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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게 사는 건가?

 

서평 -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

 

이장규 (노동당 경남도당 정책위원장)

‘미녀들의 수다’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다. 외국인으로서 한국에 오래 살았던 여성들이 나와서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예능프로그램이었기에 가벼운 신변잡기류의 이야기가 주종이었지만, 가끔은 날카로운 이야기들이 나올 때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한 번은 ‘한국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게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상당수 특히 유럽에서 온 출연자들은 ‘밤새도록 일을 하거나 노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유럽에선 상상도 하기 어려운 풍경이라면서.

실제로 유럽의 경우 저녁 6시만 지나도 (원래 저녁시간이 주영업시간인 대중주점이나 음식점 등을 제외하면) 문을 닫는 가게들이 많다. 요즘은 유럽에도 신자유주의 경쟁체제가 확산되면서, 저녁에 문을 여는 경우가 이전보다는 많아졌다지만 한국과 비교하면 극히 적은 수준이다. 자영업자들조차 ‘저녁시간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인식이 기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반면 대다수의 한국인에게는 그런 저녁이 없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모 정치인의 슬로건이 사람들의 많은 호응을 얻을 정도이다. 한국의 노동시간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길며 전세계적으로도 최상위권에 든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노동시간만이 아니다. 학생들의 공부시간 또한 전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인 대부분의 삶은, 어릴 때는 끊임없이 공부에 시달리다가 젊어서는 취업 준비에 시달리고 직장을 가진 후에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삶이다.

이런 장시간 노동/공부 체제는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한다. 한국의 핸드폰 보급율이 전세계 최고라는 것부터 최근의 ‘집밥’ 신화까지, 장시간 노동의 프리즘으로 보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양상들이 대단히 많다. 문제는 이게 단순히 독특한 문화적 양상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장시간 노동 체제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진보정치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여가시간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장시간 노동은 이를 불가능하게 하기에, 한국정치는 돈 있고 시간 있는 부유층이나 신중산층의 전유물이 되어버렸으며 지방자치 또한 시간이 있고 이권이 관련된 상층 자영업자들이 판치는 곳이 되어버렸다. 브라질 노동자당 지방정부의 성과로 한때 한국에서도 많은 관심이 쏟아졌던 참여예산제 또한 마찬가지다. 최근 참여예산제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한 지방자치단체들이 꽤 많지만 제대로 작동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역시 시간 있고 이권이 관련된 사람들이 주로 ‘참여’할 뿐, 정말 참여해야 할 사람들은 그럴 시간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낮은 것 또한 장시간 노동과 관련이 있다. 진보정당의 지지층은 원래는 가난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에선 그렇지 못하다. 일차적으로 정말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을 갖거나 투표할 시간 자체가 없다. 게다가 한국의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은 지역구를 중심으로 선출되는데, 한국의 대도시 사람들 대부분은 지역에 대한 귀속의식이 없다. 쉽게 말해 ‘이 지역이 내가 계속 살 지역이니까 이 지역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 대도시의 삶을 규정짓는 두 가지 키워드인 장시간 노동과 비싼 주거비용이다. 일터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는 판에 출퇴근시간까지 오래 걸리므로 현재 살고 있는 집이나 지역은 그냥 잠만 자는 곳에 지나지 않는데, 지역의 문제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지역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상당수는 자신의 집값이 얼마나 오르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주택소유자들이며,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에서 온갖 개발공약이 난무하는 것이다. 장시간 노동 체제 하에서의 지역구 선거란 보수정당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장시간 노동 체제는 계급적 연대의식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장시간 노동/공부 체제 하에서의 삶은 단순하다. 주중에는 정신없이 일하거나 공부하고, 모처럼 가족이 모이는 주말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주중에는 직장/학교(학원), 주말에는 가족, 이 두 가지 외에는 생각할 틈이 없다. 이런 상황에선 계급적 연대의식이 생길 수가 없다. 노동자계급의 연대의식이란 자신의 직장을 뛰어넘는 노동자계급으로서의 공통적 이해관계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데, 강력한 노조를 가진 대기업 정규직조차 자신의 직장과 관련된 경제적 이해관계까지도 노조 집행부에 대부분 위임하고 자신은 열심히 잔업특근해서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에만 관심을 쏟는 판이다. 장시간 노동을 해서라도 내가 돈을 더 많이 버는 것, 그리고 그럴 수 있도록 내 고용이 유지되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나마 시간이 되는 주말에는 주중에 소홀했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인 상황에서, 나와 내 직장 및 내 가족을 뛰어넘는 계급적 연대의식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렇게 가까스로 유지되는 가족이 제대로 된 것도 아니다. 장시간 노동 체제는 불평등한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강화한다. 남자가 밖에서 뼈빠지게 일해서 돈 벌어 오니까, 여자는 집에서 가사와 육아 및 자녀교육 등을 전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부가 함께 가사노동을 하거나 자녀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위에서 말했듯이, 한 집에 살지만 주말을 제외하고는 이산가족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그나마 남자 혼자 벌어서 가족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는 경우가 차라리 다행(?)이라는 점이다. 가난한 가족일수록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맞벌이를 한다고 가사나 육아부담이 평등해지는 것이 아니므로, 맞벌이 여성들은 직장에서의 노동과 가사노동이라는 이중 부담에 시달린다. 슈퍼우먼이 아니므로, 여성들은 한국의 직장에서 요구하는 정도로 직장에 전념할 수 없다. 이른바 ‘유리천정’의 본질적 원인은, 장시간 노동을 전제로 하는 한국의 직장생활과 전통적인 여성 역할을 요구하는 한국의 가정생활 둘 모두를 한 여성이 요구수준만큼 충족시킬 수 없는 한국의 현실 때문이다.

