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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노조파괴 없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당신들이 옳았습니다


 

선지현 (노조파괴 중단_한광호열사정신계승 충북공동행동)

 

 

충북 영동, 자동차부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입니다. 이 공장에서 한 남성노동자가 자결을 했습니다. 동료들에게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떠났습니다. 42세. 한광호. 그는 죽기 전에 수십 개의 담배를 피웠습니다. 동료들은 ‘회사의 악랄한 노조파괴 때문에 한광호가 죽었다’며 오열했습니다.

 

저마다 ‘나도 죽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그의 죽음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결말이 될까 공포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동료들은 한광호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싸웠습니다.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3월 4일 그의 장례를 치르려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53일째 날. 동료들은 그를 보내려 합니다.

 

노조파괴, ‘공장 문을 넘는 게 죽기보다 싫다’

 

2011년 5월 18일 유성기업은 노조와 합의한 ‘주간연속2교대’ 실시를 앞두고 돌연 입장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돌입한 파업 4시간 만에 공격적인 직장폐쇄를 하고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수 백 명의 용역깡패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용역들은 소화기로 노동자들을 머리를 내려치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폭력적으로 노동자들을 내쫓았습니다. 심지어 자동차로 노동자들을 치고 달아나기까지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3개월동안 공장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면서 싸웠습니다. 법원 조정으로 어렵게 현장에 복귀한 노동자들. 현장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현장에는 유성기업 경영진이 주도해 만든 어용노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장으로 복귀한 동료들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회사가 주는 물량을 소화하는 데만 열을 올렸습니다. 회사 경영진들은 이른바 가학적 노무관리를 본격화했습니다. 5분만 자리를 비워도 경고를 때리고 임금을 삭감합니다. 항의하러 가면 또 임금을 삭감하고 경고 2회를 때립니다. 이게 쌓이면 출근정지가 나옵니다. 금속노조 조합원들에게는 잔업도 특근도 시키지 않습니다. 항의하면 또 경고장이 날라 옵니다. 관리사무실로 찾아가면 고소고발. 당시 쌓인 고소고발이 1,080회. 조합원들은 수 십장의 경고장을 받아야 했습니다. 100여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출근정지를 비롯한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현장 곳곳에는 몰래카메라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발견하고 이를 테이프로 가렸다고 또 징계를 때립니다. 그리고 고소고발. 오죽했으면 관리자가 한 명이 ‘나는 CCTV가 아니다’라며 회사를 그만 두었겠습니까.

 

가학적 노무관리는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을 위협했습니다. 2016년 3월, 심리치유센터 두리공감이 조사한 결과 금속노조에 소속된 유성기업노동자의 43.3%가 우울증 고위험군으로 밝혀졌습니다. 노동자들의 절반이 회사의 가학적 노무관리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광호 조합원은 그 중에서도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여러 차례 '회사 공장 문을 넘어가는 게 죽기보다 싫다‘고 호소했습니다. 동료들은 그 고통을 빨리 알아채고 대응하지 못한 것을 가슴 치며 후회했습니다. 그들도 주변을 돌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진=미디어충청)

 

노조파괴 배후, 현대차 정몽구!

 

유성기업노동자들은 2011년 회사의 공격적인 직장폐쇄와 노조파괴에 순응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로서 ‘존엄’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직장폐쇄 전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치열했고, 또 처절했습니다. 검찰이 불기소 처분한 노조파괴 문제를 법원에 재정신청을 내고 법원 앞에서 수 개월동안 노숙농성을 벌여 법원의 재정신청 수용을 받아냈습니다. 2012년 겨울부터 시작해 151일에 걸친 공장 앞 굴다리 고공농성, 2014년 295일간의 철탑 고공농성이 이어졌습니다. 공장 안에서, 광화문에서, 법원 앞에서 삼보일배를 거듭했습니다. 노조파괴 사업주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노동권 보장을 위해 그들은 할 수 있는 온 힘을 쏟았습니다.

 

재판이 열리자 검찰은 압수수색한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2016년 2월, 검찰이 공개한 자료에서 현대차가 어용노조 설립 및 확대를 포함해 노조파괴를 지시한 정황이 담긴 자료들이 드러났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노조파괴 배후에 바로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굴지의 재벌 현대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2016년 3월 17일. 한광호 조합원의 죽음. 노동자들은 억울한 동료의 죽음, 죽음을 통해 노조파괴의 잔혹함을 세상에 알린 한광호의 시신을 묻지 못하고 ‘열사’투쟁을 시작합니다.


 

처절한 투쟁을 통해 노조파괴 사업주 유시형을 감옥으로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한광호열사의 영정을 들고 서울로 갔습니다. 분향소를 차리는 데만 일주일이 넘게 걸렸습니다. “세상 사람들, 한 노동자가 이렇게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노조파괴로, 가학적 노무관리로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5월 17일 동료들은 다시 영정을 들고, 노조파괴 배후, 아니 노조파괴의 또 다른 주범인 현대차 본사 앞으로 갔습니다. 분향소는커녕 비닐 한 장 제대로 깔 수 없었던 곳. 분향소를 지키려다 수십 명이 연행되고, 현대차 용역들에게 온갖 수모를 다 당해야 했습니다.

 

그럴수록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유성기업 서울본사, 한남동 정몽구 집앞, 양재동 현대차 본사까지 일인시위와 노숙농성을 하며 싸웠습니다. 유성기업 유시영이 지휘하고, 현대차 정몽구가 조종해 벌인 이 노조파괴 범죄를 반드시 단죄하겠다는 노동자들의 의지는 4계절을 거리에서 보내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박근혜정권의 국정농단 사태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유성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청와대 앞까지 ‘박근혜 퇴진, 노조파괴 사업주 처벌’을 외치며 몸을 기어 청와대 앞까지 갔습니다. 매주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적폐 중에 적폐! 노조파괴 문제를 시민들에게 알리며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냈습니다.


(사진=노동과세계)

 

노조파괴 없는 세상으로 편히 가소서

 

2월 17일. 유성기업 사업주 유시영을 비롯한 경영진 선고 재판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법원은 유시영회장에게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검찰구형보다 높은 1년 6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 시켰습니다.

 

노동자들은 서러움과 기쁨이 섞인 울음을 통해냈습니다. “우리 한광호에게 사과하고 가라. 살려내라”며 오열하던 노동자들. 그들에게 1년은 참으로 처절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민주노조는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웃으며 족구 한 게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민주노조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살 수 있는 현장입니다”

 

‘밤에는 잠 좀 자자’고 시작했던 투쟁. 그러나 잠은커녕 숨 막히는 고통 속에 살아내야만 했던 그들. 그렇게 6년을 버티고 버텨 ‘노조파괴 없는 세상을 바라는 노동자들이 옳았고, 사업주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그 한마디에 오열하는 그들. 그들이 이제 353일 만에 열사 한광호를 떠나보냅니다.

 

아무 것도 합의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투쟁을 통해 사업주 처벌을 이뤄내고 치르는 장례입니다. 여전히 산자들은 투쟁할 몫이 남겨져 있습니다. ★