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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으며.

 


박 훈(변호사)

최근에「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전태일 열사 타계 45주년, 이 평전의 저자인 조영래 변호사 타계 25주년 (1990. 12. 12. 사망) 을 맞이하여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진가를 느끼게 하는 책은 얼마 되지 않는데 이 책은 그런 책 중 하나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 책이다.

전태일 평전을 처음 읽은 것은 1986년 이었다. 전남대를 다니다 중퇴를 하고 다른 대학을 가면서 본 것이다. 그 책을 한 번 읽는데 무려 3년 걸린 것으로 기억한다. 슬픈 이야기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자란 나였지만 내가 태어나 자랐던 그 시기에 그런 아픔이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 조영래 변호사가 타계한 한 뒤 저자가 밝혀진 평전을 다시 사 읽고 하기를 열 번 정도한 것 같다. 읽을 때 마다 가슴이 아린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은 탄생 또한 슬프다. 1976년 원고가 완성되었으나 출간되지 못하고 1978년 일본에서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 라는 제목에 김영기 라는 가명으로 출판되었다. 훗날 밝혀진 바로는 김영기라는 가명은 조영래의 영과 장기표의 기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원래 조영래 변호사의 친구인 장기표씨가 (이하 존칭 생략) 평전을 준비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었던 조영래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 뒤에 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돌베개)으로 원고 내용이 상당부분 수정된 채 출간이 되었으나 그 반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 위대한 노동자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아픔이자, 가슴 벅찬 감동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영래가 타계한 1990년 12월 바로 뒤인 1991년 초에 이르러 개정판을 내면서 원래 원고 내용대로 그리고 조영래가 저자임을 밝혔다.

조영래는 이 평전을 쓰기 위해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물론, 동생들, 친구들을 인터뷰하고 열사가 남긴 방대한 수기와 편지를 모두 분석하여 썼다. 전태일 열사가 남긴 자료는 이소선 여사가 목숨을 걸고 지켰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료들은 온전히 지금도 내려오고 있고, 그 일부는 전태일 기념 재단의 홈페이지에 스캔되어 게시되어 있다. 아마도 이러한 기록 보존의 열성이 없었다면 뛰어난 평전인 이 평전은 탄생되지 못했을 것이다.

조영래와 전태일 열사는 동시대의 분들이었다. 조영래가 1947년, 전태일 열사가 1948년 생으로 모두 대구에서 태어나 일찍이 대구를 떠났다. (전태일 열사는 대구에 다시 돌아 잠시 청옥 고등공민학교를 다닌다.) 그리고 한 분은 수재 소리를 들으며 명문 중,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다녔지만 전태일 열사는 가난에 찌든 밑바닥 노동자 삶을 살았으나 이 두 분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자결로 인해 운명처럼 만난다.

당시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의 분신은 널리 알려졌고,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하는 그의 되새김은 대학가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분신 후 3일 뒤인 1970년 11년 16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학생 100명이 모여 모임을 갖고 가칭 ‘민권수호학생연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전태일의 시신을 인수하여 ‘서울법대 학생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각 대학에서 ‘전태일 추도식’을 연다. 한국전쟁이후 한 노동자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대학에서 추도식을 한 적은 없었다. 이러한 대학가 움직임은 다음해 봄까지 지속된다.
숨죽여 있던 노동자들의 투쟁도 전례가 없는 양상을 띤다. 그해 11월27일 의정부 외기 노조원 21명은 노조운동 방해에 항의하여 농성투쟁을 벌이면서 전원 분신 잘결을 기도하는 사건이 있었고, 12월 21일 전태일 동료 12명과 이소선 여사는 노조 결성에 방해하는 경찰의 탄압에 항의하여 평화시장 건물의 옥상에서 농성하면서 출동한 기동경찰을 향해 노조 방해책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전원 분신 항거하겠다고 위협하여 굴복시킨다. 1971년 2월 2월에는 한식 음식점 한국회관 종업원 김차호씨가 “월급 4,500원을 받으면서 하루 18시간씩 노동할 수 없다. 평화시장 전태일 선배의 뜻을 따라 우리같이 딱한 전국 요식업체 종업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죽음으로써 호소하겠다.”며 프로판 가스통을 풀어 놓고 2시간 농성한 사건도 있었다.

