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동

나는야 하늘 아래 연돌남 おれは天下の煙突男

“평양 명승 을밀대 옥상에 체공녀(滯空女)가 돌현(突現)하엿다. 평원고무직공의 동맹파업이 이래서 더 유명하여 젓거니와 작년 중 노동쟁의의 신전술을 보여준 일본 연돌남(煙突男)과 비하야 호대조(好對照)의 에피소드라 할 것이다” ― 무호정인無號亭人, ‘을밀대 상의 체공녀,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동광> 제23호(1931년 7월)

한국 노동운동 최초 고공농성인 1931년 평양 을밀대 고공농성, 그 주인공인 강주룡을 인터뷰한 글은 위와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글쓴이는 강주룡을 체공녀라 부르며 일본의 연돌남과 비교하고 있는데, 궁금해 찾아보니 연돌남이란 일본 노동운동 최초로 193011월 후지가스방적 가와사키 공장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을 한 다나베 기요시를 칭하는 말이었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 '연돌남' 페이지

일본어판 위키피디아를 검색하면 다나베 기요시의 고공농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참고자료로 1981년 5월 2일 NHK종합TV에서 방송한 <나는야 하늘아래 연돌남 おれは天下煙突男>이란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유투브를 검색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얼마 전, 운 좋게 유투브에서 <역사에로 초대나는야 하늘 아래 연돌남> 영상을 찾았다. 비록 일본어를 몰라 내용 전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번역기를 열심히 돌려 대강의 내용은 알 수 있었고, 그동안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나베 기요시는 굴뚝 고공농성에 올라가며 5일분 식량으로 오징어 한 축, 생수 한 병, 사케 한 병, 담배 세갑(담배가 아닐 수도 있음)을 준비했다고 한다.

다나베 기요시의 굴뚝 고공농성에 사회적으로 큰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굴뚝 농성을 보기 위해 무려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운집하기도 했다.

다나베 기요시의 국뚝 고공농성은 해외 언론의 관심도 끌었는데 미국 신문은 농성 사진과 함께 '기발한 파업 NOVEL STRIKE'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한편, 굴뚝 연기 때문에 다나베 기요시는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렸는데, 실제로 농성을 마치고 내려와 들것에 실려있는 사진을 보면 얼굴이 완전 새까맣다.

다나베 기요시는 굴뚝에 올라 붉은 깃발을 내걸었는데, 깃발에는 '전국노동조합연맹全國勞動組合聯盟' '카나가와일반노동조합神奈川一般組合聯盟' 'O글라이더공장분회Oグライダ'-工場分會'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깃발 뒷면에는 자신의 주장 또는 결의(로 짐작되는 글)를 자필로 적었다.

진행자는 당시 일본 노동조합-정당 사이의 관계를 '노동총동맹-사회민중당', '노동평의회-노농당', '전협-공산당'으로 매치시키는데(위치를 온건에서 급진으로 우에서 좌로 배치했다), 다나베 기요시는 중도좌파인 노농당 중앙집행위원 직책의 활동가였으므로 노동평의회 계열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아마 당시에도 줄을 매달아 고공농성자에게 음식을 올려줬을 것이다. 진행자는 주먹밥과 우메보시うめぼし, 오찻물과 달걀 등을 나무로 만든 사각 바구니에 담아 올려주었다고 소개한다. (유리병에 든 까만 액체는 뭔지 모르겠다)

다나베 기요시는 굴뚝농성 4일째인 1119일 시사신보時事新報 기자와 굴뚝 위에서 25분 동안 단독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를 전하는 신문기사를 통해 농성자가 다나베 기요시라는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래서 신문 기사는 "큰굴뚝 위 남자의 정체 판명大煙突上正體判明" "어젯밤 백삼십척(39m) 정상에서 기자와 회견作夜百卅尺頂上記者會見" "그을린 얼굴로 붙임성 있게 말하다けたなつこく" 등의 내용을 제목과 소제목으로 뽑았다. 그 기사 옆에는 "굴뚝에 발 디딜 틈 없다煙突足場そかく"는제목의 기사도 보인다.

