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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경남 통영에서 빨치산 대장 방준표의 발자취를 찾다 임경석 선생이 쓴 2권 8장은 ‘빨치산 대장들’이란 소제목 하에 한국전쟁 기간 빨치산을 이끌었던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장 위원장 방준표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 방준표의 고향이 이웃 통영이라는 사실이 눈길을 끌었다. 책에는 방준표의 생가인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346번지의 현재 사진이 실려 있었다. 당연히 그 구체적인 위치가 궁금했고, 카카오맵으로 통영시 명정동 346의 현재 위치를 찾아봤다. 그런데 검색이 되지 않았다. 어 이상하네? 이번엔 네이버지도를 통해 검색해봤더니 네이버지도에서는 검색이 됐다. 뭐지? 싶어서 네이버지도에 검색된 위치를 카카오맵으로 확인해 보니 ‘명정동 346’이 아니라 ‘명정동 344’로 표시됐다. 궁금한 건 찾아봐야 한다. 대법원 .. 더보기
평양 고무 파업 대강大綱과 ― 그 삽화揷話 二三 제3호 (1930년 9월) 신문안新聞眼에 비취인 대사건大事件 평양 고무 파업 대강大綱과 ― 그 삽화揷話 二三 중외일보中外日報 김만형金晩炯 평양에 있어서 과거 10개월 동안에 일어난 중요한 노자쟁의勞資爭議를 들어본다면, 저 유명한 양말직공맹파盟罷를 필두로 인쇄직공맹파, 수상운반조합맹파水上運搬組合盟罷 등이 잇섯고, 최근에 들어서는 산십조제사공山十組製糸工 6백 명의 맹파를 가르칠 것이나, 기질其質과 양量에 잇서서 또한 파업단의 일사분란한 견고한 그리고 훈련訓鍊잇는 침착불굴沈着不屈하는 진용陣容에 잇서서 금번今番에 닐어난 11개 고무공장종업직공 2천3백여 명의 맹파를 제일 중대시重大視할 것이니 이 맹파야말노 평양 유사이래에 처음 보는 대노자大勞資의 쟁의일 것이다. 이제 파업 전말顚末과 파업 중 일어난 2~3개 삽.. 더보기
나는야 하늘 아래 연돌남 おれは天下の煙突男 “평양 명승 을밀대 옥상에 체공녀(滯空女)가 돌현(突現)하엿다. 평원고무직공의 동맹파업이 이래서 더 유명하여 젓거니와 작년 중 노동쟁의의 신전술을 보여준 일본 연돌남(煙突男)과 비하야 호대조(好對照)의 에피소드라 할 것이다” ― 무호정인無號亭人, ‘을밀대 상의 체공녀,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제23호(1931년 7월) 한국 노동운동 최초 고공농성인 1931년 평양 을밀대 고공농성, 그 주인공인 강주룡을 인터뷰한 글은 위와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글쓴이는 강주룡을 ‘체공녀’라 부르며 일본의 ‘연돌남’과 비교하고 있는데, 궁금해 찾아보니 연돌남이란 일본 노동운동 최초로 1930년 11월 후지가스방적 가와사키 공장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을 한 다나베 기요시를 칭하는 말이었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를 검색하면 .. 더보기
민주노총 건설과 전노협 해산 평등사회, 노동해방 기치로 건설한 노동자의 조직 전노협 정기대의원대회는 대학에서 주로 열렸다. 사수대가 정문을 지키고 수배상태인 지도부가 몰래 숨어들고 대의원들이 담을 넘어 들어와야 대회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노협 위원장은 추대 방식으로 선출되었다. 선출이라기보다는 결의를 모으는 과정이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하지만 전노협 제5대 위원장 선거는 1994년 1월 23일 경선으로 치러졌다. (선거관리규정도 이때 만들어졌다.) 김영대, 이흥석, 양규헌이 후보로 나섰다. 1차 투표에서 대의원 325명 중 양규헌 후보가 151표, 이흥석 후보가 100표, 김영대 후보가 73표를 받았다. 결선투표에서 172표 대 148표로 양규헌 후보가 당선되었다. 선거 유인물에는 조직발전 전망과 관련한 쟁점이.. 더보기
전 세계 노동자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인터내셔널가’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지난 2014년 5월 1일 창원 만남의광장에서 제124주년 세계노동절 기념 경남노동자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노동자 합창단에 의해 노래 ‘인터내셔널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날 세계 곳곳에서 열린 노동절 기념집회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각 나라의 노동자들이 비록 언어는 다를지라도 하나의 노래, 인터내셔널가를 소리 높여 부르며 집회를 하고 행진했을 것입니다.. 더보기
조선노농총동맹 결성 민족주의 엘리트들, 식민지 인정‧안주 노동자‧농민,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 192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이 활발함에 따라 조직도 늘었다. 1920년부터 1935년 사이 전국에서 조직된 노동조합의 수는 4,294개였다. 이중 1920~1923년 사이에 315개, 1924~1929년 사이 1,714개, 1930년대 초중반 2,265개가 조직됐다. 일제강점기 가장 활발하게 운동이 진행되고 조직이 건설된 시기는 1930년대 초중반이다. 노동쟁의도 마찬가지인데 치안유지법이 제정된 때를 전후로 쟁의가 약간 줄었다가 1927년 이후 늘어 1931년에는 205건, 21,180명이 쟁의에 참가했다.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일본의 경제도 타격을 받아 식민지 수탈 체제를 더욱 강화한 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조직들은 선진적.. 더보기
