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필鐵筆> 제3호 (1930년 9월)
신문안新聞眼에 비취인 대사건大事件
평양 고무 파업 대강大綱과 ― 그 삽화揷話 二三
중외일보中外日報 김만형金晩炯
평양에 있어서 과거 10개월 동안에 일어난 중요한 노자쟁의勞資爭議를 들어본다면, 저 유명한 양말직공맹파盟罷를 필두로 인쇄직공맹파, 수상운반조합맹파水上運搬組合盟罷 등이 잇섯고, 최근에 들어서는 산십조제사공山十組製糸工 6백 명의 맹파를 가르칠 것이나, 기질其質과 양量에 잇서서 또한 파업단의 일사분란한 견고한 그리고 훈련訓鍊잇는 침착불굴沈着不屈하는 진용陣容에 잇서서 금번今番에 닐어난 11개 고무공장종업직공 2천3백여 명의 맹파를 제일 중대시重大視할 것이니 이 맹파야말노 평양 유사이래에 처음 보는 대노자大勞資의 쟁의일 것이다. 이제 파업 전말顚末과 파업 중 일어난 2~3개 삽화揷話를 적어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평양에 고무공업이 시작되기는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의 일로, 평안平安, 대동大同, 서경西京, 정창正昌, 세창世昌, 국제國際, 금강金剛, 동양東洋, 내덕內德, 구전久田 등이 순차로 기척幾倜의 자본가들이 출현하여 각기 공장을 건축하고 작업에 착수하엿든 바, 만흔 판로販路를 엇게 되자 점차漸次로 확장되여 금일에 잇서서는 평양공업계의 제1위를 점하게 되엇스니, 과거에 잇서서 공장주 측에서는 막대한 이익을 엇게 되어 한참 호황기에는 4~5할의 이익배당利益配當이 잇서 졸부卒富가 된 공장도 허다하엿스나, 작금 양년兩年에 지至하여서는 세계적으로 물결치는 불경기와 아울너 물가의 저락低落으로 기업에도 이익배당이 적어지게 되어 금춘今春에는 1할 5분 내지 2할의 배당을 하게 되엇고, 따라서 일본산품日本産品의 조선 진출로 인因하여 조선 고무공업계에서 일종의 공포심을 늣기게 되어 누차 전국고무공업자가 회합하여 자위책을 강구하다가 결국 금춘今春 경성京城에서 개최되엇든 고무공업연합회 석상에서 불경기 산업합리화란 구실 하에서 직공 임금을 1할 감하減下할 것을 결의하게 되엇고 평양고무동업회에서는 전기前記 결의에 기하여 7월 31일에 직공 2천3백여 명에게 향하여 8월 7일부터 감하 실시할 것을 성명聲名하엿다.
연수입 불과 130~140원으로 최고 200원까지의 근소한 임금을 밧아 3~4 가족의 호구책糊口策을 근근僅僅 유지維持하여가든 직공들로서 이와갓흔 청천벽력靑天霹靂갓흔 고주雇主측의 성명에 접하자 울분鬱憤함을 참지 못하는 동시에 한 생사生死에 관한 문제이라하야 조합 간부로하여금 동업회同業會 측에 부赴케하여 임금감하 성명을 취소하여 달라는 교섭을 하엿스나 드듸어 거절을 당하였을뿐 안이라 동업회 측에서는 14일까지 여전如前 출근치 안는 직공은 단연斷然 해고하는 동시에 신직공新職工을 모집한다는 통고通告 ‘삐라’를 각 공장에 첩부貼付하여 위협수단威脅手段에 출出하엿다.
이것을 도화선導火線으로 하여 과거 노자간勞資間에 잠재하여 잇든 감정문제까지 합처 드듸어 폭발되는 동시에 태업怠業으로 동업회의 반성反醒을 촉促하엿스나 아모런 효과도 엇지 못하고 임금감하 실시일인 7일 오전을 기期하여 국제고무공장을 위시爲始로 11개 공장 종업직공 1800명이 작업장을 뛰어나아와 고주 측의 억류抑留도 거절하고 공장문을 뒤로 두고 나아오게 되어 여긔에서 완전한 파업을 보게 되엇고 직공을 일허벌인 각 공장의 작업장은 폐허와 갓치 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적적寂寂한 감感을 늣기게 하엿다.
