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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경남 통영에서 빨치산 대장 방준표의 발자취를 찾다

1948년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 시절의 43살 방준표 (사진 =임경석, <독립운동열전>)

임경석 선생이 쓴 <독립운동열전> 28장은 빨치산 대장들이란 소제목 하에 한국전쟁 기간 빨치산을 이끌었던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장 위원장 방준표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 방준표의 고향이 이웃 통영이라는 사실이 눈길을 끌었다. 책에는 방준표의 생가인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346번지의 현재 사진이 실려 있었다. 당연히 그 구체적인 위치가 궁금했고, 카카오맵으로 통영시 명정동 346의 현재 위치를 찾아봤다. 그런데 검색이 되지 않았다. 어 이상하네? 이번엔 네이버지도를 통해 검색해봤더니 네이버지도에서는 검색이 됐다. 뭐지? 싶어서 네이버지도에 검색된 위치를 카카오맵으로 확인해 보니 명정동 346’이 아니라 명정동 344’로 표시됐다.

궁금한 건 찾아봐야 한다. 대법원 인터넷 등기소에서 명정동 346의 등기부등본을 확인했다. 그랬더니 명정동 346은 지금은 없어진 지번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폐쇄등기부등본 열람이 가능해서 열람해보니 궁금증을 해결할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명정동 34620148월에 346, 346-1, 346-2로 삼분할됐고, 그 중 3462015년 명정동 344에 합병돼서 등기기록이 폐쇄되었다고 나와 있었다. 그래서 카카오맵에서는 명정동 346이 검색되지 않고, 네이버지도에는 명정동 344의 위치로 검색되었던 것이다. 현재 지도로 보면 명정동 344346-2 사이에 서피랑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도로가 나면서 명정동 346번지가 분할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2022년 11월 현재, 명정동 344에 있는 주택(왼쪽)과 346-2에 있는 카페(오른쪽)

뭔가 궁금증을 풀 단서를 찾고 나니, 좀 더 명확하게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일로 통영에 나갔을 때, 명정동 주민센터에 들러 명정동 344, 346, 346-1, 346-2의 토지대장을 떼고, 통영법원 등기과에 들러 명정동 346의 일제시대 등기부등본(구등기부등본)과 폐쇄등기부등본을 떼어봤다.

토지대장을 보니 명정동 346의 변화 과정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346번지 폐쇄등기부등본에서 이미 확인했던 대로, 도로가 나면서 명정동 346346, 346-1, 346-2 셋으로 분할되었다. 이후 346(14)은 명정동 344에 합병되었고, 지금 명정동 344에는 <독립운동열전>에 실린 사진과 같은 집이 있다. 가장 큰 면적인 346-1(148)은 분할과 함께 도로로 지목이 변경되어 통영시 소유가 되었고, 곧바로 340-1과 합병되어 등기폐쇄 되었다. 그리고 346-2(73)는 삼각형 모양의 땅인데 지금은 3층짜리 카페가 들어서 있다. 폐쇄등기부등본에 표시된 명정동 346의 면적이 235인데 토지대상에 표시된 346, 346-1, 346-2의 면적을 모두 합하면 역시 235이다.

이같은 내용을 토대로 하고, 네이버지도가 제공하는 지적도를 참조하여 명정동 346번지의 분할 전 옛 지적도를 예상해보면 아래와 같다.

방준표 생가터인 명정동 346번지의 비밀(?)이 모두 풀리고 나니 뭔가 뿌듯했다. 그리고 이 같은 내용을 감안하면 빨치산 대장 방준표의 생가를 소개할 때는 <독립운동열전>에 실린 명정동 344의 집 사진이 아니라 아래와 같이 도로를 포함해 명정동 344346-2번지가 모두 보이는 사진을 싣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일제시대 등기부등본(구등기부등본)은 수기로 작성되고, 대부분 한자에다 글씨크기도 작아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등기부등본에 명정동 346의 소유자 중 한 명으로 방정표(方正杓)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방준표(方俊杓)9남매 중 둘째 아들이었다고 하니, 방정표(方正杓)는 그의 형제 중 한 명이 아닐까? (다시 <독립운동열전>을 보니 방정표는 방준표의 8살많은 큰형이고 통영 3.1운동에 참여한 열혈청년이자 통영청년단 창립멤버였다고 한다.)

통영에는 방준표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세병관에서 충렬사 방향으로 난 언덕길을 30미터 정도 올라오면 오른편에 있는 빨간색 2층 벽돌건물로, 옛 통영청년단 회관이다. <독립운동열전>에 따르면 방준표는 192924살에 본격적으로 해방운동에 뛰어들었는데, 그해 8월 통영청년단 위원장에 취임했다고 한다.