다나베 기요시의 완강한 고공농성에 여러차례 경찰, 쟁의단, 회사 간의 협상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굴뚝농성 6일째인 1121일 오후 1시 반경 쟁의자 일시금(해고자 해고수당, 예고수당 포함) 지급, 제명자 복직과 급여 지급, 사택이나 기숙사에 거주하던 해고자 이전료 지급을 내용으로 하는 각서가 오가면서 쟁의는 타결됐다.

쟁의가 해결되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농당 조직부장이 굴뚝에 올랐다. 다나베 기요시는 쟁의해결 소식을 듣고 모자를 벗어 굴뚝 아래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다나베 기요시는 타결 2시간여 뒤인 오후 322분에 로프에 몸을 묶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와 곧바로 공장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굴뚝 농성시간은 총 130시간22분이었다.

굴뚝에서 내려온 직후 다나베 기요시는 "오늘까지 추위와 바람 때문에 고생했지만 목적이 관철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아직 대변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쟁의가 길어지면 한 달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어젯밤의 비바람은 몸까지 아플 정도여서 괴로웠다. 하지만 이 많은 군중이 우리의 투쟁을 응원해 준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굴뚝 농성이 언론과 사회의 큰 주목을 받긴 했지만, 해결의 요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1121일 오후에 육군특별대연습을 시찰하고 도쿄로 돌아오는 쇼와 국왕이 탄 특별열차가 굴뚝농성장 근처의 도카이도 본선을 통과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만에 하나라도 국왕이 열차를 타고가다 다나베 기요시가 흔드는 붉은 깃발을 보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이 같은 상황이 협상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결국 1121일 오후 1시 쟁의는 해결되었고, 다나베 기요시는 굴뚝에서 내려왔고, 쇼와 국왕이 탄 특별열차는 아무일 없이 예정대로 통과했다.

굴뚝 농성 이후 다나베 기요시는 노농당을 떠나 공산당계의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과 관련을 갖고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다나베 기요시는 1932년 말 행방불명 되었다가 1933214일 아침, 요코하마시 나카구 야마시타공원 수로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언론은 "1세 연돌남 자살? 第一世煙突男自殺?" "익사체로 발견 溺死體" "작년 겨울 술을 많이 마신 뒤부터 행방불명 舊冬痛飮後から不明" 등의 제목으로 자살 또는 사고사인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 기관지 <적기> 122호는 다나베 기요시가 19331월에 이세자키 경찰서에 체포 된 후 고문을 받고 "학살됐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일어판 위키피디아에도 다나베 기요시의 사인을 학살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다나베 기요시를 '1' 연돌남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1세라면 제2, 3세도 있다는 얘기인데, 그가 굴뚝 농성을 한 뒤 2년 동안 다른 굴뚝 농성, 고공 농성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다나베 기요시가 굴뚝 농성을 했던 후지가스방적 가와사키공장은 1939년 도쿄전기(현 도시바)에 매각된 후 제2차세계대전 중 가와사키 대공습으로 소실되었고, 지금은 가와사키 경마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 연돌남페이지에는 2007년에 연극 <! 연돌남>이 초연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몇 달 전인 20225월에도 <! 연돌남> 연극공연이 있었나 보다. 다나베 기요시의 이야기가 오랜 시간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나는야 하늘 아래 연돌남> 영상에는 당시 후지가스방적공장의 보일러부 계장, 노동조합 쟁의단원, 노농당 정치부장, 가와사키경찰서 특고과경부보, 다나베 기요시의 친누나 등의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그런데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니 안타깝다. 누군가 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막 작업을 부탁하고 싶다.

 

▶ NHK 방송 <나는야 하늘 아래 연돌남 おれは天下の煙突男>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33C5dw1dM0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