최초 노동단체 ‘조선노동공제회’ 창립 강연‧야학 개설…잡지‧기관지 발행 노동자·소작인 조직화…전국 46개 지회 6만여 회원 3.1민족해방운동 이후 민중의 힘을 발견한 운동세력들은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조직 건설은 두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고, 하나는 민중이 주체가 되어 밑으로부터 조직 건설의 흐름이 이어진 것이다. 임시정부는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등이 설립했으나 친미외교로 독립을 이루려는 노선과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이루려는 노선이 함께할 수는 없었다. 임시정부는 거창한 이름을 달았지만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 조직이었다. 이와 달리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이 억눌림에서 벗어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조직을 만드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었다. 3.1운동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 더보기
1948년 4월3일 제주 무장봉기 “앉아서 죽느니 일어서서 싸우자” 제2차 미소공위 결렬 후 미국은 한반도문제를 UN에 상정했다. 1948년 2월26일 UN 임시총회에서 “UN 한국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안이 채택됐다. 이즈음 제주도에서는 미군정의 탄압이 거셌다. 1월22일 제주 CIC(미군방첩부대)는 “제주경찰이 신촌리에서 열린 남로당 조천지부 회의장을 급습, 106명을 검거하고 폭동지령 문건 등을 압수했다”고 보고했다. 2월11일에는 경찰이 “2.7 사건 여파로 제주에서 방화 1건, 테러 9건, 시위 19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으며 3일 동안 290명을 체포했다. 2월 말 남로당 제주도당 임원들의 ‘신촌회의’에서 강·온파의 논쟁 끝에 12대 7로 무장투쟁 방침이 결정되됐다. 3월15일 전남도당 .. 더보기
1947년 3.10 제주도민총파업 “조선에서 처음 보는 관공리의 총파업” 1947년 3월1일은 제주현대사에서 분수령으로 기록될 만한 날이었다. 3.1절 28주년 기념식을 맞아 제주도 좌익세력이 주도한 시위에서 군정경찰이 발포하면서 빚어진 이날의 사건은 주요한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해 ‘조선에서 처음 보는 관공리의 총파업’(당시 자료)이 시작되었고, 군정당국은 이에 맞서 지원경찰과 서청 등 우파 청년단체원들을 제주에 대거 내려 보내 물리력으로 검거공세를 폈다. 미군정과 제주도 좌파세력이 전면 대립국면으로 돌입했다. 결국 3.1절 발포사건은 ‘4.3항쟁으로 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3.1절 발포사건으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에는 초등학생과 젖먹이.. 더보기
전노협 결성 - 새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서울과 중부지방에 6.7cm나 되는 눈이 내렸고 기온은 영하 11.2도로 떨어졌다. 빙판길에 출근과 후기대학입시로 분주했던 전철이 조금 한가해지는가 싶더니 서울로 향하는 전철은 다시 노동자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서울시내 대학은 경찰 병력으로 모두 원천봉쇄 되었고 특히 서울대에는 자그마치 2만5천 명의 병력이 진을 쳤다. ‘한겨레신문’은 호외를 발행했다. 10시에 “민정·민주·공화 새정당 창당 합의”를 했다는 기사를 앞면에, “전노협 결성대회 강행” 기사를 뒷면 한 구석에 실었다. 1990년 1월 22일, 전노협 결성대회가 열린 날 전노협 결성대회는 애초 서울대로 공지되었지만 수도권 어디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울의 대학들, 심지어 녹천역 숲속 공터 모두가 후보지였고 대회를 바로 앞두고 경찰이 .. 더보기
저 노동자는 저 일을 해도 괜찮은가?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사업주들은 항상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질문1. 저 노동자는 저 일을 해도 괜찮은가? 질문2. 나는 저 노동자가 일을 하는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는가? 질문3. 나의 가족(아이)은 저 노동자가 하는 일을 해도 괜찮은가? 이는 노동자들이 어떠한 작업 조건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위험이 있는지,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기초적 질문이다. 만약 세 가지 질문 중 하나라도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 일은 위험하며 대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대책은 세 가지 원칙에서 의거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노동자는 업무로 인해 다치거나 사망해서는 안 된다. 둘째, 노동자는 업무로 인해 질병에 걸려서는 안 된다... 더보기
