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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밀양 3년간의 기록 ‘오래된 희망_다큐멘터리’ 사실을 기록하였다. 영화에서 진실이 배어나길 바란다.

 

 

허성용감독 (영화사 파란만장)

2012년 1월 이치우 어르신 분신
한전과 용역들은 765kv의 고압 송전선 및 송전탑을 설치하기 위해 밀양으로 내려온다. 유신정권 말기에 제정된 ‘전원개발촉진법’이라는 악법을 앞세워 주민의 동의 없이 송전탑 부지를 강제로 수용한다.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된 2011년까지도 자신의 논밭과 집 주변으로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주민들은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송전탑 반대 투쟁을 시작한다.
“씨발년, 씨발년... 그렇게 바위 위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우리가 얼마나 분합니까. 80넘은 노인들한테 그렇게 말을 합니다.”
“인부들이 나무를 베려고 막 톱질을 이렇게 하거든요. 그럼 우리가 손으로 막으면 못하거든요. 그럼 자리를 옮기면서 ‘오요요요~’하면서 따라오라는 손짓을 합니다. 이게 개 부르는 소리, 우리를 개로 취급하는 겁니다.”
이치우 어르신은 하루도 빠진 일 없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는 것을 막고, 포크레인이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추후 투입된 젊고 건장한 용역들에게 당한 모멸감과 그로 인한 무력감에 괴로워하다 2012년 1월 16일 분신을 선택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밀양의 주민들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들은 전국의 연대자들이 밀양으로 모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밀양의 송전탑은 반드시 필요한가?
정부와 한전은 영남과 경남에 부족한 전기 수급을 위해 반드시 밀양송전탑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2011년 경기개발연구원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영남의 전력 자급률은 135.9%이며 경남의 전력 자급률은 200%가 넘는다. 이에 한전은 전력수요 증가율이 높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실제 한국은 OECD국가들의 약 6배 가까운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었다. 국내 1인당 가정용 전력 소비량은 OECD국가들 평균치의 절반도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 전기 사용량의 대부분은 가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어디서 사용한단 말인가? 그건 기업이었다. 현대제철이 사용하는 전력량은 9,871Gwh로 이는 일반가정집 1만 가구가 270년 동안 쓰는 것보다 많은 양에 해당한다.
이렇게 산업체의 전력소비가 유난히 높은 이유는 산업용 전기요금이 가정용, 교육용보다 저렴한 것은 물론 원가 이하의 가격으로 공급받기 때문이다. 또한 누진세 역시 적용되지 않는다.
한전은 민자 발전소에서 1kw당 평균 163원에 전기를 구입하고 이를 기업에 원가보다 저렴한 평균 93원에 공급하는데 이로 인해 2012년 한전에 발생한 적자는 55조원이다.(2012년 기준) 이 적자는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매꿔지게 된다. 다시 말해 대기업이 전기를 많이 사용할수록 국민이 내야할 세금은 많이 진다는 것이다.
송전탑 또한 국민들이 사용하는 부족한 전기를 공급하기 위함이 아니라 대기업이 사용하는  전기를 전송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험한 원전(원자력발전소)도 계속 짓고 있는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10년의 투쟁, 2명의 죽음, 100여 명의 부상, 90여건의 경찰 연행 및 조사, 수억 원의 벌금.
군대가 점령하듯 수천의 경찰들과 전경들이 밀양으로 내려와서 너무나 간단히 주민들을 에워싸고 개별로 철저히 고립시켜 위협하였다. 평생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노인들은 공권력의 폭력적인 권위와 압도적인 물량에 위축 될 수밖에 없었다. 경찰들은 감정이 없는 로보트와 같이 시키는 일 외엔 보이는 것도 보지 않고 들리는 것도 듣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낸 세금의 양만큼 할머니들은 고착되었고, 연대자들은 짓눌렸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국가를 상대로 당신들이 우찌 이길끼고~”라는 말이 현실이 되어 당신들 눈앞에 높은 벽처럼 나타났을 것이다. 초식동물을 닮은 순한 눈동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전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사 끝날 때까지 합의 안 하면 당신 앞으로 배정해 놓은 돈을 회수 하겠다”라며 노골적으로 간계를 부렸다. 결국 마음이 무너지고 마을이 무너졌다. 전체 30개 마을 중 5개 마을만이 남았고 3700여명 중에 10%만이 남았다.
한전은 언론을 통해 대다수의 주민들과 합의를 봤다고 알렸다. 이것에 ‘합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마지막 남은 주민들은 송전탑이 세워지는 공사 부지에 움막을 짓고 끝까지 저항한다.

 

 

 

2014년 6월 행정대집행
남은 주민들은 송전탑 공사 부지를 점거하고 움막을 지은 4곳 농성장을 최후의 거점지로 삼는다. (단장면 용회마을 101번, 상동면 고답마을 115번, 부북면 위양마을 127번, 부북면 평밭마을 129번) 한국전력은 이 부지의 움막을 직접 철거하겠다는 것이다.
한전은 관련 법률에 따라 움막 철거를 위한 법적 절차를 완료하였다며 주민들에게 퇴거를 명령하였다. 실제로 한전이 소유권을 획득한 해당 공사부지는 ‘전원개발촉진법’이라는 희대의 악법을 통해 소유권자의 동의와 무관하게 한국전력이 강제로 수용한 부지이다.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받은 고통보다, 앞으로 다가올 행정대집행의 두려움보다, 두 달 일찍 일어난 세월호 희생자들과 자식을 잃은 아직 어린 부모들을 더 걱정하신다.
6월 11일 밀양에도 바닷물이 차오른다. 반대주민들은 나체로 혹은 쇠사슬을 목에 감고 마지막까지 저항하지만 2천여 명의 경찰을 앞세운 한전은 잔인하게 4곳의 농성장을 한순간에 초토화시켰다. 경찰이 무릎으로 노인의 등을 누르면 죄인처럼 엎드려 선한 눈만 깜빡거렸다.

김말해 할머니
밀양에서 태어나 자란 말해 할머니는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열일곱 어린 나이에 아랫마을(도곡) 총각에게 시집을 왔다. 스무살이던 남편은 일본 부역대 징집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고, 해방 후 글을 아는 이 중 하나였던 남편은 마을 반장을 맡게 되고 그로인해 보도연맹에 연루되어진다. 집에 돌아오면 글을 가르쳐주겠다던 남편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몰라 무당에게 좋은날 하루 받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때가 첫째가 여섯 살, 둘째가 겨우 두 살이 되던 해였다.
“그 뒤 그럼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맨 날 농사 저거 일해주고 쪼매큼 받아먹고, 나무 태게(장작) 이고 가서 양식 팔아먹고... 말도 다 못한다.”
스물 살이 되던 해 큰 아들이 아버지와 가족의 죄(연좌제)를 확인해보겠다며 월남전에 자원했다. (당시 사상죄가 있는 자는 월남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 뒤 허리를 다쳐 불구가 되어 돌아온다.

월남전에서 허리를 다친 큰 아들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작은 아들은 열 네살 어린나이에 대구 방직공장에 들어가서 기술을 배웠다. 그 후 방직산업은 사양 산업으로 퇴보 되었고 어린 가장으로 갖은 고생만 하다 IMF를 넘기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 작은 아들은 참 연했다.”
말해 할머니는 지금도 밀양에서 송전탑 반대 싸움을 하고 있다.
“평생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아 왔다.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하고 나무 태게(장작)도 팔아서 땅 한 평씩 그래 모은 땅이다. 이제 더 이상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는 한 번도 내 나라 인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오래된 희망’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영신청 문의) 영화사 파란만장 070.8853.98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