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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대구에서 만난 전태일

이김춘택 (금속노조 마창지역금속지회)

전태일 동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소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 동지와 이소선 어머니 그리고 조영래 변호사가 잠들어 있는 마석 모란공원이나, 전태일 다리와 동상이 있는 청계천 평화시장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대구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5주기 대구시민문화제’가 열렸고 그 프로그램 중 하나로 전태일 동지의 삶의 자취를 찾아보는 행사가 있었다. 전태일과 대구,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전사(前史)

전태일 동지는 1948년 8월 26일 대구시 남산동 50번지에 위치한 할아버지 집에서 태어났다. 1948년이면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면서 해방이 가져다준 자주적 독립국가 수립의 열망이 결국 분단으로 귀결되던 시기다. 특히 대구는 1946년 10월 인민항쟁으로 역사적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던 곳이기도 하다.

분단의 역사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고, 1950년 6월 28일 전태일의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간다. 그리고 7월 15일 자갈치 시장 생선구루마 위 피난민 아주머니 치마폭에서 동생 ‘전태삼’이 태어난다. 뒤이어 1952년 셋째 ‘전태이’가 1953년에 넷째 ‘전순옥’이 태어난다. 타향에서 무일푼으로 여섯 식구는 오직 아버지 전상수의 양복기술만 믿고 살아보려 애쓰지만 결국 사업에 실패하고 1954년 가족 모두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서울에서의 삶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서울역 부근 염천교 철길 가에서 4~5개월 노숙을 하다 남대문시장 판잣집으로, 그 집이 철거당해 미아리고개 넘어 수유리 공동묘지터 임시천막으로, 다시 남대문 힐튼호텔 축대 밑 수챗물 흐르는 개천 위에 지은 천막으로, 그리고 남대문교회 근처 판잣집으로 밀려 다녀야만 했다. 그 와중에 1960년 아버지 전상수의 사업은 또 한 번 결정적인 실패를 맛보게 되고 가족은 다시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

1961년, 열세 살 전태일은 첫 번째 가출을 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동생 태삼과 동대문시장에서 솔, 조리, 방비, 적쇠, 삼발이 등을 떼어다 위탁판매를 했는데, 점점 불어나는 미수금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가출 후 구두닦이 신문팔이로 1년을 거리에서 떠돌던 태일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애타게 보고 싶던 어린 시절의 영도다리를 찾아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간다. 너무 배가 고파서 양배추 고갱이를 주워 먹으러 바다에 뛰어들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태일은 쓰디쓴 절망을 안고 다시 서울로 향하지만 차마 서울에는 가지 못해 영천 외갓집으로 간다. 그런데 거기서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그렇게 그립던 가족들이 모두 대구에 와 있다는 것이다. 가족들도 모두 가난에 시달리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고향인 대구로 오게 되었는데, 1년이 넘는 가출로 지칠 대로 지친 태일은 극적으로 가족 모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셋째 전태이는 일찍 목숨을 잃고 1960년 태어난 막내 전순덕까지, 여섯 식구가 다시 모인 대구에서의 삶도 역시 판자로 지은 남의 집 셋방살이였지만 전태일에게는 절망 속에 불쑥 솟아난 새 삶이었다. 그리고 대구에서의 삶은 스물 두해 전태일의 생애 중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청옥 시절, 그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들

대구에서 전태일 동지의 삶의 자취를 찾는 것은 명덕초등학교에서 시작했다. 새벽기차를 타고 내려오신 동생 전태삼 선생께서 명덕초등학교 교정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전태일 동지의 청옥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62년 대구에서 다시 모인 가족은 좁은 셋방 한쪽에 미싱 두 대를 놓고 옷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동산병원 담장에 걸어놓은 구호품과 옷을 사와서는 어머니 이소선과 동생 전태삼이 면도칼로 실밥을 뜯고 다림질 해 놓으면 아버지가 재단을 하고, 아버지와 전태일이 미싱을 돌려 옷을 만들면 어머니가 이고 나가 시골장을 돌며 옷을 팔았다. 그렇게 조금씩 가족의 생활이 안정되자 1963년 5월 전태일은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한다.