삼성중공업 휴업수당 미지급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삼성중공업 휴업수당 미지급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철저한 진상규명과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 고용노동부 통용지청, 5개 업체 4억9천6백여만원 미지급 확인 - - 휴업수당 법적 기준의 27.8%밖에 지급받지 못해 - - 1인당 평균 미지급액 51만원 - -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 추석 전 해결 노력하겠다 답변 - 5월 1일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로 인한 작업중지기간에 대해 하청노동자들이 법적 기준에 턱없이 모자란 휴업수당을 지급받았다는 사실이 고용노동부 통영지청 근로감독 결과를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고용노동부 통영지청은 9월 15일 보도자료를 내고 삼성중공업 협력업체 5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근로감독 결과 5개사 모두 휴업수당을 법정 기준보다 적게 지급한 사.. 더보기
'편’이 되어주지 말고 ‘곁’이 되어주십시오 최태돈 한화테크윈지회 나는 노동조합활동을 하면서 해고를 당해 18개월 만에 복직이 되었다. 당시 느낌과 복직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달라고 하셨는데 특별히 해야하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조합활동을 하면서 보았던 여러가지 관계를 떠올리며 투쟁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을 가져본다 그러면 우리사회와 조직에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하는 질문에 내게 해답을 주었던 "단속사회"라는 책에서 저자는 인간, 동물, 속물, 유령, 괴물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한다. 1.'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이다. 살았으나 죽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질문 없이 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질문이 생길 때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진정성 있는 삶을 살게 된다. 현실적인 삶이 요구하는 강제된 정해진.. 더보기
나의 친구 랄을 기억해주세요 '사람의 정체성은 피부색이나 신장색이 아닙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마음과 생각으로 정의됩니다..' (대우조선 컨테이너선 추락사고로 고인이 된 랄바하둘의 SNS 상태 메세지) 김 정 열 (노동건강문화공간 새터 운영위원ᆞ대우조선 현민투 사무국장) 네팔에서 온 청년 타파체트리랄바하둘. 줄여서 랄바우둘이라 부르며 나는 그를 랄이라 부른다. 랄과 나는 친구다.우리의 인연은 2015년 초 이주노동자 태권도 모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의 이주노동자 친구들이 그렇듯 랄은 고강도 장시간 노동에 늘 지쳐 있었고 그런 그에게 태권도 수업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문화생활이자 해방구였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어떻게든 모임에 참석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런 랄은 모임때마다 항상 어깨와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급기야 .. 더보기
스물일곱 지훈씨의 조선소 취업기 또는 생존기 이김춘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스물일곱 살 지훈씨는 전남 강진에서 알바천국 광고를 보고 거제에 왔다. 광고에는 “일급 15만원, 4대보험 회사부담, 당일 바로 입사”라고 되어 있었다. 조선소 일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뭐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구인광고에 나와 있는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하니 당장 오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거제에 와보니 광고처럼 당일 입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지훈씨 말고도 서울에서, 강원도 원주에서 온 또래가 2명 더 있었는데, 전화를 받았던 ‘제일ENG’ 과장이라는 사람이 모텔을 잡아주며 일단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제일ENG’가 아닌 ‘현주기업’이라는 곳에서 사람이 왔다. 숙소도 원룸으로 옮겼고 드디어 입사 날짜가 잡혔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