더 슬픈 일은 이런 장시간 노동 체제에라도 편입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른바 청년실업자나 경력단절녀, 명퇴후 재취업 희망자, 공시족 등 실업자/잠재실업자들이다. 박근혜 정권은 청년실업 등을 핑계로, 저성과자 일반해고 허용 등의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실제로 실업율을 떨어뜨리는데 가장 나은 방법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확대이다. 그럼에도 노동시간 단축은 하지 않고 ‘저성과자’를 손쉽게 해고하겠다는 것은 조금만 길게 보면 오히려 일자리 축소를 가져온다. 저성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더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므로 그만큼 일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취업한 사람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그만큼 일자리가 축소되어 다른 사람들은 취업의 기회가 줄어드는 이 시스템이 과연 정상인가? 이 시스템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한쪽에선 착취, 다른 쪽에선 배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스템에선 장시간 노동 체제에 편입되는 것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예 ‘배제’되기에 장시간 노동 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착취당하기를 원하는 것, 이게 사는 건가?

노동시간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이다. 한국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이라는 측면에서는 임금인상 문제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사안이다. 물론 그렇다고 노동시간 문제가 임금인상 문제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 체제 자체가 지나치게 낮은 기본급과 시간당 임금 등 임금체계 문제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돈만 더 받는다면 잔업특근 등 장시간 노동을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을 기본목표로 해서, 노동시간을 단축해도 기본적인 생활비가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각종 방안들 가령 기본급 위주의 임금체계 조정이나 최저임금 인상 등의 시간당 임금인상 및 각종 사회보장이나 기본소득 등의 사회임금 확충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수단들이 조합되어야 한다. 잔업특근 등 시간외수당의 할증률을 대폭 높임으로써 기업들이 장시간 노동보다는 차라리 사람을 한 명 더 쓰도록 유도하는 것도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임금인상이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운동 및 관련 사회운동의 기본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외국의 노동운동사를 보아도 명백하다. 자본주의 초기부터 노동운동의 주된 목표는 노동시간 단축이었다. 『자본론』 제1권의 「노동일」장에 잘 묘사된대로, 산업혁명 초기에는 어린이나 여성조차 하루에 심하게는 16~18시간의 노동을 했다. 이것이 점차 줄어들어 하루 12시간, 10시간, 8시간 노동으로 되었으며 주 40시간, 35시간 노동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노동절의 유래 또한 1일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도 노동시간 단축의 깃발을 다시 높이 들어야 한다. 아니, 한국에서는 더더욱 시급하다. 노동시간 단축의 각오를 다시 다지는 의미에서 꼭 소개하고 싶은 책이 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에서 기획하고 10명의 연구자와 활동가가 집필한 책으로서, 제목은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라는 책이다 (책 제목은 버니 샌더스의 슬로건인 ‘우리는 왜 이것을 견디고 있는가’를 살짝 변용한 듯하다). 노동시간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접근을 다루고 있는바, 책의 내용은 굳이 여기서 소개하지 않겠다. 사서 직접 읽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노동당 기관지인 『미래에서 온 편지』2016년 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