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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편’이 되어주지 말고 ‘곁’이 되어주십시오

최태돈  한화테크윈지회

 

나는 노동조합활동을 하면서 해고를 당해 18개월 만에 복직이 되었다.  당시 느낌과 복직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달라고 하셨는데 특별히 해야하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조합활동을 하면서 보았던 여러가지 관계를 떠올리며 투쟁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을 가져본다 그러면 우리사회와 조직에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하는 질문에 내게 해답을 주었던  "단속사회"라는 책에서 저자는 인간, 동물, 속물, 유령, 괴물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한다. 

 

1.'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이다. 살았으나 죽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질문 없이 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질문이 생길 때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진정성 있는 삶을 살게 된다. 
현실적인 삶이 요구하는 강제된 정해진 범위 안에서의 선택 이상의 삶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진정성 있는 삶을 살 수가 없다.
 
2.'동물’은 질문을 하지 않는 존재를 말한다. 동물은 주어진 대로 조화를 이루며 산다. 동물은 자연과 불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동물에게는 질문이 없기 때문에 오직 현재 안에서 만족하며 산다. 

만족만을 알뿐 진정한 행복은 모른다. 동물에게는 오직 풍요와 안전만이 중요하다. 모험을 하지도 불화를 겪지도 질문을 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미래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현재적 욕망으로 인한 소비만이 중요하고, 삶의 의미가 아니라 오직 재미만을 추구한다. 

3.'속물’은 질문이 있는 척하는 존재다. 척 하느라 매우 바쁜 존재를 말한다.
전정한 질문이 없으면서도 질문이 있고 해답을 찾고 있는 것처럼 열심히 살지만, 진정한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를 위장할 뿐이며, 질문을 가진 사람처럼 연기하는 존재이다. 아무 가치가 없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고, 자신을 드러내고 전시하고 과시할 뿐 진정한 삶은 없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과 같다.

 

4.'유령’은 질문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사회에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장애인들이 대표적이다. 또한 소수자들이 그렇다. 지하철 출입문 사고의 김 군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비가시화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면 응징을 받는다. 질문이 허락되지 않는 존재가 바로 ‘학생’들일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가만히 있어야 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순응 하느라 죽어간 세월호의 아이들은 죽기 전에 이미 유령이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참혹한 사회인가?

5. '괴물’은 질문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타인을 ‘유령’으로 만드는 자들이다.

질문을 할 수 없는 유령같은 김군을 죽게 만든 메트로 설비 차창 같은 자들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 고통을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괴물이 된다. 
생각해보면 주변에 이런 괴물 같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가 이들을 이리 만들었는지 한번은 생각 해보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 속에 이런 괴물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회사와 조합 내에서 이런 5가지 부류가 싸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복직 후 일상을 적어 달랬는데 옆으로 새었다. 삼성에서 한화로 인수된 후 처음 접하는 회사 분위기가 낯설기만 한데 회사 안은  극명하게 둘로 나뉘어 서로 말조차 안하는 동료들이 있고 또 최근에는 한화가 잘하는 비상장 계열사를 통한 사업분할 문제로 시끄럽다.

아마도 미래에는 돈되는 것만 빨대 꼽고 안되는 건 부동산과 함께 매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러면 더욱 뭉쳐야하고 연대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지만 앞에서 언급한 부류의 사람들의 위치에 따라 오히려 분열되고 무관심 해져가는 것을 보고 있다.
이 사태 앞에서 이전 해고노동자의 이름으로 적은 일기에 적은 편지를 기억한다. 내용을 소개하고 중구난방의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우리는 같은 편이 아니면 적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편’이 되어주지 말고 ‘곁’이 되어주십시오.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언제든 '적'이 될 수 있습니다. 내 '편'은 언제든 남의 '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편을 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지 내 편이 되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편이 되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 편드는 것이 힘들어지고 그는 편드는 것이 편한 쪽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니 절망 하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일관성 있게 그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한 것을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편'이 아니라 '곁'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곁'이 되어 준 사람은 심지어 내가 적이 될 때도 '곁'에 있습니다.
 '곁'은 내게도 자유의 공간을 선사하고 그에게도 자유의 공간을 선사합니다. 동시에 그 자유의 끈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곁은 '품'입니다. '편'은 실상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곁'은 ‘너’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곁’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마창거제 산추련 소식지에 실린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