사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heritage.go.kr

근대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취약한(?) 나에게 옛 통영청년단 회관은 그 육중하고 단순한 모습이 단박에 마음을 뺏길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건물 정문 왼편에는 통영청년회관건립비가 있는데, 3.1운동의 연장선에서 1919년 통영청년단이 결성됐다는 사실과, 독지가 이영재가 밭 254평을 기증하고 단장 임철규가 거액의 공사비를 냈고, 1919년부터 1923년까지 4년 동안 총공사비 14천 원을 들여 공사를 해 19231118일 회관을 건립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017119일자 <경남신문> 기사에는 회관 건립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와 이후 건물이 지나온 내력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다. (<경남신문> 기사보기 클릭)

"통영사연구회의 박형균(80) 회장은 당시 자금이 부족해 청년단이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서 공연했다고 해요. 그래도 여유가 없자 임철규 단장이 전 재산을 털고 빚까지 내서 이 집을 지었다고 해요. 그 뒤 임 단장은 일본 순사들의 집요한 시달림에다 빚으로 가세까지 기울자 심신이 피폐해져 결국 동호동 앞바다에 몸을 던져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사연이 있습니다라고 건립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시 일본인에게 건축을 맡길 수 없었던 청년단은 인근에 호주선교사의집을 짓고 있던 중국 기술자들을 불러다 붉은 벽돌을 붙이고 지붕은 기와식으로 만들어 집을 완공했다."

"(1931) 통영청년단이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 이 건물은 어용단체인 청년동맹, 소년동맹 등의 사무실로 사용되며 굴곡진 세월을 보냈다. 회관은 긴 시간에 비례해 다양한 변신을 꾀했다. 통영세무소, 동부유치원으로 쓰이다 광복 이후에는 통영여자중학교, 나전칠기강습소, 시립도서관으로 활용됐다."

회관 2층 천장가구 (사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한편, 회관은 국가등록문화제로 지정되어 있는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에서 검색하면, 회관 외형의 다양한 사진과 함께, 2층 천장가구 사진이나 건물의 상세한 도면까지 내려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4413800360000

회관 횡단면도, 종단면도, 1층 평면도, 2층 평면도 (도면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아쉽게도 회관 건립비나 안내판 등에서 방준표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통영청년단 내부 자료나, 통영사연구회 박영균 회장 등 생존하는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방준표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을까?

회관이 1923년 지어졌으니 내년이면 꼭 100년이 된다. 육중한 외양만으로 봐서는 100년이 아니라 200년이 지나도 끄떡없을 것 같다. 현재는 통영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건물 내부에는 통영사연구회, 통영서도회 등이 입주해 있다.

언론기사 검색을 해보면 20161월에 통영시가 회관 보존과 활용방안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는데, 지금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후 구체적인 사업이 추진된 것 같지는 않다. 2023년 회관 건립 100년을 맞아 실질적인 논의가 다시 추진되었으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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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청년회관건립비>

나라를 빼앗긴 통분은 드디어 3.1운동으로 터져 전국을 독립만세소리로 휩쓸었다. 

이 고장에서도 3월 13일, 18일, 23일, 4월 2일 네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만세의거가 일어나 많은 청년들이 피검 투옥되었는데, 그해 7월 이학이李學伊 지사가 옥사獄死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청년들은 박봉삼朴奉杉, 송정택宋正宅 등을 주축으로 통영청년단을 결성하였다.

통영청년단은 일제의 탄압에도 좌절하지 않고 독립정신의 함양과 민족단결을 부르짖으며 조국광복운동을 전개해 왔다. 특히 지육부智育部를 두어 명사초청강연, 연극, 음악, 교양강좌 등을 개최하여 주민의 자질 향상해 주력해 오던 중 마침내 단원 4백여 명의 의지가 결집되어 항일의 전당인 본 회관을 건립하였다.

일제의 갖은 방해와 자금난을 무릅쓰고 건립된 이 회관은 연건평 120평 규모의 2층 현대식 건물로서 총공사비 1만4천원을 투입 4년간의 공사 끝에 1923년 11월 18일 준공을 보았다.

이 회관을 마련하기까지 단원들의 굳은 의지와 단결된 노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지 254평을 희사한 이영재李永宰, 거액의 건립비를 희사한 임철규林徹圭 두 분의 높은 뜻을 기려 이 돌에 새긴다

- 서기 1989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