청옥고등공민학교는 명덕국민학교 안에 임시 교실을 지어 운영한 학교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이 많은 학생들이 다니던 야간 학교였다. 전태일의 집 앞에 넓은 배추밭을 건너면 바로 학교였다. 학력은 인정되어도 정식학교는 아니어서 사범대학 3, 4학년이 선생님이 되어 가르쳤는데, 공부에 목마른 전태일에게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 큰 행복이었다. 하루 종일 미싱을 돌리느라 피곤한 몸이지만 학교를 다니는 하루하루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학기 도중에 입학했어도 반에서 인기가 많아 실장을 맡기까지 했다.

청옥 시절, 전태일에게는 단짝 친구가 두 명 있었다. 박원섭과 김재철 그리고 전태일은 삼총사로 항상 붙어 다녔다. 아침 6시에 일어나면 셋이 함께 앞산 비행장까지 매일 마라톤 연습을 하기도 했다. 학교생활 중에서도 가장 설레던 고등공민학교 대항 체육대회 날, 아버지 전상수는 삼총사를 위해 청옥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빤쓰 세 개를 똑같이 만들어주며 꼭 일등을 하라고 격려해주기도 했다. 똑같은 빤스를 입고 들떠서 운동장으로 향하던 삼총사의 모습을 이야기 할 때는 전태삼 선생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태일은 예쁘고 공부도 잘 하는 부실장 김예옥을 좋아했다. 1970년 11월,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일 결심을 한 전태일은 거사 며칠 전 대구에 내려와 김예옥을 만났다고 한다. 청옥 시절 부실장, 그가 좋아했던 김예옥을 만나서 떡만둣국을 사주고 자신은 먹지 않고 먹는 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고 한다. 비참한 노동현실에 죽음으로 항거할 결심을 했을 때, 전태일은 대구를 찾았다. 청옥 시절은 그가 마지막으로 즐겁게 되돌아보고 싶은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리라.

 

 

‘배추밭 옆집’, 전태일의 삶을 오롯이 간직한 곳

명덕초등학교에서 500미터 거리에 전태일 가족이 함께 살던 집이 있다. 당시는 집과 학교 사이에 염색공장이 하나 있을 뿐 탁 트인 배추밭이었다. 명덕초등학교 정문에서 담장을 따라 걷다 오른쪽으로 꺾어서 자동차용품점이 늘어선 남산자동차골목 중간쯤에서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골목과 골목이 나누어지는 사이 좁은 삼각형 공간에 ‘배추밭 옆집’이 있었다. 50년이 넘는 세월을 오롯이 간직한 채…… 집주인 분은 그 집이 전태일 동지가 살던 집인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십 여명의 사람들이 불시에 들이닥쳤는데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커피까지 타서 내어주며 집 구경을 허락해 주었다.

여러 번 와봤을 텐데도 그 골목에 서서 전태삼 선생은 감회에 젖었다. 보로꾸 담 사이에 예전에 출입문이었던 나무 문틀이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며 자꾸 와보라고 우리를 불렀다. 아래쪽이 닳아 없어진 채로 옛 모습 그대로인 50년 넘은 파란 나무대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본채 옆 지금은 없어진 셋방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그 좁은 공간에서 여섯 식구가 생활을 했다고, 그것도 한 쪽에는 미싱 두 대를 두고 낮에는 집이 곧 공장이 되어 옷을 만들었다고, 전태일이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영어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어 방 한쪽 벽에 영어단어를 붙여놓고 낮에 미싱을 돌리고 옷을 만들면서도 벽을 쳐다보며 영어단어를 외웠다고 손짓 발짓으로 설명해 주었다. 너무 오래 있으면 집주인에게 폐가 되니 그만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여러 번 채근하고 나서야 전태삼 선생은 비로소 옛집 마당에서 발걸음을 떼었다.

 

 

 

계산오거리를 전태일 공원으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배추밭 옆집’을 나온 사람들은 마지막 도착지인 계산오거리 교통섬으로 향했다. 골목길을 따라 죽 걸어가니 양 옆으로 인쇄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인쇄골목이 끝나는 곳에 있는 서현교회를 지나면 계산오거리가 나온다. 계산오거리 한쪽 옆 삼각형 모양의 교통섬에는 벤치 몇 개가 놓인 작인 공원이 있는데 그곳이 대구시 남산동 50번지(지금은 동산동 311번지), 전태일 동지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할아버지 집에서 태어났다. 전태삼 선생이 회상하는 어린 시절엔 집 앞에 가지 밭이 있었고 소달구지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작은 흙길만 나 있었다고 한다. 그 곳이 지금은 높은 건물들로 둘러싸인 중심가 큰 도로로 변해 있었다.

