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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강남에서 캠핑하기

 

 


공유정옥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요새 캠핑이 유행이라지요. 저는 한달 전부터 도심에서 캠핑을 하고 있어요. 지난 10월 7일부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이 강남에 농성장을 차렸거든요.

새소리와 피톤치드 가득한 숲 대신 자동차 소음과 배기가스가 자욱한 빌딩숲이긴 하지만 지낼 만 해요. 40층을 훌쩍 넘는다는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생명 세 개의 거대한 빌딩 아래에 자리를 폈으니 이만하면 명당이지요. 강남역 8번 출구에서 스무 걸음 거리이니 교통도 무지하게 편합니다.

낮에는 시원한 늦가을 공기를 만끽하고, 밤이면 비닐 한장을 지붕 삼아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습니다. 세 끼 밥은 물론 수시로 간식도 무료로 제공되구요. 매일 저녁에는 귀한 손님들이 오셔서 즐거운 토크쇼가 벌어집니다.

가끔 오가던 외국인 관광객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니 무료영어회화 연습도 가능한 셈입니다. 취객이나 도둑 걱정도 그다지 없어요. 삼성에서 사설 경비원 두엇을 보내어 24시간 지켜주고, 고해상도 초정밀 광각 카메라가 사각 지대 하나 없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열 명쯤 옹기종기 모여 앉을 수 있는 작은 농성장이지만 우리끼리는 여기를 5성급 호텔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신문에 삼성이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하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보상 신청자가 백 명이 넘었다느니 연말까지 보상을 끝낼 거라느니요. 사람들이 반올림 농성장을 지나가다가 묻기도 합니다. “보상 시작했다는데 왜 농성을 해요?”

실제로 삼성은 9월에 보상위원회를 만들어 보상 신청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드디어 문제가 해결된 줄 알고 저희한테 축하인사를 건네기도 했어요.

하지만 속상하게도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답니다. 누구에게 보상을 할 건지, 보상액은 어떤 기준으로 계산할 건지가 하나도 합의되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보상은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3대 과제 중에 하나일 뿐이예요. 공식적으로 책임을 인정하고 앞으로 다시는 공장에서 병을 얻는 노동자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해야 진짜 해결이 되지요.

그래서 반올림과 삼성은 사과, 보상, 예방, 이렇게 세 가지 의제를 가지고 교섭을 해왔답니다. 2013년 12월에 시작했으니, 벌써 만 2년이 되어가네요.

그런데 교섭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더군요. 세 가지 의제를 동시에 타결하기로 약속해놓고 시작했는데, 삼성이 자꾸 ‘일단 교섭단에 나온 여덟 명의 피해가족 보상부터 먼저 합의하자’고 몽니를 부리는 거예요.

세상에 어떤 교섭단이 자기들 보상금부터 합의를 보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교섭단을 믿겠어요. 반올림 교섭단은 당연히 ‘안된다, 세 의제를 충실히 논의하고, 보상도 모든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준을 만들자’고 했죠.

꼬박 1년 반이나 걸려 마침내 삼성이 8명 우선 보상하자는 주장을 철회했어요. 다행이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피해가족들은 ‘8명 우선 보상 논의’를 하고 싶다며 반올림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삼성은 이걸 핑계삼아 교섭을 지연시키면서, 반올림을 떠난 여섯 명의 피해 가족 모임인 ‘가족대책위’와 따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결과 만들어진 게 ‘조정위원회’였어요. 삼성과 가족대책위 여섯 가족이 직접 교섭보다는 ‘조정’을 받아보자며 외부 인사를 초청해서 만든 것이지요. 처음에 반올림은 조정을 반대했습니다. 1년 넘게 이어온 교섭이 원점으로 돌아갈까봐 걱정했던 거죠.

그러다가 반올림도 결국 조정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조정위원회가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풀겠다’면서 반올림의 참여를 요청해왔는데, 어쨌든 우리로서도 최선을 다해야하니까요.

그래서 2015년 1월부터 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섯 달 동안 이런 저런 입장들을 주고받았고, 마침내 7월 23일 조정위원회에서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권고안’을 냈어요. 투명하고 공정하게 보상과 예방을 집행할 수 있도록 ‘공익법인’을 만들고, 삼성이 이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라는 것이 권고안의 핵심이었습니다.

삼성의 책임을 많이 덜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권고안 중에 소소한 몇 가지들은 보완이 필요해 보였지만, 독립적인 기구를 만들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핵심 메시지는 의미가 컸습니다. 그래서 반올림은 이를 큰 틀에서 수용할테니 열심히 논의를 해나가자고 입장을 밝혔지요.

그런데 정작 부담을 한껏 덜어내었던 삼성이나, 애초에 독립적인 기구를 만들자고 먼저 주장했던 가족대책위에서는 조정 권고안에 난색을 표하더군요. 급기야 삼성과 가족대책위는 입장을 정리해보겠다면서 이 권고안에 대한 토론을 두달이나 미루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둘이서 합의를 보았다면서 보상위원회를 만들고, 보상 절차를 시작해버린 겁니다. 반올림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지요.

게다가 반올림이 하지도 않은 말, 하지도 않은 일들을 거짓으로 꾸며서 반올림을 비방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반올림이 조정 권고안을 거부했다는 말도 나오고, 심지어 산재인정을 위해 몇년을 함께 해 온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도 안되는 흑색 선전 기사들이 줄지어 나오니 참 가슴 아프고 답답한 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속상해도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어요. 열여덟 열아홉에 입사해서 스물 몇 살에 암에 걸려 죽어가는 노동자들이 있잖아요. 앞으로는 그런 사람들 없어야 하는 게 맞잖아요. 삼성이 당장은 돈 몇 푼으로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 들겠지만, 진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랍니다. 더 늦기 전에 삼성이 책임있는 자세로 대화에 다시 나오라고, 우리는 오늘도 강남 캠핑장에서 외칩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http://cafe.daum.net/samsunglabor/

'2015 삼바대회' 삼성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자 http://img.ozmailer.com/userFile/33436/j0xu4yt5v.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