그러나 동업회에서는 최초부터 설마 파업이야 할나구, 파업을 한대도 불과 2~3일에 너머질이라는 자신을 가젓섯고, 따라서 14일 오전에 각 공장에서 기적汽笛만 울리면 삼분의일 이상 직공이 공장 안으로 들어오리라는 확신 하에서 당일 오전 7시를 기하여 기적을 울리지 안는 공장에게는 벌금 100원을 징수할 것까지 결의한 후 그날이 오기만 기다렷고, 이와 반대로 파업직공 측에서는 최초에는 공장 부근 집합노숙集合露宿까지 하여가며 자체의 결속을 힘썻스며 기후其後 다시 세貰집을 어더 분숙分宿하는 일방一方 총본부를 치置하여 통일과 단결을 힘썻고, 다시 “우리의 무기는 오직 단결!” “최후最后까지 싸호자!” 등등의 격문을 7~8차次나 산포散布하여 기세를 올이엇다.
10일 백선행白善行기념관에서 파업직공대회를 개최하여 임금감하 절대 반대 외 19항목의 요구조건을 결의하는 일방 전국고무공업연합회에 결의조건 전부와 아울러 항의문을 발송하엿스며 “최후 1인人 최후 1각刻까지 투쟁하자!”라는 것을 결의한 후, ○업단 만세삼창으로 의기충천意氣衝天한 가운데서 산회散會하엿다.
이것과 동시에 한 가지 문제가 잇섯스니, 일급日給직공 1천8백여 명은 이상과 갓지 일치단결하여 고주 측과 항쟁抗爭하게 되엇스나 특별기술을 요要하는 정급定給직공 3백여 명과 최고 정급직공 40여 명의 태도이엇스니, 정급직공이 파업단에 가담지 안으면 신직공을 모집하야 즉시로 작업을 개시하게 될 터임으로 파업단 측은 절대 불리한 입장에 설 것이요, 반대로 고주 측에서 월급 인상을 호이好餌로 극력 한사恨死하고 파업단 가담을 방지하엿스나 정급공 300명은 10일에, 최고정급 40여 명은 11일에 파업단에 가담하여 완전한 파업이 성립되는 동시에 고주 측은 절대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엿다.
14일은 왓다. 동업회 계획이 승리할가? 직공 측의 시련試鍊이 승리할가? 그야말로 마루씨름을 할 14일이다. 직공과 고주 측은 두말도 말고 평양부민平壤府民 전반이 긴장緊張될대로 긴장되여, 평양시내에는 파업기분이 농후하엿고 공장가工場街인 서성리西城里, 유정柳町, 교구정橋口町 일대에는 흥미잇는 구경을 위하야 위집蝟集한 군중으로 실實노 인산인해를 일웟다.
11개 공장에서 일시에 기적은 울기 시작한다. 예例의 기적보다도 아조 장시간 동안을 ―
고주 측에서는 공장문을 열어놋코 들어오기를 기다렷스나 그 계획은 수포水泡에 돌아갓다. 15일, 16일, 17일 그리구 18일도 여전히 그럿타. 매일 백여 원식式 손해損害만 보면서도 소위 작업기분氣分을 헛경기景氣만이라도 보히겟다는 수단으로 기적을 울리고 연돌煙突에서 검은 연기만 뿜고 있다.
반면에 파업단에서는 군대식과 갓흔 질서정연한 진용陣容을 변變지 안코 잇섯다. 이상과 갓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든 고주 측에서는 신직공 모집 선전 삐라를 살포撒布하엿스나 응모자 업섯다. 수만족數萬足식式의 주문을 밧은 공장 측에서는 속히 작업을 계속繼續하고저 초조하엿스나 파업단 측의 결속이 공고鞏固하여 요지부동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태도이어서 고주 측에서 할 수 업시 타협태도로 숙으러시지 시작하엿고, 따라서 16일 무장야武藏野란 요정에서 쌍방 대표가 회견한 결과를 가지고 17일 긴급緊急직공대회까지 소집하고 12인의 전권교섭위원까지 선거한 후 해결에 당當하고자 경찰 측에서 정한 시각에 위선爲先 첫 교섭을 개시하얏다.
그러나 경찰 측에서 말하는 것과 안이 타협안이라는 것은 전연 직공 측의 불리한 것으로, 도저히 파업단 측에서는 승인承認할 수 업스나 형편形便에 엇지하지 못하야 전권들은 수긍首肯을 하게까지 되엇고, 이와 가튼 보고를 거去21일 백선행기념관에서 제3회 긴급직공대회를 개최하고 전말顚末보고를 하게 되엇다. 흥분興奮된 직공들은 급기야 전권의 무능을 비난하는 동시 불신임안까지 제출하게 되엇스며, 회장會場에서 직공 측 한 사람인 강덕삼姜德三 군이 임석경관臨席警官에게 검속을 당하자 회집會集한 1300여 직공은 검속하랴거든 우리도 함께 검속하라고 고함高喊을 치면서 평양경찰서로 쇄도殺倒하얏다.