계산오거리 작은 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현수막을 걸고 그 곳 생가 터를 ‘전태일 공원’으로 이름 붙이는 선포식을 가졌다. 시를 낭송하고, 붉은 장미꽃잎을 뿌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나무로 만든 ‘전태일 공원’ 푯말을 땅에 세웠다.

그렇게 명덕초등학교―배추밭 옆집―계산오거리로 이어진 전태일과의 만남은 끝났다. 아마도 나무 사이에 매어놓은 현수막과 땅에 세운 나무 푯말은 며칠 안 가 공원을 관리하는 사람에 의해 없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머지않은 미래에 계산오거리 생가 터는 ‘전태일 공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 곳이 전태일 공원이 되는 날 전태일 동지의 청옥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전태일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간직한 대구는 그 공기가 달라질 것이다.

 

 

 

덧붙임 : 아버지 전상수, 새로운 이야기

이번 탐방길에 전태삼 선생은 전태일 동지와 가족의 삶을 회고하는 긴 글을 공책에 친필로 써 오셨다. 그래서 이야기로 다 듣지 못한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전태삼 선생의 이야기 속에 아버지 전상수에 대한 부분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였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아버지 전상수는 전태일에게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려주는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지만, 얼굴이 아닌 뒤통수만 잠깐 나올 뿐이다. 전태일 동지나 이소선 어머니의 수기를 통해 알려진 아버지 전상수의 모습은 연이은 사업 실패로 좌절해 폭음을 하고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폐인’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그러나 전태삼 선생은 회고 글에서 판잣집을 전전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 전상수의 사정과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반문한다. 그래서 아버지 전상수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전상수 아버지의 생애가 여섯 식구의 생계를 위해서 얼마나 뜨거운 애착이 부단하셨을까. 말대가리 발미싱이 얼마나 빨리 돌았을까. 손과 발, 머리가 온몸이 다람쥐 쳇바퀴보다 빨리 돌았으리라. 전상수 아버지의 생애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 사정을 이해하고 상상하며 공감하는 이해성이 한 번도 없었다.... 폐인을 상상했다. 양복기술 왜정시대 생존의 수단이 재단에서 미싱에서 시다 일들, 몸으로 다 홀로 감당해야 했던 여섯 식구의 가장의 모습. 이 가족을 위해 부단한 생활은 아버지 전상수의 한 생애다.”

 

 

‘배추밭 옆집’은 전태일이 가장 행복해 했던 청옥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집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전상수와의 새로운 불화가 싹터 결국 두 번째 가출을 감행하고 이후 여섯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시작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 전상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전태일에게 청옥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옷 만드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릴 것을 요구했고, 전태일은 끝내 아버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전태삼 선생은 아버지의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려 애쓴다.

“미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장남을, 태일아 너 야간학교 다음에 보내줄게 한 1년이라도 네가 공부하는 시간들 옷을 만들자. 그래서 공장과 집을 따로 마련할 때까지 청옥야간학교를 그만두어야 되겠다.... 15살 소년의 심정을 헤아릴 여유도 없이 부모, 아버지의 마음이 가족을 향한 애착이 그만 화를 자초해버렸다. 만일에 아버지가 먼저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장남인 전태일에게 애정으로 상의하고 아버지의 사정을 보여주시면서 선택을 형에게 하도록 기회를 한 번 주셨으면 하는 지난날을 회상하고 또 회상해 보았다.”

따지고 보면 가난 때문에 이소선 어머니와 맏형 전태일이 집을 떠나야 했을 때, 둘째 전태삼은 아버지 전상수와 함께 있었다. 아내와 큰아들이 떠나고 가족을 혼자 돌봐야 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전태삼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청옥고등학교 학업 문제로 아버지 전상수와 불화했던 전태일이 본 아버지와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전태삼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다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전태삼 선생이 추억하는 아버지 전상수의 모습은 ‘그리움에 따른 미화’를 어느 정도 감안하더라도 한 번 귀 기울여 생각해 볼만한 새로운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