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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1948년 4월3일 제주 무장봉기

 
제주 4.3 평화공원 모녀상

“앉아서 죽느니 일어서서 싸우자”

제2차 미소공위 결렬 후 미국은 한반도문제를 UN에 상정했다. 1948년 2월26일 UN 임시총회에서 “UN 한국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안이 채택됐다. 이즈음 제주도에서는 미군정의 탄압이 거셌다. 1월22일 제주 CIC(미군방첩부대)는 “제주경찰이 신촌리에서 열린 남로당 조천지부 회의장을 급습, 106명을 검거하고 폭동지령 문건 등을 압수했다”고 보고했다. 2월11일에는 경찰이 “2.7 사건 여파로 제주에서 방화 1건, 테러 9건, 시위 19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으며 3일 동안 290명을 체포했다.

2월 말 남로당 제주도당 임원들의 ‘신촌회의’에서 강·온파의 논쟁 끝에 12대 7로 무장투쟁 방침이 결정되됐다. 3월15일 전남도당 지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남로당 제주도상위(島常委)에서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 수단으로서, 둘째 단선·단정 반대 ‘구국투쟁’으로서 무장투쟁 결행을 최종 결정했다. 3월28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 개시일을 4월3일로 결정했다. 4월3일, 350여 명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새벽 2시를 기해 제주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했다. 경찰 4명,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했다.

5월10일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제주도는 62.8%로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고 북제주군 갑·을 2개 선거구는 과반수 미달로 선거가 무효 처리됐다. 두 군데 국회의원은 1년 뒤인 1949년 5월10일에 선출된다. 그 1년 동안 제주는 피로 물들었다.

 

제주민의 자주의식과 새조국 건설의 꿈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가 무장투쟁을 결행하기로 최종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주도는 1813년 양제해의 모반, 제주도판 임술민란인 1862년 강제검의 난, 남학교도가 주동이 된 1898년 방성칠의 난, 그리고 영화로도 제작된 1901년 이재수의 난 등 민란과 1918년 무오 법정사 항일무장투쟁, 1919년 기미 조천만세운동, 임신 1932년 제주해녀 항일투쟁 등 독립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한반도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투쟁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1920년대부터는 운동의 주류가 대부분 좌익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1925년 ‘신인회’를 결성하고, 1927년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결성하는 등 청년, 적색노동, 적색농민운동을 제주도 전역에서 이끌었다. 그래서 제주민중항쟁의 역사는 지워지길 강요당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1945년의 인민위원회는 마을 단위의 자치조직이었다. 오사카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지도했던 재일 제주인들이 새 조국 건설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안고 귀국했고, 이들과 더불어 제주도는 희망의 노래가 가득했다.

그런데 일제 대신 미군정이 진주하면서 자주적인 정부, 새 조국 건설의 꿈이 짓이겨졌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의 발포가 그 시작이었다. 한국인으로 임시정부를 만들어서 수년 내에 외세 간섭 없는 자주국가 건설을 원했는데, ‘3.1절 발포사건’으로 제주는 역사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한반도에서 유래 없는 ‘3.10 민관 총파업’이 일어나고 경찰도 이에 동참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경찰은 미군정의 엄호와 경찰총수 조병옥의 지휘 아래 2,500여 명을 검거하는 ‘공안정국’을 조성한다. 이에 지도부는 “앉아서 죽느니 일어서서 싸우자” “탄압이면 항쟁이다”라고 외치며 무장 봉기를 결행하게 되었다.

 

미군정의 ‘학살’로 짓밟혀

제주도의 첫 선거는 ‘이식된 민주주의의 절차’와는 무관하게 미군정의 의도에 파열구를 내는 의미가 강했다. 결국 전국에서 유일하게 2개의 선거구가 사고 처리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1년 후 다시 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무장투쟁’을 결정한 지도부는 ‘좌익 모험주의’라는 극단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지도부는 ‘무장투쟁’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깊은 고뇌를 했을 것이다. 결정하면서 참혹한 결과를 예견했을까. ‘4.28 평회회담’에서 전투중지 및 무장해제를 합의했던 것을 보면 궐기 수준에서 끝맺음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군정의 생각은 달랐다. “이번 기회에, 아예 본보기로 쓸어버리려”했고 급기야 5월1일 ‘오라리 사건’을 조작하여 강경진압을 실행에 옮겼다.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레드 헌트’, 그야말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사’를 제주에서 자행한 것이다. 그렇게 제주 민중의 자주의식, 새 조국 건설의 꿈에 ‘학살’을 선물한 것이다.

- 송시우┃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 출처 : 사회변혁노동자당 기관지 <변혁정치> 제24호 (2016년 5월)

[참고자료]

*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 이영권, <제주역사기행>, 2004, 한겨레신문사

* <한내 뉴스레터> 30호, 2011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