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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체공녀와 연돌남, 강주룡과 다나베 기요시

이김춘택 / 체공녀와 연돌남  그리고  굴뚝인 두번째 이야기

어제 1931년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과 당시 잡지 <동광>에 실린 강주룡 인터뷰에 대한 글을 썼다.

체공녀 연돌남 그리고 굴뚝인 - http://gnfeeltong.tistory.com/7

그러면서 잡지 <동광> 글 서두에 언급된 일본의 ‘연돌남’이 누구이며, 어떤 까닭으로 굴뚝농성을 했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리고 혹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으로 있는 친구) 후지이 다케시( 藤井たけし)라면 찾아서 알려줄 수도 있겠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그랬더니 정말로 몇 분 지나지 않아 일어판 위키피티아에서 ‘연돌남’에 관한 정보를 찾아서 알려주었다.

http://ja.wikipedia.org/wiki/%E7%85%99%E7%AA%81%E7%94%B7

일본어를 잘 몰라도 구글 번역기를 통해 대강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주인공은 1930년 11월 일본 후지가스방적 가와사키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공장 굴뚝에 올라가 6일 동안 농성을 한 노농당(勞農黨) 활동가 다나베 기요시(田邊潔)였다.

그런데 1931년 을밀대 고공농성과 1930년 후지가스방적 굴뚝농성의 공통점과 농성 이후 강주룡과 다나베 기요시의 삶의 공통점이 매우 인상 깊었다.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의 배경이 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과 다나베 기요시가 지원한 후지가스방적 노동자의 투쟁은 모두 1929년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대공황은 일본 자본주와 식민지 조선의 자본주의에도 밀어닥쳤고 공황으로 인한 고통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일본이나 조선이나 같았다. 평원고무공장 자본이 1931년 5월 일방적으로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하여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인 것과 마찬가지로, 후지가스방적 자본 역시 1930년 6월 해고를 통보한데 이어 9월에는 임금삭감을 통보해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게 된다. 그런데 이 같은 투쟁은 모두 어려움에 처하게 됐고, 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한 명은 공장 굴뚝에, 다른 한 명은 을밀대 지붕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을밀대 고공농성으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풀려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931년 6월 9일 강주룡은 “일제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 이라고 불렀던 평양지역 혁명적노동조합에 참여했던 것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1년 동안 감옥에서 비타협의 옥중 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신경 쇠약과 소화불량 증세로 시달리던 강주룡은 1932년 6월 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아픈 몸이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도졌다. 어려운 형편이라 병원조차 제대로 가보지 못하였다. 동료들의 처지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달 동안 앓아누웠던 강주룡은 1932년 8월 13일 오후 3시 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목숨을 잃었다. 서른두 살 한창 나이로, 한 많은 세상, 그러나 치열하게 살았던 31년 삶을 마감하였다. 이틀 뒤 8월 15일 남녀 동지 1백여 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평양 서성대 묘지에 묻었다.”(박준성 선생님이 쓴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에서 인용 http://hadream.com/xe/history/43300 )

후지가스방적공장 굴뚝농성을 한 지 약 2 년 후인 1933년 2월 14일 아침, 다나베 기요시는 요코하마시 나카구 야마시타공원 수로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언론에 사고사로 보도되었지만 당시 공산당 기관지 <적기> 제122호는 다나베 기요시가 1933년 1월에 이세자키 경찰서에 체포 된 후 고문을 받고 "학살됐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일어판 위키피디아에도 다나베 기요시의 사인을 ‘학살’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강주룡과 다나베 기요시 두 명 모두 고공농성으로 한 지 1-2년 뒤 삶을 마감했다. 강주룡은 비타협적 옥중투쟁으로 얻은 병으로, 다나베 기요시는 경찰에 체포되어 받은 고문에 의해 사망했다. 강주룡은 서른 두 살, 다나베 기요시는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였다.

잡지 <동광>에서 체공녀(滯空女)와 연돌남(煙突男)으로 불리웠던 두 사람, 노동자 투쟁의 승리를 위해 을밀대 지붕에, 공장 굴뚝에 올랐던 두 사람, 고공농성 이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두 사람, 그리하여 서른두 살과 서른한 살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해야 했던 두 사람의 이름이 가슴 속에 묵직하게 와 닿는다. 강주룡과 다나베 기요시,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오래도록 함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 누군가 다나베 기요시에 대해 좀 더 조사, 연구해 그의 삶을 소개하는 글을 썼으면 좋겠다. 또는 이 글의 내용을 좀 더 진전시켜 강주룡과 다나베 기요시의 삶을 함께 소개하는 보다 충실한 글을 써도 좋을 것 같다.

※ 일어판 위키피디아에 ‘연돌남’을 다룬 작품으로 1981년 NHK종합TV에서 방송된 <나는 하늘아래 연돌남 おれは天下の煙突男>이란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있다.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다.

 

후지가스방적 가와사키 공장의 굴뚝에서 내려온 후 의사의 진찰을 받는 다나베 기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