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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손톱만큼의 희망

이정희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 사무국장)

수요일 오후 4시40분. 창원대로 한 가운데에 있는 차룡사거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주섬주섬 전을 편다. 테이블을 꺼내고, 홍보물을 꺼내고, 정류장 곳곳에 현수막도 붙이고. 혹시나 따뜻한 차를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 간이버너도 가져와서 주전자에 물도 끓인다. 사람들을 맞을 준비가 끝나면 얼추 5시가 다 돼 간다. 12월 동지섣달이라 5시가 되기 조금 전부터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한겨울에 버스 정류장에 전을 펼치는 이유는 전자업종 여성노동자 실태조사를 위해서다.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경남여성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가 함께 하고 있는 <네트워크 길>은 지역의 노동문제를 고민하는 단체들이 모여서 만들었는데, <네트워크 길>에서는 2014년부터 핵심사업으로 전자업종 여성노동자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창원공단은 전통적으로 기계, 철강 등 남성 위주의 사업장이 대부분이라서 여성노동자가 대다수인 전자업종의 노동실태는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실태조사를 통해 기본 자료를 확보하고자 시작됐다. 

 

하지만 5시나 5시30분에 퇴근해서 귀가를 서두르는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대부분 정류장에 와서 버스도착정보 안내판부터 확인한 후 버스가 곧 온다고 거절하시거나 아니면 실태조사라는 말에 아예 손사래를 치면서 피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가끔 굉장히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분들도 있고, 3분만 시간을 내달라는 말에 마지못해 응하면서 의외로 많은 얘기를 해주는 경우도 있다.

한 번은 설문조사를 끝내고 돌아서려고 하는데 조심스럽게 “혹시 화장실을 고쳐주는 것도 합니까?”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자세히 물어보니, 여성노동자가 200명가량인 중소 규모의 전자업체인데 화장실이 낡고 청소상태도 엉망이어서 화장실에서 악취가 많이 난다고 했다. 회사에 입사한 사람들이 화장실 때문에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을 정도라고 한다. 전자업체의 특성상 라인작업을 하다 보니 오전, 오후 한 번씩 있는 휴식시간이나 점심시간에만 화장실에 갔다 올 수 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화장실에 가니까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 건 기본이다. 게다가 화장실이 지저분하고 냄새도 많이 나니까 화장실에 한 번 갔다 오면 밥맛이 떨어질 정도로 힘들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여성가족부에서 진행하는 사업 중에 환경개선사업이 있어서 그 사업을 하는 기관으로 연결시켜드리겠다고 하니 절대로 자기가 얘기한 게 회사에 알려지면 안 된다고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회사에서 관리한다는 것만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일인데, 그 화장실조차 일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이 열악한 상태인 것이다. 

또 한 번은 버스정류장 앞에서 실태조사를 진행하면서 같이 나눠드린 노동권리수첩을 보고 질문을 한 경우도 있었다. 노동권리수첩을 보면 8시간 근무에 1시간 휴식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근로기준법에 명시하고 있다는데, 지금 회사는 점심시간이 40분밖에 안 되니까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별도로 휴식시간이 있냐고 물어보니 오전에 10분, 오후에 10분씩 하루에 20분 휴식시간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을 합쳐서 1시간이 되기 때문에 근로기준법 위반은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그분은 약간 실망하신 말투로 “지금까지 다닌 회사들은 휴식시간이 따로 있어도 점심시간은 한 시간씩이었는데, 큰 회사인데도 점심시간을 40분밖에 안 준다”면서 “참 치사하다”면서 돌아섰다. 점심시간을 40분에서 한 시간으로 늘린다고 해도 생산량에 큰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닐 텐데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일할 맛(?)을 떨어뜨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실태조사를 진행하면서 제일 묻기 어려운 질문은 임금과 관련된 부분이다. 임금이 책정되는 방식이 연봉제/월급제/일당제/시급제 중 어떤 것인지, 시급은 얼마인지, 상여금은 몇 %인지, 그래서 1년에 총 받는 연봉은 어느 정도인지, 이런 질문을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얘기해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쉽게 잘 나온다. 왜냐하면 생산직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대부분 시급제이고, 그것도 시급 5,210원(2014년 기준 최저임금)으로 동일하게 책정돼 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상여금이 몇 %인지인데 실태조사를 해 보면 상여금이 아예 없는 경우부터 300%까지 조금 편차가 있다. 예전에 생산직 여성노동자들은 상여금 150%인 곳 다니다가 상여금 300%인 곳이 나오면 바로 이직한다는 얘기를 우스갯소리처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이 힘든 건 매한가진데, 임금이 경력이나 근속기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매년 최저임금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벌려면 상여금이 그나마 많은 곳으로 이직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가끔 실태조사를 진행하다보면 시급이 “5,250원이요”, “5,300원이요” 하면서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최저임금보다 겨우 40원, 90원 많은 금액이지만 다른 여성노동자들 시급인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거리가 된다. 

2015년 새해가 되면서 최저임금은 5,580원으로 2014년보다 370원이 올랐다. 최저임금이 여전히 한 끼 식비에도 못 미치는 낮은 금액이지만 최저임금 인상과 함께 여성노동자들의 시급이 모두 370원씩 오른 걸 그나마 위안이라고 여겨야 할까? 영화 '카트'에서 “반찬값 아니라 생활비 벌러 나왔다”는 염정아의 말처럼 여성노동자에게 일은 낮은 임금, 열악한 환경, 비인간적 처우에도 불구하고 생계유지를 위해 지속해야만 하는 삶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이 품고 있는 희망이라는 것은 고작 깨끗한 화장실, 점심시간 한 시간 보장, 최저임금보다 조금 높은 시급, 다른 회사보다 조금 많은 상여금 등 정말 손톱만큼 작다. 하지만, 이러한 손톱만큼의 희망이라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는 게 현재 여성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여성노동운동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