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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체공녀(滯空女)와 연돌남(煙突男) 그리고 굴뚝인

 

 이김춘택

이 추운 겨울, 구미 스타케미칼과 평택 쌍용자동차에서는 차광호, 이창근, 김정욱 동지가 굴뚝 위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할 때면 항상 언급되는 것이 한국 노동운동 최초의 고공농성으로 알려진 1931년 평원고무공장 노조활동가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이다. 역사학자 박준성선생님이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린 이후,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은 이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 박준성 선생님이 쓴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 관련글 보기
  http://hadream.com/xe/history/43300

그런데,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 1931년 고공농성 며칠 뒤에 강주룡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글을 읽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래로 배우는 노동운동사’ 교육을 할 때마다 매번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다만 박준성 선생님으로부터 듣거나 읽은 내용을 전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전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하다 1931년 당시 인터뷰 글을 읽게 되었다. 그 글에는 강주룡의 삶이, 을밀대 고공농성 당시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 사실을 보다 생동감 있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소개한다.

 

 

* 을밀대상의 체공녀,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동광> 제23호 (1931년 7월호)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ma_014_0220_0150

인터뷰 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강주룡의 지나온 삶의 내력이다. 열네 살에 “아버지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야” 고향을 떠나 서간도로 가야했고, 거기서 스무 살에 다섯 살 어린 “귀여운 도련님”과 결혼하였으나, 1년 뒤 남편이 백광운 독립군부대에 들어가게 되어 남편과 함께 7개월을 독립군부대를 따라다니다 “거치정 거려서 귀찬으니 집에 가 잇으라”고 해 집으로 돌아왔고, 돌아온 지 5개월 만에 남편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시집에서 “남편 죽인 년이라고 중국경찰에 고발하야” 경찰서에 갇혀 일주일이나 단식을 했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강주룡의 삶 속에 식민지 민중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동리(洞里)가 다 부러워 할 만큼 부부의 정이 좋았는데,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앗다기 보다도 남편을 사랑하엿습니다”라고 밝히는 부분이나, 남편 죽인 년으로 몰려 중국경찰에 갇혀 일주일 단식을 했으니, “이번 사흘 쯤 단식이야 쉽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강주룡이 어떤 됨됨이를 지닌 사람인지 엿볼 수 있다.

또한, 인터뷰 글에는 을밀대 고공농성 당일의 과정이 매우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사구라’ 나무에 목을 매 죽을 생각으로 을밀대를 찾았으나, “내가 이대로 죽으면 젊은 과부년이 또 무슨 짓을 하다가 세상이 부끄러워 죽엇나 하는 오해를 받을 뜻하여” 을밀대에 올라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며, 여러 번 실패 끝에 광목천 “한 끝에 무거운 돌을 달아서 집웅 건너편으로 넘겨 놓고” 마침내 그 줄을 잡고 을밀대 지붕에 올라간 이야기며, 올라간 시간이 새벽 두시라 “아즉 날이 밝기는 머럿는지라 日木을 거더올녀 몸을 가리고 한참 잣습니다”라는 부분에서는, 얼마 전 평택 쌍용자동차 굴뚝에 오르며 긴장감에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이창근, 김정욱 동지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한다. 한편, 새벽 두 시 “사면이 고요한데 기생을 끼고 산보하는 잡놈을 두 개나 보앗습니다”는 부분에서는 엉뚱한 웃음을 참기 힘들다.

이렇듯, 1931년 당시 강주룡의 인터뷰를 통해 듣는 을밀대 고공농성의 이야기는 85년이나 지난 과거의 역사를 지금 현재로 생생하게 불러온다. 그런 까닭에 인터뷰가 중간에 잘려 을밀대 농성 이후의 이야기를 더 듣지 못하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다.

인터뷰 글 제목에서 글쓴이는 강주룡을 체공녀(滯空女)라고 썼다. 고공농성을 한 사람에게 별칭을 붙여준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평양 명승 을밀대 옥상에 체공녀가 돌현(突現)하엿다. 평원고무직공의 동맹파업이 이래서 더 유명하여 젓거니와 작년 중 노동쟁의의 신전술을 보여준 일본 연돌남(煙突男)과 비하야 호대조(好對照)의 에피소드라 할 것이다”라고 한 인터뷰 글의 첫 문장이다.

연돌(煙突)이 무엇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아 사전을 찾아보니 연돌은 ‘굴뚝’의 한자어다.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 일 년 전에 일본에서도 노동자의 고공농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 노동자는 지붕이 아닌 굴뚝에 올랐고 그래서 그를 사람들은 연돌남(煙突男)이라 부른 것이다. 그런데 “노동쟁의의 신전술”을 보여주었다는 부분에서 그 이전에는 굴뚝 농성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즉 1931년에 한국 노동운동 최초의 을밀대 고공농성이 있었다면, 1930년에는 일본 노동운동 최초의 굴뚝 고공농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 노동자는 어떤 사연이 있어 굴뚝에 올랐던 것일까? 그의 굴뚝 고공농성은 얼마 동안이나 계속됐으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연돌남’이란 단어 하나로 시작된 궁금증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누군가 1930년 일본 신문을 뒤져 연돌남과 관련된 사건을 찾아 주면 참 좋겠다.

이창근, 김정욱 동지가 쌍용자동차 굴뚝에 오른 뒤 만들어진 페이스북 신문 굴뚝일보(https://www.facebook.com/gultukilbo)는 굴뚝 농성자들을 ‘굴뚝인’이라 부르고 있다. ‘굴뚝인’은 1930년 ‘연돌남’의 현재적 이름인 셈이다. ‘연돌남’에서 ‘굴뚝인’으로, 그렇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100년 가까운 시대를 통과해 이어져오고 있다.

이 시대의 ‘연돌남’, 차광호, 이창근, 김정욱 동지가 투쟁에서 꼭 승리하고 무사히 동지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연대하고 또 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