이제 신문에서도 노동문제는 1차적 관심사로 등장했다. 1971년 4월 27일로 예정된 대선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1월 21일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71. 1. 23. 연두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 구현”을 대선 공약으로, 박정희는 근로자의 복지 향상을 공약으로 내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박정희 당선이후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이 발동되고, (이때 사법연수원을 갓 입학한 조영래 변호사가 구속되어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만기까지 징역을 산다.) 12월 국가비상 상태를 선포에 이어 끝내 1972. 10. 11 유신헌법 제정으로 나아간다. 전태일 사건은 이토록 박정희 정권에 엄청난 위기의식을 가져오게 한 중대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전태일은 평범한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 간난의 모진 세월을 겪으면서 꺾이지 않는 노동자 의식으로 스스로 무장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조영래는 이 평전에서 전태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실이야 말로 가장 좋은 교사다. 그 현실의 가장 깊은 질곡 가운데에서 몸부림치면서, 자기의 심장으로 느끼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었던 사람이야 말로, 교과서의 해설이나 권위자의 암시를 통하여 왜곡되는 일이 없는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을 생생히 본 사람이야말로, 현실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자신의 인간성을 가장 열렬하게 지킬 수 있다. 만약 전태일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앞으로 우리가 이야기하게 될 그의 절절한 투쟁도 그의 눈부신 죽음도 없었을 것이며, 그가 죽은 지 숱한 세월이 흐른 오늘에 와서 우리가 다시 그를 추억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스무 살 청년은 위대한 혁명가였고 사상가였고, 문학가였다. 그의 문체는 유려하면서 핵심을 잘 표현하는 문학이었다. 그는 노동의 소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실제의 나는 일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내 육신이 일을 하고,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때까지의 육감과 이 소란스런 분위기가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는 것이다. 누가 잘랐을까? 이렇게 생각 갈 때는 역시 내가 잘랐다.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렴풋이 생각이 확실해질 때는 퇴근 시간이 다 될 때이다. ” 그리고 문학적으로 노동의 소외를 표현한다. “사실 그 사람이 삽질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 하고 있는 걸세” 철학적인 표현은 심오하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이 위대한 혁명가는 “언제든지 밑지는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쓰는 불우한 사람들”인 여공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조직을 하기 위해 월급 7,000원 미싱사에서 월급이 무려 4,000원이나 떨어지는 재단 보조사로 일을 바꾸고 끝내 재단사가 되어 이들을 조직하고 시위를 하고 노동청과 싸운다. 그리고 모범기업을 세워 노동자들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상세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끝내 이 위대한 혁명가, 사상가, 문학가였던 열사는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치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라는 다짐의 한 방편으로 온 몸에 스스로 불을 질려 장렬히 산화해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난 지금 45년 전 하루 14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신음하던 그 어린 노동자들의 처지가 되풀이 되는 현실에 비통해하고, 또 다른 수많았던 전태일 열사들을 생각하며 울면서 쓰고 있다. 그에게 바치는 시로 이 서러운 울음을 끝내고자 한다.

 

[시인이 된 나는]

 

어느 날 시인이 된 나는

김남주, 김수영, 백석, 윤동주, 기형도 시 전집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수많은 시인들의 시집을 읽었다.

 

죽는 것이 그 시인을 살리고

살아있는 것이 시인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된 시인이 된 나는

시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인은 혁명가일 수가 없었다.

따라지도 아니었다.

넋두리 인간들.

 

시인이 된 내가

발견한 유일한 시인은 전태일이었다.

그의 시다.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이 앉는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2015년 12월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