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활동가)
12월 24일 녹산공단에서 선전물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한 노동자가 눈에 뜨일 정도로 다리를 끌며 식당을 나왔다. 여러차례 선전전에서 낯익은 얼굴이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다 허리를 다쳤다고 한다. 병원에 가서 허리디스크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산재신청해서 치료도 받으셔야죠” 하니 “내가 산재신청하게 되면 회사가 보험료가 올라가니 민폐라서”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상태로 봐서 심각한 정도이니 꼭 상담을 오시라는 당부를 하고 헤어졌다.
이틀 후 창원공단의 한 노동조합 교육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또 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동화 공정에서 부품을 이동시키는 로봇의 팔이 일하던 노동자의 오른쪽 귀를 강타하는 사고가 있었다. 노동자는 오른쪽 귀가 심하게 찢어지게 되었고 오랫동안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공정에 문제가 있어서 로봇이 앞쪽으로 옮겨간 사이 노동자는 잠시 고개를 넣어 이 물질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로봇의 움직임이 당연히 정지되도록 설계되어 있었지만 로봇이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조합과의 상담과정에서 이 노동자는 자신이 다치게 되어 회사에 손해를 입히게 되었는데 산재까지 하려 하니 죄스럽다고 그러니 공상으로 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이라는 울타리안의 정규직노동자는 죄책감에 공상으로 처리하고, 영세사업장의 노동자는 아픈 다리를 끌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틴다. 노동현장에서 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이 회사에 끼친 손해를 걱정하고 죄책감을 갖는 상황은 비일비재하게 있는 일이다.
자본에 의해 강요된, 노동자의 자발적 죄의식
재해를 당한 피해노동자가 가지는 죄책감은 무엇 때문일까? 죄의식과 미안함은 어떤 사건을 겪고 그 기억에서 벗어나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지는 감정이라고 한다. 노동자들은 무엇으로 부터 살아남기 위해 상처 입은 자신 스스로가 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일까?
노동 현장에는 현장 정치가 작동한다. ‘목적에 용이하게 이를 수 있도록 정리된 사물들의 올바른 배열’이라고 정의되는 통치처럼, 자본에게 노동자는 ‘노동현장에 이윤창출이라는 목적에 용이하게 노동력은 그에 맞추어 배열되어야 하는 존재, 부품'이다. 노동자는 이윤을 위해 기계에 부속되어 있는 부품이 되어야 하고, 정신력을 집중하여 불량품을 내서는 안 되는 근면 성실한 부품으로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현장의 정치는 노동과정과 노동규율을 통해 노동자의 신체와 무의식에 침투되어 자리 잡는다. 먹고 살기위해 고용을 유지해야 하는 노동자는 철저하게 이 현장 정치에 부합하는 충실한 부품이 되어야 함을 강요받는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을 위해 자본의 입장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노동자는 자본의 눈으로 자신의 신체와 능력을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고를 당한 자신은 생산현장의 질서와 배열에 물의를 일으키고 손해를 끼친 것이 된다.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감정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죄책감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회사가 원하는 방식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방식으로 사건을 처리하게 된다. 자본에 의해 강요된 자발성이다. 요즘과 같은 불안정노동의 시기는 더욱 더 그 압력의 강도가 높아진다.
거세당한 감수성을 되살리는 행동이 필요하다
2013년 초 부산울산경남지역 노동자 5,22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최근 3년 동안 산업 재해를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 5,224명 중 3,263명으로 62.5% 이었고, 이 중 실제로 산재 처리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12.9%에 불과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응답자들의 68.5%가 회사의 만류와 불이익 그리고 산업재해보상 제도의 문제를 꼽았다. 산재를 은폐하기 위해 쓰러진 노동자를 트럭으로 싣고 나가는 반인권적 행위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21세기 대한민국의 노동현실이다.
산재 은폐의 결과는 노동자들에게는 건강하지 못한 작업장에서 작업을 하게 만든다. 반면 사업주에게는 비용절감뿐 아니라 고용노동부로부터 지도 감독대상에서도 제외될 수 있고 무재해 사업장 이미지까지 얻게 되는 1석 3조의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현장의 정치는 공장 담벼락을 넘어 사회화되고 제도화된다. ‘조심 좀 하지 재수 없게’ ‘자기만 아프나’ ‘우리사회가 보호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언제까지 치료해주고 보호해 주어야 하는데...’라며 노동력에 일정한 훼손을 입은 노동자는 사회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당한다.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보호하거나 조심스럽게 취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소비된 노동력은 즉시 다른 노동력으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훼손된 노동력은 사회적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자신의 노동이 아닌 누군가의 이윤을 위한 노동이 지속되는 노동현장, 이윤을 위해 노동자의 신체와 생명에 대한 훼손이 일상화되어 버린 사회에 우리가 있다.
노동자 자신이 훼손당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생명임을 알아차리는 감수성.
생명보다 이윤이 우선시 되는 사회에서 자발적 죄의식에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노동자들의 거세당한 감수성을 되살리는 행동,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연대행동의 하나다.
*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에 1월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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