albin Michel, 1994년).
40. prolcenter.wordpress.com/2011/12/18/man-of-la-mancha-2.
참고: 진보넷 속보란을 접속, 하단에 있는 검색란에 최형록을 기입하고 퀴리 전송을 클릭하면 나의 글들과 영상강의를 접할 수 있습니다. 영상강의는 유튜브에 접속, 나의 이름을 기입하면 바로 접속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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