경찰서 문전 쇄도한 직공들은 배곱흔 사람이 밥을 달라는데 검속하는 일이 어대 잇느냐, 약자는 약자가 구한다는 등의 규호叫呼 계속繼續하면서 자못 혼란混亂한 형세를 보이자, 경찰은 당황唐皇하야 각기 수습하기에 전력은 다하던 중 다시 연약한 여직공 300여 명이 통곡을 하면서 경찰서 내로 뛰여들어가는 등 일대 혼란을 다시 극極하얏고, 당일 현장에서 재차 검속된 사람이 13명에 달達하얏다. 이와가티 파업 사건은 필자가 이 글을 초秒할 때까지는 해결이 되지 못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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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前記 파업을 딸하일어난 삽화揷話 2~3개를 소개紹介하고 끝을 막기로 하자. 지난 14일 아침에 일어난 이야기인데, 국수 목판을 메고 국수 배달부와 조반 지으려고 물동이를 이고 가든 남의 집 젊은 며나리가 국수 목판과 물동이를 날여놋코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직공들이 잇나? 업나? 하고 정신 업시 구경을 하고 섯는 틈에 시간이 만히 지나 국수는 풀(糊)이 되엿고 조반(朝飯)이 점심(占心)이 되어서 주인에게 싀어머니에게 각긔 책망을 밧엇다 한다.
최초로 파업의 봉화를 든 국제(國際)고무공장 고무배합사(護謨配合師) 서춘익(徐春益)의 안해 박숭덕(朴崇德)은 파업에 참가하엿다고 남편이 탈퇴하라고 요구하엿스나, 박숭덕은 “일천팔백 명의 의사(意思)와 일치 보조를 피하여 혼자만 작업에 착수함은 반역자요 도적년의 행동이랄 수 밧게 업다”고 완강히 거절하여, 이것을 도화선으로 맹렬한 싸흠은 시작되여 자식을 넷식이나 가진 부부가 리혼을 하엿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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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측에서는 십사일 오전 닐곱시에 긔적(汽笛)을 울니지 못하면 벌금 백 원을 밧치게 되어 화부(火夫)를 공장 안에서 나아가지 못하게 한 후 음식까지 사다가 먹이엿스나, 엇더한 공장에서는 화부가 담을 넘어 달아난 관계로 긔적을 울니지 못해 벌금을 물게 되엿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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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건너편에 외따로히 잇는 국제(國際)고무공장에서 ‘헛경긔’를 세우기 위하여 공장 경영자들의 며나리 딸들을 자동차로 운반하여다가 공장에 몰아넛코 쿵당쿵당 소래를 내이다가 점심시간에는 국수직함이 들어간다 요리상이 들어간다 하여 일백오십 원 손해를 보앗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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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단을 통솔하든 고무직공조합장 김유챵(金裕昌)싸가 파업 가街에 격려 순회를 한번 하면 파업직공들은 물론 일반 관중들까지 길을 열어 맛치 큰 지위에 잇는 사람이나 행차하는 모양갓탓고, 한편 모통이에서는 이것이 눈꼴사나워서 붉으락푸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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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든 결심으로 파업단 측의 진영(陣營)을 함락시키고저 무장야(武藏野)란 료정에서 십사일 오전 닐곱시에 일제히 긔적을 울니지 안으면 벌금 백 원을 내이기로 되엿스나 셰창(世昌), 동양(東洋) 두 공장에서는 긔관에 물 넛는 관계로 시간에 긔적을 울니지 못하여 결국 벌금을 물게 되엿스나 두 공장에서는 이것을 내일 필요가 업다고 주챵하여 대 내홍이 닐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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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단을 적색 직공으로 인증한 고주 측에서는 백색폭력단(白色暴力團)을 조직하엿다는 풍설이 굉장하든 십칠일 오후 여섯시 삼십분 경에 서경(西京) 공장의 총무(總務)의 족하 리모(李某)가 금전 또는 음식으로 파업단 측 직공을 강제매수하려다가 실패하고 폭행을 가하여 중상을 지운 것도 한 이야기지만, 마저 삼백 명이 다 일하면 나도 하겟다만 나 혼자는 못 한다고 도도히 설명하고 쓸어젓다고 하니 파업단의 진용과 결심을 보암즉 하였다.
(1930.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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